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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호가 필모른 배포전 <호우주의보> 우5 [호우시절] 부스에서 뵙겠습니다.







  린신은 뿌연 안개가 가득한 숲 한 가운데에 서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 높게 솟은 나무와 안개가 뒤엉킨 풍경은 마치 무협 영화의 배경처럼 신비한 느낌을 주었다. 린신은 그 낯선 숲을 구경하며 제 앞으로 쭉 뻗은 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크게 바람이 일더니 눈을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주변의 모습이 변하였다. 키 큰 나무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여러 채의 전각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다만, 신비로운 분위기만은 그대로였다. 이번에는 사람의 말소리도 들렸다.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시대극에서나 볼 수 있는 전통 복식을 입은 사람들 서넛이 모여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린신은 그들을 향해 다가갔다.



  "여기가 어딥니까?"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린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마치 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에게 아주 바싹 다가갔는데도 그들이 나누는 대화의 내용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말하고 있는가 하면, 그런 것도 아니었다. 린신은 그것이 자신이 평소 쓰던 중국어와 같은 언어임을 확실하게 인지할 수 있었다. 발음도 매우 명확했다. 그러니 알아들을 수 있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 갑자기 좌뇌에 이상이 생겨, 귀로 들어온 말소리를 이해할 수 없게 된 것 같았다. 만약 그들의 대화가 소리가 아닌 글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린신은 난독증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다만, 대화를 나누는 이들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한 것을 보니, 밝은 내용의 대화가 아니라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은 때때로 어딘가를 힐끔거리며 쳐다보았는데, 그 시선 끝에는 자그마한 사당이 자리하고 있었다.


  린신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사당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긴 은발을 늘어뜨린 사내가 제단 앞에 앉아있었다. 제단 위에는 두 개의 위패가 놓여 있었다. 사당은 이미 향내와 연기로 가득했으나, 사내는 또다시 화로에 향을 한 가득 쏟아 넣었다. 린신은 그의 얼굴이 아닌 뒷모습만 보고 있을 뿐이었으나, 그것만으로도 지독한 슬픔이 전해졌다.



  '대체 누구를 추모하는 것이기에…….'



  다시 한 번, 호기심이 린신의 발을 움직였다. 그는 제단 가까이로 다가갔다. 낯선 사람이 제단 주변을 얼쩡거리는데도 향을 피우는 사내가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린신을 보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린신은 완전히 마음을 놓고 위패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바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대화를 알아듣지 못했던 것처럼, 이번에는 위패에 새겨진 글을 읽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사라진 옛 글자라든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아주 어렵고 복잡하며 잘 쓰이지도 않는 글자여서가 아니었다. 분명 자주 쓰이는 글자들이었고, 누구나 보고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쉬운 글자들이었다. 이번에는 말 그대로 난독증 증상이었다.



  '머리를 다친 기억은 없는데, 왜 이러지?'



  린신은 답답함을 느끼며 몸을 돌려 사내 쪽을 쳐다보았다. 비로소 그의 얼굴을 보게 된 린신은 놀라서 저도 모르게 헉 소리를 냈다. 은발의 사내는, 그 머리칼의 색만큼 나이 든 얼굴이기는 했지만 이목구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린신과 똑같았던 것이다. 사내의 시선은 린신을 살짝 빗겨 지나가, 두 개의 위패에 닿아 있었다. 아주 쓸쓸하고 슬픈 눈이었다. 너무나도 닮은 얼굴이기 때문일까. 가슴이 안쪽부터 찌릿하게 저려와서, 린신은 제 옷깃 부근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그 순간, 사내의 눈동자가 천천히 움직이더니 정확하게 린신과 시선을 맞춰왔다. 린신은 그가 저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라, 몸을 돌처럼 굳혔다. 곧이어 사내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슬픔이 그대로 린신을 덮쳐왔다. 마치 거대한 감정의 파도에 잡아 먹히는 것 같았다. 사내가 린신을 향해 무어라 말을 했지만 이번에도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저 그가 목소리마저 저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뿐이었다.


  강한 빛이 사내와 린신의 주변을 감쌌다. 린신은 눈을 질끈 감았다. 빛이 차단되고 시야에는 온통 어둠만이 가득했다. 그 어둠 속에서 어떤 청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전까지 시선을 맞추고 있던 그 사내의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번에도 린신은 그 목소리에서 익숙함을 느꼈다. 분명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고 있는데, 누구인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야?"



