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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10

매장소, 그리고 강좌맹






  기왕 소경우의 사후, 대량의 조정에서는 헌왕 소경선과 예왕 소경환이 다음 천자 자리를 두고 경쟁을 시작한 참이었다. 매장소는 이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소경우와 적염군을 제거하는 데에 가담했던 이들이 둘로 나뉘어 각각 두 황자 뒤에 선 까닭이었다. 심지어 두 황자들만으로도 충분히 문제가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천자가 가진 무소불위의 권력을 손에 넣고자 할뿐, 그 누구도 진정한 군주의 재목은 못 되었다. 그래서 매장소는 적염군 사건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헌왕과 예왕의 세력을 무너뜨리고, 정왕 소경염을 태자 자리에 앉힌다는 계획을 세웠다. 여러 황자들 중 오직 소경염만이 소경우가 지니고 있던 올곧은 마음을 그대로 물려받은 이였고, 그렇기에 훌륭한 후계자와 7만의 충신을 잃은 대량의 유일한 대안이 될 수 있었다.

  계획을 구체화하는 데에 있어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어떻게 금릉으로 돌아갈 것인가, 즉, 금릉 대귀족가의 세자 임수가 아닌 평민 매장소가 어떻게 하면 조정의 권력 다툼에 뛰어들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매장소는 강호를 택했다. 강호에서 세력을 키워, 랑야방에 이름을 올리고, 그 명성을 이용하여 권력 다툼에 바쁜 헌왕과 예왕이 자신을 탐내도록 만들 생각이었다. 우선, 그는 적염군 생존자들을 하나 둘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였다. 랑야각이 그 방대한 정보력으로 생존자의 행방을 알아내면 위쟁이나 려강, 견평이 찾아가 소원수의 의지를 전달하고 함께할 것을 제안하는 식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단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매장소의 계획에 합류하였다. 그렇게 전부 모으고 보니, 위쟁의 예상처럼 군대를 조직하기에는 턱없이 모자라는 인원이었으나 강호의 작은 방파 하나 정도의 규모는 되었다. 매장소는 이들을 이끌고 강좌 지역으로 향했다.

  강좌 지역의 중심 세력은 랑주에 자리 잡은 강좌맹이라는 꽤 큰 방파였는데, 규모만 클 뿐 강호의 다른 지역에서는 거의 언급되지 않을 정도로 별 볼 일 없는 방파였다. 강좌맹에 비하면 적염군 생존자의 수는 매우 적었으나, 매장소가 단지 병사의 머릿수나 무공의 수준 같은 단편적인 군사력에만 기대었다면 무패의 소년장수는 탄생할 수 없었을 터였다. 그는 뛰어난 전략가였고, 그가 세운 작전은 적우영이 거의 피해를 입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는 강호에서도 그대로 통했다. 매장소의 수하들은 간단히 기존의 강좌맹을 제압했고, 그들의 우두머리인 매장소는 새로운 강좌맹주가 되었다.


  “아득한 세상의 빙설 같은 모습.”


  린신은 새해를 맞아 새로이 발표된 랑야방을 들고 그 안에 적힌 문장 하나를 읽고는 다음 문장을 바로 이어서 읽지 않고 잠시 뜸을 들이며 제 앞에 앉은 사내의 반응을 살폈다. 그러나 그 사내, 매장소는 그것이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듯 제 할 일에만 열중했다.


  “그윽한 향기.”


  린신은 매장소에게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 다음 문장을 읽었다. 매장소는 못 들은 척 보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다.


  “아련한 음악소리.”


  린신과 매장소 사의 거리가 조금 더 좁혀졌다. 매장소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슬슬 린신이 성가시게 여겨지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다시 서류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강가’에 울리네.”


  린신은 부러 ‘강가’를 강조하여 읽었다. 어느새 두 사람의 거리는 코끝이 닿을락 말락 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린신.”


  결국 매장소는 눈을 치켜뜨며 짜증 섞인 목소리를 냈다. 린신은 만족스러운 미소와 함께 조금 뒤로 물러났다.


