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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호가 필모른 배포전 <호우주의보> 우5 [호우시절] 부스에서 뵙겠습니다.







  "어젯밤 술을 들이붓더니 머리가 깨지겠지?"



  어여쁜 사내가 린신을 향해―정확히는 린신과 똑같이 생긴 남자를 향해―그렇게 말하며 찻잔을 건네주었다. 린신은 만족스레 웃으며 그 잔을 받아들었다. 바깥은 외출 준비로 분주했고, 사내는 예복 차림이었다. 필시 어딘가 중요한 자리에 참석하려는 것이리라.



  "또 어디 가려고?"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가볍게 물으며 친우에게 건네 받은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오늘이 국구의 생신이야. 초대장까지 보내왔는데 얼굴은 비쳐야지."



  남자는 그리 말하는 친우를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린신은 남자의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마치 그와 한 몸이 된 듯하여 그의 감각과 감정을 전부 자신의 것처럼 느낄 수 있었기에, 그가 걱정스런 표정을 짓고 있다는 것 역시 알 수 있었다.



  "국구의 생신이면 태자도 오겠군?"



  이 말을 할 때의 남자는 무언가 다소 불쾌한 듯했다. 예쁘게 생긴 친우는 시선을 떨구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같이 가세. 예진 그 친구가 나름 재미가 있더라고."



  불쾌한 감정을 억누르며 그렇게 말했을 때, 갑자기 차가운 물이 온 몸을 덮쳤다.



  "훗."



  의기양양한 소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남자는 얼 빠진 얼굴로 친우를 쳐다보았다. 친우의 시선은 빈 대야를 들고 서 있는 소년에게로 향했다.



  "비류. 어젯밤 우리가 물놀이를 하긴 했지만 벌써 하루가 지났다. 오늘은 어제가 아니고, 놀이는 끝났단 말이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충분히 화를 내도 될 만한 상황이었음에도 남자는 차분히 설명하며 아이를 타일렀다. 마주 앉은 친우의 얼굴에는 조금씩 웃음꽃이 피어나고 있었다.



  "게다가 소 형과 이야기 나누는 거 알면서 몰래 뒤에서 공격하는 건 도리에도 맞지 않고 무효야."



  아이에게 하는 말 속에 마주 앉은 사내의 이름 중 한 글자가 있었다. 비록 단 한 글자뿐이었지만, 그나마도 명확하게 들려온 것은 처음이었다.



  "알겠느냐?"



  남자는 아이를 향해 다정하게 물었다. '소 형'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아이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몰라! 어쨌든 진 거야!"



  소년은 대야에 조금 남은 물까지 완전히 털어낸 뒤, 가벼운 발걸음으로 방을 나섰다. 남자는 낮은 한숨과 함께 찬 물이 섞여 버린 찻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하지만 찻잔이 입술에 닿기 직전, 기침 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거기서 움직임을 멈추어야 했다. 그 기침 소리가 앞에 앉은 병약한 사내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눈이 마주쳤을 때, 사내는 진심으로 즐거이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 얼굴이…….'



  사내가 웃음을 터뜨리던 그 순간, 린신의 눈에 드디어 그의 얼굴이 보였다. 말간 얼굴에 밝게 피어난 웃음꽃은 과연 본 적이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잠들기 한 시간여 전에 보았던 얼굴이었다.



  ''소' 형이라더니, 그럼 그게 매장소의 '소'라고……?'



  잔뜩 젖은 꼴이 꽤나 우스워 보였던 모양인지, 매장소―정확히는 매장소와 똑같이 생긴 사내―는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 린신은 멍하니 그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 웃는 얼굴을 바라보는 남자의 마음에는 행복이 들어찼으나, 린신은 그와 함께 행복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다행인지 아닌지, 점차 시야가 어두워지며 웃음소리가 사그라져가며 그와 동시에 언제나처럼 슬픔이 밀려들었다.








***








  "망할!!"



  린신은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욕지거리부터 했다. 항상 그렇듯 얼굴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가슴이 찢어질 듯한 슬픔도 언제나와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꿈이 남긴 잔상일 뿐, 이 순간, 린신이 실제로 느끼고 있는 감정은 불쾌함이었다. 느긋하게 굴어도 괜찮은 주말 아침이었지만, 그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이제껏 기묘한 꿈이라고만 생각했지, 기분 나쁜 꿈이라고는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그래서 꿈의 흔적이라 할 수 있는 눈물자국을 한 시라도 빨리 씻어내고 싶었다.



  "그 놈 얼굴이 그렇게나 마음에 드냐?"