  린신은 그 목소리를 향해 물었다. 그에 답을 하는 것인지, 그저 제 마음대로 떠들고 있는 것뿐인지 알 수 없었지만 목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졌다. 중간중간 웃음 소리가 섞이는 듯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앳된 소년의 목소리도 섞여 들었다. 소년의 목소리 역시 청년의 것과 마찬가지로 익숙한 느낌이 들었으나, 그 정도는 조금 덜했다.



  "대체 누구야? 나를 알아?"



  몇 번을 물어도 얻을 수 있는 결과는 매한가지였다. 그래도 린신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몇 번이나 거듭하여 질문을 쏟아내었다. 이제는 눈을 떠도 어둠밖에 보이지 않았다. 물에 잠기듯 의식이 점점 아득해졌다.








***








  "헉……!"



  린신은 크게 숨을 내뱉으며 잠에서 깨어났다. 몸이 물을 잔뜩 머금은 스펀지마냥 무거워, 바로 일어나 앉을 수가 없었다. 누운 채 고개만 돌려 벽에 걸린 시계를 확인하니, 이제 겨우 새벽 다섯 시를 조금 넘었을 뿐이었다. 린신의 입에서 한숨이 새었다.



  '왜 그런 꿈을…….'



  으레 꿈이란 깨어나고 나면 잊어버리는 것이 대부분이고 기억하는 것은 극히 일부분이지만, 조금 전까지 꾸었던 기이한 꿈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마치 직접 겪은 일인 양 사소한 것 하나까지도 매우 생생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생생하게 남은 것은 은발의 사내와 눈을 마주쳤을 때 느낀 감정이었다. 아무리 닮았다 한들, 그 사내는 적어도 천 년 이상은 더 옛날 사람처럼 보였고, 나이도 린신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니 분명 그는 내가 아닌데, 어째서 그의 슬픔이 내 것인 것처럼 느껴지냔 말이야.'



  아직도 저릿저릿한 가슴은 좀처럼 편안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일찍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린신은 두 손으로 제 얼굴을 문질렀다. 그리고,



  "어……?"



  그는 그제야 자신이 자는 동안 눈물을 흘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얼굴 곳곳을 더듬어 보니, 흘린 눈물의 양이 꽤 되었는지 귓바퀴까지 젖은 채였다.



  "이거……, 뭐야? 이게 대체……."



  대체 그 꿈 속의 사내는 누구지? 왜 나와 그렇게나 닮은 거지? 그 곳은 또 어디고? 위패는 누구의 것이지? 그 목소리들은 뭐지? 그리고 이 감정은……. 어째서 이토록 슬픈 거지? 어째서 눈물까지 흘린 거지? 수많은 물음들이 한꺼번에 떠올랐다. 꿈은 무의식의 발현이니 결국 그 질문들의 답은 제 안에 있을 텐데, 그 답이 무엇인지는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대체 뭐냐고……!"



  답답한 마음에 괜스레 소리를 질러 보았지만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창 밖으로 아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








  평소에도 제 옆에 앉아 수업을 듣는 린신을 틈틈이 쳐다보던 매장소였지만, 오늘은 그 빈도가 평소보다 훨씬 더 잦았다. 린신의 상태가 영 좋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업 내내 넋이 나간 표정으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그저 수업에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으나, 그의 손은 펜을 쥐고 있기만 할 뿐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오히려 수업에 조금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수업이 모두 끝난 뒤에도 린신은 책을 덮은 채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린신."



  매장소가 다가가 불러 보아도 반응이 전혀 없었다.



  "린신!"



  어깨를 잡고 흔들며 한 번 더 부르자, 린신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매장소를 쳐다보았다. 뒤늦게나마 매장소가 제 어깨를 붙잡고 있는 것을 눈치채고 매몰차게 뿌리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매장소는 상처받은 표정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 있어? 오늘 내내 얼 빠진 사람처럼……."

  "네가 무슨 상관인데?"



  말을 끊고 쏘아붙이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차가웠다. 린신으로서는 매장소가 자기 일에 참견하려 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매장소는 아주 잠깐, 얼굴 위로 당혹감을 드러냈다가 급히 갈무리했다. 린신은 그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당혹감을 삼킨 매장소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미안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하마터면 그 가련한 얼굴에 넘어갈 뻔한 것이다. 얼굴이 아무리 예쁘다 한들, 여전히 매장소에게는 숙이고 싶지 않았다.



