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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호가 필모른 배포전 <호우주의보> 우5 [호우시절] 부스에서 뵙겠습니다.







  린신은 또다시 안개 낀 숲을 걸었다.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 숲은 이번에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며 린신을 어딘지 모를 곳에 데려다 놓았다. 숲이 사라진 자리에 들어선 것은 고즈넉한 저택이었다. 척 보아도 상당한 규모의 저택이었지만, 인기척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어딘가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나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살고 있는 것만은 분명했다. 린신이 서 있는 곳은 대저택의 후원인 듯 했다. 한쪽으로는 두어 겹의 담장만 자리하고 있는 반면, 다른 한쪽으로는 여러 채의 크고 작은 전각들이 늘어서 있는 모양새를 보면 알 수 있었다.


  후원에는 이제 막 꽃잎을 채우기 시작한 봉오리를 단 매화나무가 가득했다. 이 낯선 저택이 머물러 있는 계절은 매화를 피우기에는 아직 이른 모양이었다. 린신은 느릿느릿 매화나무 사이를 걸었다. 은은한 매화 향이 바람에 실려 와, 린신의 코끝을 스쳤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꽃을 피워낸 나무는 없었다. 린신은 매화 향을 쫓기 시작했다. 숲이 사라짐과 동시에 함께 걷혔던 안개가 조금씩 다시 피어 올랐다. 매화 향이 짙어질수록 안개 역시 짙어졌다. 마침내 향기의 진원지에 다다랐다고 생각했을 때에는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때,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와, 린신은 걸음을 멈추었다. 분명히 아는 목소리였지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그 목소리는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고 있는 듯했는데, 이전의 꿈에서처럼 그 말소리를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었음에도 어째서인지 린신은 그 '누군가'가 자신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목소리는 어느 한 방향이 아닌, 사방을 채운 안개 속 모든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흡……."



  갑작스레 지독한 슬픔이 린신을 덮쳤다. 린신은 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안개 속을 마구 내달렸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발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니 그는 어떤 문 앞에 서 있었다. 시야를 가리던 안개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알 수 없는 슬픔에서 기인한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들고 있었다.


  조금 전의 그 목소리가, 이번에는 문 너머에서 들려왔다. 여전히 자신을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린신은 주저 없이 문을 열었다. 여전히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눈물이 가득하여 가물거리는 풍경 속에 어떤 사람이 서 있었다. 등을 보이고 선 그 사람은 린신을 향해 무어라 이야기했다. 얼핏 겨울, 봄, 눈, 꽃 따위의 단어가 들렸지만, 대부분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저와 닮은 노인을 만났던 때에 그러했듯, 이번에도 본래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할 것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었다.



  "누구야? 나를 알아?"



  린신이 그를 향해 물었다. 잔뜩 젖은 목소리는 안쓰러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문득 지난 번, 어둠 속에서 들려오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때 들었던 청년과 소년의 목소리 중 청년의 것이 바로 이 사람의 목소리와 같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난 번에도 나에게 말을 걸었지?"



  한 번 더 묻자, 사내가 린신을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린신은 아주 익숙했음에도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던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인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마침내 사내는 린신과 얼굴을 마주하였다. 하지만 린신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안개가 낀 것도, 눈이 부실 정도의 빛이 비친 것도, 어둠이 내려앉은 것도 아니었는데, 어째서인지 보이지 않았다. 그의 얼굴 앞에만 불투명한 필름이 드리워져 있는 것 같았다.



  "당신, 대체 누구야?"



  린신이 한 번 더 물었다. 사내는 답이 없었다. 다만,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른 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그 미소를 보자, 린신의 입가에도 똑같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행복한 기분이 들었다. 조금 전까지는 끊임없이 눈물이 쏟아질 정도로 슬펐는데, 이제는 당장에라도 하늘을 날 수 있을 것처럼 행복했다.








***








  잠에서 깨어난 린신은 한동안 멍하니 제 방 천장만 쳐다보았다. 조금 전까지 꾸었던 꿈이 너무나 생생해서, 그 비현실적인 꿈 속의 풍경보다 현실의 풍경이 더 어색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하아……."



  한참 만에야 한숨과 함께 꿈에서 완전히 벗어난 린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제 얼굴을 더듬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얼굴 전체가 눈물 범벅이었다. 꿈에서 깨어나기 직전에 느꼈던 감정은 행복이건만, 깨어난 뒤에 남은 것은 또다시 지독한 슬픔뿐이었다.