  “천하에 펼쳐진 영웅의 길을 모두 아노라니,”
  “린신, 그만.”
  “강좌의 매랑에게 고개를 숙이네.”


  린신이 꿋꿋하게 마지막 문장까지 읽어 내려가자, 매장소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 문장들은 지난 해 초, 초룡방주 속경천이 매장소를 만난 뒤 읊은 시였다. 초룡방은 북방의 거대 방파로, 강호에서 초룡방과 속경천의 이름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속경천과 만났을 때, 매장소는 강좌맹주가 된 지 한 해가 조금 못 된 상태였다. 당시 속경천은 공손가의 사람들을 쫓다가 강좌 지역에 발을 들였는데, 매장소는 친히 강가에 나가 그를 맞이하였다. 본래 강좌맹이 강호인들에게 만만하게 여겨지던 방파인데다가 매장소는 맹주 자리에 앉은 지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고, 심지어 무공을 전혀 하지 못하는 백면서생이었으니 천성이 거친 속경천은 강좌맹과 매장소를 무시하고 제멋대로 행동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좌맹은 강호의 정파로서 자신들의 영역에서는 살생을 금하고 있었고, 강호에서는 본래 강호에 속한 자가 아니더라도 강호의 규칙을 따르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초룡방 역시 강호의 정파였으므로, 매장소가 강호의 규칙을 이야기하며 저지하고 나서자, 속경천은 못마땅하게 생각하면서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 다음, 두 방파의 수장은 무기도, 따르는 이도 없이 단 둘이서만 하령 꼭대기에 올라 이틀간 밀담을 나누었다. 당사자인 두 사람이 그 이틀 동안의 일을 함구하였으므로 밀담의 내용은 랑야각조차 알지 못하였으나, 중요한 것은 산에서 내려온 직후 그 사나운 북방의 거인이 공손가의 사람들을 추적하는 것을 포기하고 북방으로 돌아간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매장소를 칭송하는 시를 남기기까지 했다는 점이었다.

  랑야방의 고수, 방파, 부호, 공자, 미인의 다섯 가지 부문 중 매장소가 노리는 것은 방파방과 공자방이었다. 내공을 기를 수 없는 몸이 되었으니 고수방은 불가능했고, 미인방은 여인들의 것이었으며, 매장소와 그의 수하들은 천생 무인이어서 부호방에 오를 정도로 큰 재물을 축적하는 방법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방파방에서 높은 순위를 차지하려면 다른 방파와 겨루어 강함을 증명해야 하는데, 원래대로라면 이제까지 한 번도 강호인들의 입길에 오르내린 적 없었던 강좌맹은 오합지졸들부터 차례로 상대하면서 이름을 알려야 겨우겨우 랑야방에 이름을 올린 방파들과 겨룰 기회를 얻을 수 있을 터였다. 또한, 아무런 배경도 없는 평민 매장소의 이름을 공자방에 올리려면 다른 모든 조건을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임이 온 천하에 알려져야만 했다. 속경천과의 일은 그 이전까지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던 방파, 강좌맹과 강좌맹의 새로운 수장에 대한 온 강호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그 덕에 매장소의 계획에 가속도가 붙었다. 강좌맹은 급격히 오른 인지도를 활용하여 강한 방파들과 바로 맞붙을 수 있게 되었고, 그 때마다 매장소는 빛나는 지략을 발휘하며 손쉽게 자신을 증명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네가 강좌맹을 차지한 것이 지지난 해 여름 즈음이었으니, 이제 겨우 한 해 하고도 절반 정도 지났을 뿐인데, 벌써 방파방과 공자방 모두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이 되었어. 이는 보통 일이 아닐세. 내 자네의 비범함을 일찍부터 알고 있었으나, 이 정도일 줄은 미처 몰랐네!”