  몇 번이나 거듭해서 얼굴을 씻어낸 뒤, 린신은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며 빈정댔다. 거울 속 얼굴은 꼭 꿈 속의 그 남자처럼 잔뜩 젖어 있었다. 그 꼴을 보며 웃어대던 예쁜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그 놈 얼굴 내 취향이다! 그건 인정한다고! 그래도 싫은 건 싫은 거야!!"



  잔뜩 화가 난 목소리로 소리쳤으나, 거울 속에서 함께 화를 내고 있는 자신은 어쩐지 비웃음을 감추고 있는 듯했다.



  "내가 그 놈 때문에 행복하기도 하고, 슬퍼서 울기도 한다고? 대체 왜? 이래서는 마치……."



  내가 그 놈에게 연애 감정이라도 느끼는 것 같잖아. 린신은 차마 그 말만은 입에 담지 못했다. 그의 꿈은 아버지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매장소는 그 꿈을 시작부터 짓밟은 이였다. 그런 사람을 좋아한다니, 상상만으로도 자존심이 작살나는 기분이었다.



  "대체 매장소가 뭐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고, 린신은 그대로 욕실 바닥에 주저앉았다. 대체 그가 뭐라고 자신을 이렇게 비참하게 만드는 것일까. 하나부터 열까지, 아니, 백이나 천까지도 좋아할 수 없는 이였다.



  "정말 싫다고, 너……."



  린신의 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번에는 슬퍼서가 아니라 분해서 흘리는 눈물이었다.


  그 날 이후 린신은 젊은 남자의 시선에서 꿈을 꿀 때마다 매장소의 얼굴을 보았다. 좀처럼 알아들을 수 없었던 이름들도 명확하게 들려왔다. 매장소의 얼굴을 한 그 사내의 이름도 '매장소'였다. 사내가 꿈의 주인공을 '린신'이라고 부르는 것도 똑똑히 들렸다. 젊은 '린신'이든 나이 든 '린신'이든, 그 '린신'이 주인공인 이 꿈의 배경에는 언제나 유적지에서나 볼 수 있는 옛 전각들이 수도 없이 세워져 있었고, 꿈 속에 등장하는 이들의 옷차림 역시 옛 것 그대로였다. 그러니 얼굴과 이름이 같다 한들 꿈 속의 두 사람은 현실의 그들과 동일인일 리 없었다. 무엇보다, 꿈 속의 그들은 현실에서의 그들과는 달리 매우 친밀한 사이인 듯했다. 그들 중 그 누구도 서로를 미워하지 않았다.


  노인이 된 '린신'을 바라보는 꿈에서도 드디어 위패에 적힌 이름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 개의 위패에는 각각 '강좌매랑 매장소', '소년무사 비류'라고 적혀 있었다. '매장소'의 것이 아닌 다른 쪽은 젊은 '린신'과 자주 어울리던 그 소년인 듯했다. 꿈 속 세상에 린 노인은 있으나 매 노인은 없는 이유가 그것이었다. 백발에 가까운 은발을 길에 늘어뜨린 린 노인이 하루하루 슬픔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것은 결국 친우의 부재 때문이었다. 그리고 린신은 꿈을 꿀 적마다 그 슬픔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 꿈은 더 기묘한 것이었다. 꿈 속 인물들의 얼굴과 이름이 현실에 존재한다는 것은 결국 이 꿈이 무의식이 만들어낸 잔상이며, 꿈이 만들어낸 감정 역시 린신의 무의식 속에 잠들어 있던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것은 다시 말해, 린신은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는 사이 매장소를 좋아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매장소가 먼저 죽더라도 그를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이별을 슬퍼하며 살아갈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린신은 매장소가 싫었다. 얼굴이 제 취향이라는 것 외에는 무엇 하나 마음에 드는 점이 없었다. 그렇게나 싫은 사람을 사실은 남몰래 좋아하고 있다니, 인정할 수 없었다. 애초에 매장소를 좋아한다는 것부터가 틀렸다. 그것은 결코 사실이 아니었다.



  '이번 학기가 끝나면 정말로 상담이라도 받아 봐야겠어.'



  린신은 자신의 무의식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매장소로 인한 스트레스가 너무 컸던 것이라고.








***








  린신의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현실에서 매장소를 볼 때마다 꿈 속의 매장소가 겹쳐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수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의 매장소는, 안경을 쓰고 있다는 점만 다를 뿐, 꿈 속의 매장소가 진중한 이야기를 할 때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계절은 겨울을 향해 달려가는 중이었고, 바람은 나날이 차가워졌다. 찬 바람에 어깨를 움츠리는 매장소는 꿈 속의 그 병약한 서생의 모습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린신을 바라볼 때의 잔잔한 미소 역시 꿈 속에서 자주 보던 미소와 완벽하게 같았다.