  "흑……!"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잠깐이나마 느꼈던 행복과 대비되어, 슬픔이 더욱 깊게 느껴졌다. 린신은 모로 누운 채 연신 눈물을 닦아가며 울었다. 가슴 깊은 곳이 찢어질 듯 아팠다. 창 밖으로 조금씩 햇살이 비치기 시작할 즈음, 비로소 눈물이 멎었다. 그러나 슬픔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더 이상 흘릴 눈물이 남지 않은 탓이었다.


  기묘한 꿈은 처음 시작된 날부터 하루도 빼먹지 않고 매일 밤 린신을 찾아왔다. 여전히 이 꿈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지는 못했으나, 한 달 정도 거듭하여 꿈을 꾸다 보니 몇 가지 알게 된 것들이 있었다.


  우선, 이 꿈은 한 남자의 생애 중 일부를 보여주고 있었는데, 그 방식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 방식은 맨 처음 꾸었던 꿈처럼 투명인간이 된 듯 꿈의 한복판에 서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었다. 남자의 노년 시절은 항상 이러한 방식으로만 볼 수 있었다. 꿈에서 마주치는 사람들 중 누구도 린신을 보지 못했다. 간혹 꿈의 주인공인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그런 느낌을 받는 순간, 곧바로 잠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와 버렸다.


  두 번째 방식은 남자의 눈을 빌려 꿈을 관전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의 꿈을 꿀 때, 린신은 자신이 그 남자가 된 것 같다는 착각을 하곤 했다. 남자의 목소리가 린신의 것과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시야를 공유하고 있는 상태에서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저와 똑같은 목소리가 울리고 있으니, 그가 말을 할 때마다 자신이 스스로 이야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게다가 노인이 된 그의 얼굴로 미루어, 젊은 시절에는 더더욱 린신과 비슷한 외모를 갖고 있었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꿈 속에서 남자가 거울을 보는 일이 없었기에, 정말로 닮았는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남자의 젊은 시절은 늘 이런 식으로 보여졌다.


  꿈은 결코 시간 순으로 차근차근 진행되지 않았다. 꿈 속의 시간은 일정한 패턴도 없이, 말 그대로 무작위였다. 어떤 날은 노인이 된 남자를 보여주었고, 또 다른 날에는 젊은 시절의 이야기가 펼쳐졌다.


  남자의 청년 시절이 펼쳐지는 날에는 다른 등장인물이 있었다. 매번 등장하는 이는 비슷한 또래의 예쁘장하게 생긴 사내였고, 간혹 어린 아이 하나가 끼어드는 날도 있었다. 어여쁜 용모를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내―그가 미인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으나, 얼굴이 명확하게 보이지는 않았다―는 두 번째로 꾸었던 꿈에서 린신을 불렀던 이와 동일인물인 듯했는데, 그는 언제나 남자와 마주 앉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처음 꿈을 꾸었을 때에는 그 안에서 보고 듣는 글이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많은 것을 알아들을 수 있게 되어, 한 달이 지나자, 린신은 꿈 속의 모든 말과 글을 현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제는 어여쁜 사내와의 대화도 전부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잠에서 깨어나면 그 대화의 내용이 기억나지 않았다. 한담에서부터 국제 정세까지 주제가 아주 다양했다는 것과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모두 어떤 주제에 관해서든 지식이 상당하여 이야기가 막히는 법이 없었다는 것 정도만 간신히 떠올릴 수 있었다. 소년이 등장하는 날이면 남자는 어김없이 그 소년에게 장난을 쳤는데, 예쁘장한 사내는 그 장난에 동참하지는 않고 그저 관객처럼 지켜보며 즐겁다는 듯 웃기만 했다. 간혹 그 사내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거나, 그에게 탕약을 건네거나 하는 것으로 보아, 린신은 자신과 닮은 남자가 의원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예쁜 사내의 병세는 그다지 가볍지 않은 듯했다. 무슨 병을 앓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 병 때문에 몸이 상당히 약해진 모양이었다.


  반면, 노인이 나오는 꿈에는 이렇다 할 다른 등장인물이 없었다. 처음 꾸었던 꿈에서처럼 지나가는 사람이 보이기는 하였으나, 영화로 치면 행인1, 행인2 따위의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젊은 시절에는 이야기하기를 좋아하고, 소년과 어울려 이리저리 뛰어 다니는 것을 즐겼던 남자인데, 늙어서는 같은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정적이었다. 꿈 속에서 그는 늘 혼자였다. 홀로 사당에 앉아 향을 피우거나, 산마루에 올라 산 아래 풍경을 말없이 바라보고만 있다거나, 툇마루에 앉아 술잔을 기울인다거나 하는 것이 노인이 보여주는 장면의 전부였다.