  매장소의 계획이 순탄대로를 달리는 것에 린신이 더 신이 났다. 이대로 한 단계, 한 단계 진행되다 보면 언젠가 매장소는 금릉으로 향할 테고, 그곳이 그의 마지막이 될 터였으나, 린신은 어차피 길지 않은 명줄, 슬프지만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루고 떠날 수 있기를 바랐기에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매장소는 오히려 입술을 삐죽이며 고개를 저었다.


  “자네 계획대로 척척 진행되고 있는데, 무엇이 불만인가?”


  린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방파방이든 공자방이든 으뜸이 아니라면 큰 의미가 없네. 랑야방 맨 꼭대기에 이름을 올리는 것만으로는 충분치도 않고.”


  그 말에 린신은 헛웃음을 지었다. 랑야각 소각주를 앞에 두고 랑야방만으로는 충분치 않다는 소리나 하고 있다니. 그 말을 한 사람이 매장소가 아니었다면 진작 역정을 냈을 것이다.


  “그럼 뭐가 더 필요한가? 내가 도울 수 있는 것이 있는가?”


  그러나 린신은 매장소에게 한없이 약했다. 임수였을 적에도, 매장소가 된 뒤에도 그는 여전히 린신이 연모하는 유일한 사람인 까닭이었다.


  “랑야방 각 분야의 1위는 분명 강호에서든 경성에서든 주목을 받게 되나, 그렇다고 하여 천자가 되기 위해 경쟁하는 황자들이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는 않네. 헌왕과 예왕……, 특히 예왕을 계획에 끌어들이기 위해서는 랑야방만으로는 부족해. 강좌맹은 방파방 으뜸을 넘어,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확고한 강호의 패자가 되어야 하고, 매장소는 뛰어난 책략으로 강좌맹을 승리자로 만든 기린재자로서 모두의 존경을 받는 강호의 주인이어야만 하네. 속 방주가 지은 그 낯부끄러운 시가 현실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헌왕과 예왕마저도 내게 고개를 숙이며 도움을 청해올 정도가 되어야 의도를 의심받지 않고 자연스럽게 금릉의 정치판에 뛰어들 수 있어.”


  매장소가 차분하게 자신이 바라는 바를 설명하자, 린신은 그 철두철미함에 감탄하느라 자신이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하였다. 매장소는 그런 린신을 한심하다는 듯이 쳐다보다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렸다. 린신은 매장소 앞에 드러누워 그의 일하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매장소의 처소에는 종이 넘기는 소리 말고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헌데, 자네 대체 랑주에 얼마나 더 머물 생각인가? 랑야각이 그리 한가한 줄은 몰랐네만.”


  이 각 정도가 지나, 그 시선을 견디다 못한 매장소가 비꼬듯 쏘아붙이자 린신은 반은 홀가분하고 반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이제 슬슬 가 보아야지. 안 그래도 명일 새벽에는 떠나려 했네. 어느새 해가 지고 있으니, 객방으로 돌아가 미리 채비를 해 두어야겠군.”


  린신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결심했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무리하지 말게. 려강에게 자네가 석반을 다 들고 나면 탕약을 들이라 일러둘 터이니 그걸 마시고 바로 침수에 드시게나.”


  매장소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린신은 다시 아주 잠깐 머뭇거린 것을 끝으로 아쉬움을 갈무리하고 걸음을 돌렸다. 때마침 위쟁이 새로운 보고서를 가지고 들어오다가 린신과 마주쳐 그를 향해 공수를 하였다. 매장소는 전혀 모르고 있었으나, 랑주에 머물다가 랑야각으로 돌아갈 때 즈음, 매장소를 등지고 돌아서는 린신의 낯은 언제나 우울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저리도 헤어지는 것이 싫을까. 속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아도 될 터인데.’


  위쟁은 그런 린신을 볼 때마다 늘 같은 생각을 했다. 린신은 위쟁의 어깨를 두어 번 무심하게 툭툭 두드리며 지나쳐갔다. 상전이 먼저 지나가고 난 뒤, 위쟁의 발걸음은 다시 매장소에게로 향했다.