  "과제 때문에 그러는 거지? 잊지 않았으니까 걱정 마."



  린신은 급히 가방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곱 시에 중앙 도서관 스터디룸 104호로 와!"



  매장소는 강의실을 빠져나가려는 린신의 등을 향해 황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린신은 별다른 답을 하지 않고 강의실을 나가버렸다.


  물론, 답을 하지 않았다 해서 매장소의 말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었다. 린신은 제시간에 104호 스터디룸에 도착했다. 스터디룸에는 최대 여섯 명이 둘러 앉을 수 있는 테이블과 의자가 비치되어 있었다. 테이블 안쪽 가장자리에 설치된 컴퓨터 모니터는 스터디룸을 사용하는 학생들의 랩탑과 연결할 수 있도록 어댑터가 달려 있었다. 매장소는 일찍부터 와서 필요한 책들을 몇 권 골라 갖다 놓고, 모니터와 자신의 노트북을 연결한 채 린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청 열심이네. 그래 봤자 교양인데."



  린신은 괜스레 툴툴거리며 매장소의 맞은 편에 앉았다.



  "중요도로 따지자면 전공이 훨씬 중요하지만, 교양 수업도 수업이라는 건 마찬가지잖아. 대충 할 수야 없지. 교수님께도 실례되는 일이고."



  함께 귀가했던 때처럼, 매장소는 그저 시비를 거는 것을 뿐인 질문에 웃는 얼굴로 샌님 같은 답변을 늘어놓았다. 린신은 입술을 삐죽이며 매장소가 갖다 놓은 책 한 권을 집어 들고 목차에서 과제 수행에 필요한 내용이 수록된 페이지를 찾았다. 첫 번째 과제는 남북조 시대에 관련된 것이었다. 주 교수는 수업에서 남북조 시대에 일어났던 사건들 몇 가지를 소개하고, 그 중 한 가지를 골라 자세히 조사해 오라는 과제를 냈다. 사료가 부족한 사건이라면 나름의 합리적인 근거와 함께 비어 있는 부분을 추측해 보아도 좋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준비 많이 한 모양인데, 어떤 사건이 마음에 들어?"



  린신의 물음에 답을 하기에 앞서, 매장소는 시선을 내리깔고 쌓아 놓은 책을 잠시간 가만히 바라보았다.



  "대량의 적염군 사건."



  이어서 답하는 목소리가 매우 묵직했다. 린신은 매장소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일렁이는 것을 본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특별한 이유라도?"

  "우선, 이 시기의 역사를 이끄는 건 대량과 대유, 두 나라야. 여러 나라가 경합을 벌이던 시기여서 지금 기준에서 보면 전부 다 작은 나라들이지만, 개중 이 두 나라가 가장 크거든. 그런 대량의 충성스런 정예군 7만명이 반역을 꾀했다는 오명 하에 죽었어. 보통 사건이 아니지. 적염군은 대유와 맞닿아 있는 북방의 국경을 지키던 부대이기도 하니까, 이번 과제의 주제로 잡기에 가장 적당할 것 같다고 생각했어."



  매장소의 답은 꽤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린신은 매장소가 이 사건을 선택한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물론, 구태여 그걸 캐묻고 싶지는 않았다.



  "좋아. 주제는 적염군 사건으로 하자."



  린신이 별다른 이견을 제시하지 않고 동의하자, 매장소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내 의견을 받아들여 줬으니까, 어디에 초점을 맞출 지는 네가 정해. 적염군 사건 자체만 다룰 수도 있을 거고, 보다 크게 잡는다면 당시 황제였던 소선의 제위 기간 동안 대량의 정치 흐름을 주제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적염군은 소선의 즉위부터 실각까지 전부 영향을 끼쳤으니까."