  린신은 모든 꿈에서 어떤 이의 목소리를 들었다. 처음 꿈을 꾸었을 때 어둠 속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의 주인은 남자의 젊은 시절을 보여주는 꿈에서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던 사내였다. 노인이 나오는 꿈에서는 그 사내를 볼 수 없었으나, 그 목소리만은 메아리처럼 어딘가 먼 곳에서부터 아련하게 들려왔다. 몇 번을 거듭 들어보아도 아는 목소리였다. 그러니 분명 그 병약하고 어여쁜 사내도 아는 사람일 터였다. 그러나 사내의 얼굴은 단 한 번도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고, 그의 이름이 무엇인지 역시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사실, 꿈의 주인공이 몇 번이나 대화 중에 사내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 소리가 사내의 이름이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어찌 발음하는지는 도무지 들리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사내가 꿈의 주인공을 부르는 호칭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꿈에서 깨어나면 남는 것은 언제나 슬픔과 눈물이었다. 물론, 꿈을 꾸는 동안 느끼는 감정은 슬픔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남자의 젊은 시절을 보는 날은 행복을 느끼기도 했다. 다만, 그 행복은 잠에서 깨는 순간 원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흔적도 없이 지워졌다. 그 때문에 린신의 머리맡에는 항상 손수건이 놓여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는 것이 그의 새로운 습관이 된 것이다.


  사실상 하나의 꿈이 한 달이나 이어지자, 린신은 이 꿈에 무언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꿈이란 본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영상이 자는 동안 흘러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니 비록 전혀 기억나는 것은 없지만, 그 기이한 장면들 역시 원래부터 머릿속에 들어있던 것이리라. 그러한 가정을 하면, 생각해낼 수 있는 답은 많지 않았다. 예를 들면, 어릴 적에 어떠한 충격적인 사건을 겪었고,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을 무의식 속에 묻어버렸다든가 하는 것이었다. 린신은 아버지께 말씀 드리고 괜찮은 정신과 의사를 소개받을까 하다가 금세 머리를 흔들어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무의식 속에 묻어버릴 정도의 충격적인 기억이라면 굳이 끄집어내서 좋을 것이 없을 지도 몰랐다. 아침마다 눈물을 닦아내야 했지만, 일상 생활에 지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만큼이나 생생한 꿈을 꿀 정도면 깊게 잠들 수 없었을 텐데, 한 달간 매일 꿈을 꿨음에도 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아직은 아무 문제도 없으니까……. 반드시 치료가 필요한 순간이 오면, 그 때 말씀 드리자.'



  린신은 그렇게 다짐하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덧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었다.








***








  시험이 끝난 직후의 대학생들은 보통 먹고, 마시는 것으로 시험 공부를 하느라 쌓인 스트레스를 풀었다. 의대생들도 다르지 않았다. 의욕 넘치는 의과 대학 과 대표는 발 빠르게 안주가 맛있기로 유명한 가게를 예약해 둔 상태였다. 신입생 환영회에 비하면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이번에도 꽤 많은 학생들이 모였고, 시험이 쉬웠느니 어려웠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장내는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크으, 역시 매장소! 이번에도 주인공 티를 팍팍 내면서 등장하네!"



  술자리가 막 달아오를 무렵, 누군가 가게 입구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매장소가 이번에도 조금 늦게 도착한 것이었다.



  "주인공은 무슨……. 민망하니까 관둬."



  그는 멋쩍게 웃으며 장난스럽게 제 동기의 입을 틀어막았다. 수많은 이들이 매장소를 반기며 그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여전히 매장소는 이 집단 내에서 가장 사랑 받는 사람이었다. 그를 외면하는 것은 구석 자리에 앉아있던 린신과 그의 무리들뿐이었다.



  "아, 린신!"



  하지만 매장소는 그런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 린신을 향해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린신은 매장소 쪽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단번에 술잔을 비웠다. 그리고는 빈 잔을 다시 채워 입으로 가져가려는데, 누군가 손목을 붙잡아왔다.



  "뭐야?"



  린신의 손목을 잡은 이는 다름 아닌 매장소였다.



  "그렇게 마시다가 병 나. 좀 천천히 마셔."



  축 늘어진 두 눈썹으로 여덟 팔자를 그리면서 말하는 목소리에는 진심 가득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린신은 매몰차게 그 손길을 뿌리쳤다. 잔을 가득 채우고 있던 술이 조금 흘러 넘쳤다.



  "네가 참견할 일 아니잖아."