  "장소, 이것 좀 봐!"



  점심을 먹고 오후 수업을 기다리며 과방에서 잠시 쉬는 중에, 동기 하나가 매장소를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는 손에 들고 있던 스마트폰 화면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린신의 눈에는 그 화면이 보이지 않았으나, 언뜻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들어보니 무슨 동영상인 듯했다. 동영상을 들여다보던 매장소의 입술이 씰룩거렸다. 이내 그는 손등으로 제 입을 가리고 기침을 한 번 토해내더니 어깨를 들썩이며 아이처럼 폭소했다. 린신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내가 뭐랬냐? 이거면 장소도 웃을 거라고 했지?"



  스마트폰의 주인은 의기양양하게 제 친구들에게 물었다. 매장소는 입가에 즐거운 웃음을 가득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뭐야? 나 갖고 무슨 내기라도 한 거야?"

  "넌 좀처럼 크게 웃는 법이 없으니까, 다들 한 번쯤은 제대로 크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고 해서 말야."



  작당을 한 이들은 모두 흡족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매장소는 그들을 돌아보더니 한 번 더 고개를 저었다. 다시금 매장소를 포함한 모든 이들이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린신은 여전히 매장소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꿈 속에서 물에 젖은 친우를 보며 웃음을 터뜨렸던 그 매장소가 그대로 현실에 나와 있는 것 같아서였다. 그간 꿈에서 느꼈던 행복, 그리움, 슬픔 등의 감정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 때, 매장소의 시선이 린신에게로 향했다.



  "린신……?"



  매장소는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린신의 이름을 불렀다. 너무나 작은 목소리여서 그것을 귀로 들은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린신역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들은 것은 아니었으나, 천천히 달싹이는 매장소의 입술이 분명히 제 이름을 그리는 것을 보았다. 매장소의 낯빛이 걱정으로 물들기 시작했을 때에야 린신은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매장소 외의 그 누구도 린신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기에, 그 눈물을 본 것은 매장소 뿐이었다. 그것이 불행인지 다행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린신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과방을 나섰다. 매장소는 차마 그를 끝까지 따라가지 못하고 몇 걸음 뒤쫓다가 멈춰 섰다.


  이후로도 린신은 때때로 현실의 매장소에게서 꿈 속의 매장소를 보고, 꿈 속의 감정을 다시 느꼈다. 그러면 어김없이 눈물이 차올랐고, 다른 이들이 그 꼴을 보고 눈물의 이유를 묻기 전에 재빨리 닦아내고 아무렇지 않은 척 하는 것은 꽤 피곤한 일이었다. 때문에 린신은 더 철저히 매장소를 멀리했고, 두 사람 사이는 훨씬 서먹해졌다. 이전에는 매장소가 아는 척을 하고, 린신이 이를 무시하는 정도였다면, 이제는 린신이 아주 노골적으로 매장소를 피했다. 매장소는 린신의 변화를 중간고사 직후의 술자리에서 드러난 동기들의 태도에 원인이 있다고 판단했다. 그의 생각에, 이제까지처럼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미소를 지어 보이는 것은 린신을 괴롭게만 할 뿐이었다. 그래서 매장소는 린신에게 다가가는 것을 잠시 멈추기로 했다.








***








  꿈에서 매장소의 얼굴을 보기 시작한 지 보름 즈음 지난 주말 아침, 린신은 꿈 때문에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내기도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발신인은 그의 아버지였다.



  "네, 아버지."



  막 잠에서 깬 터라 목소리가 잔뜩 잠겨 있었다. 린신은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 "신아, 바쁜 일 없으면 오늘 병원에 좀 다녀가거라."

  "병원이요?"



  린신이 다니고 있는,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다녔던 대학의 부속 병원은 꽤 규모가 커서, 이 지역에만 두 개의 지점이 있었다. 본원은 의대 학생들의 실습 수업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해서 학교와 가까운 곳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린 원장이 말하는 병원이란, 바로 이 본원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냥 집으로 갈게요. 하실 말씀 있으시면 퇴근하고 오셔서 하세요."



  본원에는 린신을 어린 시절부터 봐온 의사들이 잔뜩 있었다. 그들은 린신이 내는 성과에 관심이 많았다. 지금의 린신으로서는 당분간 만나고 싶지 않은 이들이었다. 린신이 그들을 떠올리며 소리 죽여 한숨을 내쉬었을 때, 수화기 너머에서도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신아. 네 할아버지께서 또 입원하셨다."