  매장소가 모니터에 연표를 띄우며 말했다. 엑셀로 작성된 그 연표는 어딘가에서 내려 받은 자료가 아니라 매장소가 직접 작성한 것임에 틀림 없었다. 린신은 전공 퀴즈 전날, 도서관에서 역사서를 잔뜩 쌓아놓고 있던 매장소의 모습이 떠올렸다. 이 연표는 그 때 봤던 책에 적힌 내용들을 모아 작성한 것이리라. 그 날과 퀴즈 결과를 생각하면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매장소의 꼼꼼함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염군 사건 하나만으론 주제가 협소해지는 것 같아. 그 시기를 전반적으로 훑는 게 좋겠는데."



  그렇게 첫 번째 과제의 주제는 '소선의 제위 기간 중 대량의 정치 흐름'으로 결정되었다. 매장소는 린신이 생각보다 적극적으로 임해주는 것에 기뻐했다. 린신은 한결같이 매장소에게 호감이라고는 눈곱만치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므로 스터디룸에서 매장소와 단 둘이 적어도 두세 시간은 마주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을 반길 리 없었다. 그래서 매장소는 린신이 대충 시간만 때우고 말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연표를 미리 만들어 둔 것도, 만에 하나 린신이 소극적인 태도로 나올 경우, 혼자서라도 과제를 완성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린신은 자신이 수 시간 동안 매장소와 단 둘이 마주 앉아 과제를 해 나갈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막상 시작하고 보니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원래 린신은 다른 이들과 협동하여 활동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는데, 거의 모든 경우에 그와 다른 팀원들 사이의 수준 차이가 큰 탓이었다. 팀원들의 수준에 맞추면 그 결과물은 린신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린신이 원하는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결국 거의 모든 것을 그 혼자 해야만 했다. 그렇다 보니 린신에게 있어 이러한 활동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피곤하기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달랐다. 개인적인 감정이야 어떻든 간에, 린신의 길지 않은 인생에서 매장소는 그와 또래이면서 비슷한 수준의 우수함을 갖춘 첫 번째 사람이었고, 아직까지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던 것이다.


  린신이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음에도 리포트 작성을 주도하는 것은 매장소였다. 당시 대량에 대한 매장소의 지식은 자료에서 얻은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의 기억이었으니, 옛 기억이 없는 린신보다 앞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심지어 매장소는 현대까지 전해지지 못한 역사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예를 들자면, 목예황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했다.



  "이건 좀 의외네."



  린신이 책의 어느 한 부분을 손으로 짚으며 말했다. 그가 보고 있던 것은 야사를 다루고 있는 책이었다. 매장소는 린신의 손끝이 가리키는 문장을 눈으로 훑었다.



  [당시 임부의 세자, 임수는 운남목부의 군주와 정혼한 상태였으나, 이 사건으로 임수가 사망하면서 자연히 파혼되었다.]



  빙속단을 먹고 전장으로 나섰을 때, 슬픈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목예황이 떠올라, 표정 관리가 잘 되지 않았다. 다행히 린신은 여전히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정혼했으면 사실상 한 가족이나 다름 없는데, 대역죄인은 그 가족까지 전부 몰살 아닌가?"



  매장소는 쌓아 놓은 책들 중 하나를 가져다가 일부러 요란스럽게 책장을 넘겼다.



  "목부는 남초와의 국경에서 철기군을 이끌고 있었잖아. 적염군이야 직접 반역을 꾀했다는 혐의를 받고 있었으니 처단할 수밖에 없었겠지만, 임부와 정혼했다는 이유만으로 목부와 철기군까지 치면 국경 수비가 너무 힘들어지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매장소의 이야기에 린신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매장소는 소선이 그러한 부분을 고려해 보기도 전에 운남왕부를 제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10만 철기군의 운남왕부를 향한 충심을 두려워하여 목예황에게 새 혼처를 구해주고 경성에 묶어 두려 하지 않았던가. 그것이 뜻대로 되지 않자, 목예황이 운남으로 돌아갈 때, 그녀의 동생을 인질 삼아 금릉에 남겨두게 했던 이가 소선이었다. 그가 운남왕부를 처단하지 않은 것은 태황태후의 간청이 큰 역할을 했다. 그런 뒤에야 그는 남쪽 국경과 철기군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하지만 이러한 사정은 정사는 물론 야사로도 전해지고 있지 않아, 섣불리 아는 척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 운남목부의 군주, 대단한 여자였네. 거의 20년 가까이 군을 이끌었던 것 같은데."



  린신이 책장을 넘기며 한가로운 어투로 덧붙였다. 매장소의 입가에 쓴 맛 나는 미소가 떠올랐다.