  차갑게 쏘아 붙인 뒤, 그는 다시 한 번 보란 듯이 단숨에 잔을 비웠다. 매장소는 그런 린신을 보며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중간고사 전에 교양 수업 과제도 한 번 더 있었고, 그만큼 얼굴을 마주하고 함께했던 시간이 꽤 되었기에 이 정도 걱정은 해도 되는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그것은 매장소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지가 알아서 하겠지. 신경 쓰지 말고 이쪽으로 앉아."

  "그래. 참견하지 말라잖아. 그냥 이리 와."



  다른 동기들이 매장소의 팔을 잡아 끌어 빈 자리에 앉히고 잔을 채워주었다. 그러나 매장소의 시선은 자꾸만 린신에게로 향했다.



  '벌이라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로 결심해놓고 또 쓸데 없는 욕심을 부렸구나.'



  기어이 입술 사이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그 한숨 때문에 당황스러운 것은 오히려 곁에 앉은 동기들이었다.



  "장소.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누군가 어깨를 붙잡으며 말을 걸어왔을 때에야 비로소 매장소의 시선이 린신에게서 떨어졌다.



  "저 놈이 너 싫어하는 거야 우리 과 애들이 다 아는데, 왜 매번 먼저 아는 척 하고, 가까이 하려 하는 거야?"



  목소리를 낮출 생각도 없이 던져진 그 질문은 시작에 불과했다. 주변에 있던 이들이 너나 할 것 없이 한 마디씩 덧붙이고 나선 것이다.



  "린신이 린 원장 아들이라서 그런 거라면, 넌 실력이 좋으니까 굳이 그럴 필요 없잖아."

  "그래, 네가 뭐가 모자라서?"

  "네가 정말 선의에서 그러는 거라고 해도 저쪽은 받아줄 마음이 요만큼도 없는 것 같은데."

  "맞아. 사람이 너무 착하기만 해서는 상처만 잔뜩 받는다고."

  "쟤한테 먼저 말 거는 거, 쟤랑 같이 다니는 애들 빼면 너밖에 없을걸."

  "근데 우리 과에 쟤랑 친해지고 싶은 사람이 있긴 하냐?"



  이 모든 이야기들은 린신의 귀로도 여과 없이 흘러 들어가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린신이 술잔을 채우고 비우는 속도가 조금 전보다도 훨씬 빨라져 있었다. 매장소는 난처한 표정을 전혀 숨기지 못했다. 린신의 입술 사이로 사라지는 술의 양이 늘어갈수록 매장소의 당혹감도 짙어졌다. 숨이 차올라 가슴이 답답했다.



  "그만들 해!"



  마침내 매장소가 목소리를 높이자 앞다투어 한 마디씩 던지던 이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그 목소리에 담긴 분노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린신은 여전히 말없이 술만 들이켜고 있을 뿐이었다.



  '린신에게는 잘못이 없어. 잘못한 건 나라고. 죄를 지은 건 나인데, 왜 다들 린신만…….'



  사랑하는 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미움 받는 꼴을 보고 있자니 가슴 안쪽이 아렸다. 그러나 지난 생에서의 죄라든가, 옛 인연이라든가 하는 것은 다른 이들은 물론이고 린신에게조차 이야기 할 수 없는 것이어서,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한들 린신을 변호할 방법은 없었다. 결국 매장소가 할 수 있는 일은, 린신과 마찬가지로, 쉬지 않고 술잔을 채우고, 다시 비워내는 것뿐이었다.


  시험이 끝난 직후의 술자리는 그다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해방감을 만끽하고자 술자리에 나왔다 해도 시험을 준비하는 동안 쌓인 피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었다. 안주와 술이 바닥났을 때, 그 누구도 자리를 옮겨 2차를 이어나가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사실, 상당수가 술병을 다 비우기 전에 귀가해 버려서, 자리를 완전히 파할 때까지 남아있던 이들은 처음의 반도 되지 않았다.


  린신과 매장소는 마지막까지 남아있다가 같은 버스에 올라탔다. 안 그래도 피로가 쌓인 몸에 술까지 잔뜩 들이부은 탓에 기력이 완전히 바닥난 매장소는 자리를 잡자마자 차창에 이마를 대고 눈을 감았다. 한창 술을 마시고 있을 때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버스에 몸을 싣자, 그제야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린신은 조금 떨어진 자리에서 그런 매장소를 쳐다보았다. 그는 분노에 찬 매장소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었다. 그만하라는 그 짧은 한 마디에 담긴 분노는 분명 진심이었다.



  '왜 네 녀석이 화를 내는데? 솔직히 틀린 말도 아니던데. 뭐가 아쉬워서 자꾸 친한 척을 하는 건지 나도 이해가 안 간다고.'