  린 원장의 목소리에는 조금도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 린신의 조부이자 린 원장의 부친인 그 노인은 최근 몇 년 사이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고 있었다. 평생 의사로서 병원 일에 헌신하며 스스로를 혹사시킨 탓인지 그는 은퇴한 뒤로 줄곧 질병에 시달렸고, 어느새 몸 속에 멀쩡한 장기는 하나도 남지 않았다. 크든 작든 모든 기관에 고장이 발생한 것이다.



 - "이번에는 퇴원하지 못하실 것 같구나. 이제 얼마 남지 않았어."



  린신은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사사건건 아버지와 저를 비교하던 조부를, 그는 결코 좋아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동시에 보란 듯 조부에게 자신이 아버지보다 더 우수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그는 린신이 과거의 아버지와 벌이는 경쟁의 심판관이었다.



  "바로 갈게요."

 - "그래. 할아버지를 뵙고 나면 원장실로 오너라. 점심이나 같이 하자꾸나."



  전화를 끊은 린신은 손에 닿는 대로 아무거나 집어 들어 방 한쪽 구석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조금 전까지는 린신의 머리를 받쳐주었던 베개가 벽과 바닥의 경계에 처박히며 먼지가 일었다.


  조부가 있는 곳은 병원의 최상층에 꾸며진 VIP 병동이었다. 린신은 마치 고급 호텔 복도 같은 병동 복도를 지나, 가장 안쪽에 위치한 병실 문을 열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응접실이었다. VIP 병동을 이용할 정도의 돈 많은 환자들은 대부분 병석에서도 마음 놓고 쉴 수 없는 기업의 수장이나 정치인들이었고, 응접실은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었다. 린신은 이미 은퇴한 노의사에게 이런 병실은 과분하다는 생각을 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린 원장은 세계적으로 찬사를 받는 뛰어난 써전이었지만, 그의 아버지는 욕심만 많은 그저 그런 시골 의사였다. 아들을 훌륭히 키워낸 것은 별볼일 없는 시골 의사의 현명한 아내였으니, 이 과분한 병실에 눕게 되는 데에 시골 의사 스스로가 기여한 것은 거의 없는 셈이었다. 린신은 벽 대신 세워놓은 파티션 뒤로 돌아 들어갔다. 혼자 사용하기에는 다소 커 보이는 병원용 침대와 그 위에 누운 노인이 보였다.



  "신이 왔구나."



  이번에는 퇴원하기 힘들 것 같다는 말이 무색하게, 그는 다소 마르기는 하였으나 그럭저럭 괜찮은 낯빛을 하고 있었다.



  "좀 괜찮으세요?"



  린신은 무표정한 얼굴로 상투적인 물음을 던졌다. 노인은 손자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였다. 린신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이 할애비가 네 성공을 보고 가야 할 터인데……."



  조부는 린신의 손을 꼭 잡았다. 손아귀 힘이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느낀 뒤에야 린신은 그에게 가까이 다가온 죽음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잘 하고 있고, 앞으로도 잘 할 거니까."



  이 역시 죽음을 앞둔 노인에게 그 자손들이 으레 하는 말이었으나, 말을 하는 동안 린신의 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 정말 잘 하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앞으로도 잘 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어지는 조부의 반응은 린신을 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잘 하긴, 이 놈아. 네 아버지는 대학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수석을 놓치지 않았어!"



  참으로 지독한 노인이었다. 죽음이 길어야 몇 개월 앞으로 다가와 있는 순간에도 그는 손자를 닦달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린신은 저를 붙잡고 있는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조부를 바라보는 손자의 눈빛은 서릿발보다도 차가웠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노인은, 그 때까지도 자신 때문에 어린 손자가 겪어왔던 괴로움을 한 톨도 이해할 마음이 없는 듯, 쯧쯧 혀를 찰 뿐이었다.



  "버르장머리 없는 녀석! 그리 행동하면 네 아비가 자식 교육 제대로 못 했다고 욕을 먹을 게다. 네 아비 이름에 먹칠을 할 생각이더냐?"



  린신은 뿌득, 이를 갈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긋지긋했다. 이 노인이 언제 한 번 하나뿐인 손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 적이 있었던가. 단 한 번이라도 잘했다 칭찬해 준 적은 있었던가. 수고했다 격려해 준 적은 있었던가. 과연 이 노인에게 제 핏줄에 대한 애정이 있기는 한 것인가.