  "적염군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운남에서 남초와 전투가 벌어졌어. 그 전투에서 운남왕이 전사했고, 예황은 상복을 입은 채로 군을 호령하며 승리를 얻어냈지. 대단하다는 말로는 모자라."



  매장소의 목소리에서 그리움이 배어났다. 린신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목부 군주 이름이 예황이야? 여긴 이름은 안 나오는데……. 상복 입고 전투에 나섰다는 얘기도 없고. 그 얘긴 어디서 봤어?"



  린신이 물었다. 매장소는 그제야 자신이 기록으로 남지 않은 기억 속의 역사를 말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이건 일종의 설화 같은 거라서……. 이런 얘기를 모아 놓은 책도 있더라고. 그건 역사라고 보기 애매해서 가져오진 않았어. 그러니까 내 말은,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대단하다는 말로도 모자란다는 얘기야."



  매장소는 최대한 태연함을 지어내며 이야기했지만, 린신은 한동안 의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운남 군주 이야기를 할 때, 묘하게 달라졌던 분위기와 이후 해명이랍시고 한 이야기에서 묻어나는 다급함을 놓치지 않은 것이었다. 매장소는 그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며 자료를 뒤적거렸다.



  "야사든, 설화든……. 엄청 많이 알고 있네? 사학과 학생이라고 해도 믿겠어."



  린신이 빈정거리며 말했다. 매장소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냈다.



  "그저께 도서관에서 내내 역사서만 봤잖아. 그 때 이것저것 별로 쓸데 없는 내용까지 다 읽었거든."



  일부러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매장소의 답은 린신의 주의를 돌리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했다. 린신이 전날 교양 공부나 하고 있던 매장소와 전공책만 펼쳐놓고 있던 자신이 똑같이 퀴즈에서 만점을 받았던 것을 다시 기억해낸 것이다. 매장소는 린신이 불쾌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보고 자신이 또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음을 깨달았다.



  "아무튼, 목부가 한때 임부와 혼담이 오갔던 사이이긴 해도 우리 주제랑은 크게 상관이 없으니까, 리포트에도 굳이 넣을 필요 없을 것 같아."



  일부러 과제 수행에만 집중하도록 유도해보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린신의 얼굴은 좀처럼 풀어질 줄을 몰랐다.


  폐관 시간이 다 되어서야 리포트를 완성한 두 사람은 또 다시 나란히 도서관을 나섰다. 귀가길이 겹치기 때문에 좋든 싫든 계속 함께일 수밖에 없었다. 이틀 전과 같은 시간이었는데도 오늘은 버스에 빈 자리가 거의 없었다. 유일하게 비어 있는 자리는 두 사람이 앉을 수 있는 조금 긴 의자뿐이었다. 린신은 곧장 그 의자로 다가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매장소는 자신이 그 옆자리에 앉아도 되는지 알 수가 없어, 손잡이를 잡고 서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괜찮으니까 앉아."



  그런 심정을 꿰뚫어보기라도 한 듯, 린신이 먼저 손짓했다. 매장소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린신의 옆에 앉았다. 현생에서 재회한 이후, 이만큼이나 가까이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교양 수업에서도 나란히 붙어 앉기는 하지만, 어깨가 닿을 정도는 아니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이 느껴져, 매장소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자는 척 눈을 감았다. 린신에게 상기된 얼굴을 들킬까 봐서였다. 그러고 있자니 정말로 졸음이 쏟아졌다. 전날 밤, 잠을 설친 탓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매장소는 고개를 위, 아래로 흔들며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후……."



  앞 좌석 등받이에 이마를 부딪칠 뻔했는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매장소를 보고, 린신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잡아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도록 했다. 다정한 천성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자고 있으니까 좀 더 어려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잠든 매장소의 얼굴을 바라보던 린신의 양 볼이 붉게 물들었다. 이내 그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얼굴이 아무리 예뻐도 이 자식이 내 자리를 빼앗았다는 건 변함 없잖아!'



  몇 번이나 자기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 보았지만, 매장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머릿속이 온통 분홍빛으로 물드는 기분이 들었다. 린신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리고 지나치는 가로등의 개수 따위를 헤아리는 데에 집중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자꾸만 차창에 비친 매장소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었다. 결국 아예 눈을 감아버리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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