  곱씹을수록 매장소의 행동은 의문투성이였다. 처음 만난 날부터 지금까지, 매장소를 대하는 린신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노골적으로 싫은 기색을 드러냈고, 공적인―예를 들자면, 교양 과제 같은―일이 아닌 한, 대부분의 경우 매장소가 하는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린신을 대하는 매장소의 태도 역시 변함이 없었다. 그는 린신을 만날 때마다 반갑게 손을 흔들었고, 눈이라도 마주치면 예쁘게 웃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단지 성격이 착해서? 바보 같을 정도로 착한 놈이라서? 아니, 매장소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음흉하고 교활한 사람인가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으나, 감정적인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호의를 베푸는 멍청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



  생각에 잠겨 있던 린신은 목적지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버스 안내 방송을 듣고 정신을 차렸다. 매장소는 아직도 눈을 감은 채였다. 린신은 차마 그를 두고 내릴 수 없어, 머릿속 가득한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그가 앉은 자리로 다가갔다.



  "일어나. 내려야 돼."



  어깨를 잡고 몇 번 흔들자, 매장소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 사이, 버스는 정류장에 멈춰 섰고, 린신은 비몽사몽인 매장소의 팔을 붙잡아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대로 그를 잡아 끌어 함께 버스에서 내렸다. 여전히 졸음과 술에서 해방되지 못한 매장소의 몸이 자연스레 린신의 품으로 쏟아졌다.



  "야……!"



  린신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매장소의 양 어깨를 붙잡아 거세게 흔들었다. 술 때문에 발그레 달아오른 그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 몸 안쪽에서부터 열기가 피어 오른 탓이었다. 다행히 매장소는 이내 놀란 눈으로 린신에게서 떨어져나갔다.



  "미, 미안……."



  고개를 푹 숙인 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보니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린신은 그저 한숨만 내쉴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매장소는 민망한지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때문에 오히려 린신은 그를 다시 붙잡아야만 했다. 매장소가 곧 쓰러질 듯 위태롭게 휘청거리며 걸었기 때문이었다.



  "너나 나나 비슷하게 마신 것 같은데……. 술이 약하면 그렇게 마시지 말아야지!"



  린신은 어느새 매장소를 향해 잔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그치만, 속상해서……."



  매장소는 한숨 쉬듯 답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들어 린신과 눈을 맞추었다. 린신은 저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평소와 달리 잔뜩 풀린 눈을 한 매장소는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이렇게나 다정한데……. 매번 싫은 티를 잔뜩 내면서도 걱정해 줄 정도로 다정한데……. 왜 다들 자네의 심성을 몰라주지?"



  이게 이 놈의 주사일까. 린신은 발음은 살짝 꼬인 주제에 고상한 말투로 이야기하는 매장소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매장소는 린신의 이목구비를 유심히 살피더니 아이처럼 헤, 하고 웃었다. 동시에 린신의 심장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린신은 부디 매장소가 그 소리를 듣지 못했기를 바랐다.



  "잘 생겼다! 자네, 참 변함없이 잘 생겼어."



  오늘 밤, 하늘에는 아주 아주 작은 달이 떠 있었다. 순식간에 터질 듯 붉어진 린신의 얼굴은 밤의 어둠에 가려, 그 색이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쓸데 없는 소리 마. 난 너 싫어."



  린신이 그렇게 대꾸하자, 매장소의 얼굴에서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에 슬픔과 체념이 가득 들어찼다.



  "맞아, 그랬지……."



  매장소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취한 몸이 다시 한 번 크게 휘청거렸다. 린신은 재빨리 그의 어깨를 감싸 단단히 붙잡았다. 오피스텔까지 가는 동안 매장소는 린신에게 몸을 의지한 채 묵묵히 걸었다. 린신 역시 구태여 말을 걸지 않았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침묵만이 가득했다. B동 앞에 도달해서야 매장소는 다시 입을 열었다.



  "부축해줘서 고마워. 여기부터는 혼자 가도 돼."



  어느새 매장소의 말투는 평소와 같아져 있었다. 린신은 그가 어느 정도 술이 깬 것이라 판단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붙잡았던 어깨를 놓아주었다. 매장소는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잔뜩 힘을 주고 한 발, 한 발 걸어나갔다. 린신은 매장소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는 것을 확인한 뒤에야 걸음을 돌렸다.


   다음 날 아침, 전날의 옷차림 그대로 거실 한 가운데에서 눈을 뜬 매장소는 린신이 술 취한 자신을 부축하여 오피스텔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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