  "그만 가보겠습니다."



  차갑게 내뱉은 한 마디를 마지막으로 린신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저, 저 몹쓸 놈 같으니라고!!"



  노인이 역정을 내는 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죽을 날 받아놓은 이의 목소리가 맞나 싶었다.



  "할아버지의 훌륭한 아들과 점심 약속이 있어서요."



  린신은 잠시 멈춰 서서 조부에게 자신의 한쪽 눈이 보일 정도로만 살짝 고개를 돌렸다. 경멸과 원망을 담은 눈빛을 봐 주었으면 해서였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이 부디 고통스럽지 않길 기도하겠습니다. 그게 제가 할아버지께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효도니까요."



  조부는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린신은 그런 그를 내버려둔 채 병실을 나섰다.


  왔던 길 그대로 호텔 복도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고급스럽게 꾸며진 복도를 지나 한 층 아래로 내려가면 원장실, 부원장실, 이사장실 등의 사무 공간이 줄지어 자리하고 있었다.



  "신이 왔구나!"



  린신이 원장실 앞에 다다르자, 린 원장의 비서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그녀는 이십 대 중반부터 거의 십 년간 이 병원에서 일했고, 그만큼 린신과도 꽤 친밀한 사이였다.



  "오랜만이에요, 누나."



  린신도 그녀만큼이나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누나 안 보고 싶었니? 지난 여름까진 수험생이라 공부하느라 바빠서 여기 와볼 시간 없었다 쳐도, 대학 입학한 지가 언젠데 이제야 오다니! 학교가 어디 멀리 있는 것도 아니고 바로 옆인데!"



  일부러 과장하여 타박하는 그녀에게, 린신 역시 연극 배우처럼 과장된 몸짓으로 손을 모으고 허리를 깊이 숙였다.



  "미인을 기다리게 하다니, 이 린신이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점심 먹고 들어오는 길에 커피 한 잔 사다 바칠 테니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그렇게 한 마디씩 주고받은 뒤, 그들은 서로 마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원장님이랑 점심 약속 있나 보네. 들어가 봐."

  "네. 아, 누나, 커피는 아메리카노? 라떼?"



  린 원장의 비서는 손을 뻗어 이제는 키가 껑충하게 자라버린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누나 다이어트 중이야. 그러니까 아메리카노 시럽 빼고."



  린신은 그녀를 향해 손가락으로 OK 사인을 그려 보이고는 돌아서서 원장실 문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밝게 웃고 떠들던 얼굴은 돌아서는 순간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리고 위층 VIP 병실에 누워 있던 노인의 몸이 린신의 얼굴처럼 차갑게 식어버린 것은 그 날로부터 고작 닷새 후였다. 산 자의 온기는 조금도 남지 않은 아버지를 앞에 두고, 린 원장은 소리 죽여 흐느꼈다. 말없이 눈물을 흘리는 것은 린신도 마찬가지였으나, 린 원장처럼 슬퍼서 흘리는 것은 아니었다. 린신의 눈물에는 분노와 억울함이 담겨 있었다.



  '최소한 올 해는 넘겼어야지. 내가 당신 아들만큼이나 우수하다는 건 알고 가야 할 것 아냐. 어쩌면 내가 당신 아들을 뛰어넘을 지도 모른다는 걸, 내게 그만한 가능성이 있다는 걸 당신 두 눈으로 확인해야 하잖아. 두어 달이면 되는데, 왜 겨우 그것도 버티지 못하고 지금 가 버리는 건데? 조금만 더 버티면 되는데, 왜…….'



  아주 어릴 적부터 한결같이 미워했던 사람이지만, 린신은 다른 누구보다 그가 자신을 인정해주길 바랐다. 그가 자신을 칭찬하고, 그의 아들에게 했던 것처럼 추켜세워주고, 손바닥이 닳도록 박수를 쳐 주었으면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제 손자가 제 아들만 못하다는 결론을 내린 채 가 버렸다.



  '나는 결코 아버지보다 모자라지 않아. 지금의 나는 옛날의 아버지보다 조금 뒤쳐져 있을 지 몰라도, 미래의 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당신은 그 때의 내 모습을 봐야 했어. 그리고 지금의 판단을 후회하고 내게 사죄를 해야 했어. 그래야만 했다고!!'



  제 분에 못 이겨 온 몸을 부들부들 떨던 린신은 중심을 잃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쏟아내었다. 모두가 그 울부짖음이 깊은 슬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은 그것이 분개하여 내지르는 비명이었음을 알아챈 이는 아무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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