  “소원ㅅ……, 아니, 맹주.”


  매장소에게 인사를 올리고 가져온 보고서를 건네면서, 위쟁은 잘못 부른 호칭을 황급히 바꾸었다. 더는 임수라는 이름으로 불릴 수 없어 새 이름을 만들었는데, 호칭은 임수가 쓰던 것을 그대로 쓴다면 새 이름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침 강좌맹을 차지하면서 적당한 호칭이 생겨, 매장소는 제 수하들에게 자신을 소원수가 아닌 맹주로 부르라고 명했다. 대부분은 주군의 새로운 이름과 호칭에 적응하였으나, 위쟁은 유독 그러지 못하고 있었다. 매장소는 이에 대하여 그저 한 번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을 뿐 그 이상의 지적은 하지 않았다. 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저를 모셨던 위쟁이었기에 매장소에게 익숙해지는 데에 어려움을 겪는 것을 이해하는 까닭이었다.


  “강 너머의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는 않겠군.”


  위쟁이 가져온 것은 강좌 바깥, 강 너머 지역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는 몇 건의 살인 사건에 관해 조사한 자료였다. 피해자들의 몸에 남은 상처는 마치 본을 떠서 옮겨놓은 듯 일정하였고, 그들 모두 한때 같은 방파에 몸담았던 이들이라는 점에서 이는 결국 한 가지 사건으로 보는 것이 옳을 터였다. 그들이 속했던 방파가 이름난 방파는 아니었으나, 어쨌든 평생 강호에서 내공을 길러온 이들이 저항의 흔적 하나 없이 살해당하였으니 가볍게 보아 넘길만한 것도 아니었다. 아주 전문적으로 교육을 받은 살수가 틀림없으리라. 게다가 사건이 거듭될수록 그 발생 지점이 점차 강좌와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살수의 타겟들이 강좌 방향으로 도망을 치고 있는 듯했다.


  “이 속도라면 수일 내로 건너편 강변에 닿겠어. 이들에게는 지체할 여유가 없을 테니 곧바로 강을 건너올 테지. 강가에 좀 더 많은 형제들을 보내두게. 살수에게 당하기 전에 신변을 확보해야 하네.”
  “예, 맹주.”


  위쟁은 호칭에 각별히 유의하며 답하였다. 매장소는 서류들을 차곡차곡 쌓아 한편으로 치우고 기지개를 켜더니 등받이에 허리를 편안히 기대었다. 일을 마쳤다는 의미였다. 늘어지게 하품까지 하는 주군을 보며 위쟁이 미소를 지었다.


  “헌데, 맹주. 정녕 이대로 괜찮으십니까?”


  위쟁의 물음에 매장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소각주 말입니다.”


  매장소의 미간이 좁아졌다.


  “혹 아무 말씀도 듣지 못하셨습니까? 소각주께서 명일 새벽에 랑야산으로 돌아가신답니다. 맹주께선 소각주를 곁에 두고 싶어 하시지 않습니까.”


  위쟁이 말을 듣는 동안, 매장소의 낯빛은 조금도 변치 않았으나 서안 뒤로 숨긴 손은 쉴 새 없이 꼼지락꼼지락 움직이며 당황스러운 감정을 그대로 드러냈다. 위쟁은 그 분주한 손을 보지 않고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두 해 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확실히 인지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매장소는 아주 잠시간 눈을 감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다시 내쉬었다. 그리고는 화로 위에서 끓고 있는 탕관으로 시선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


  위쟁이 이러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매장소는 항상 이런 방식으로 대화를 끊어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위쟁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이 한숨이 새어나왔다.


  “너무 스스로를 몰아붙이는 것은 아니신지요. 갈 길이 멉니다. 때때로 마음이 쉬어갈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매장소는 위쟁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침상으로 향했다.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뜻을 분명히 하는 행동이었다.


  “그럼, 물러가 보겠습니다.”


  위쟁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순순히 인사를 올렸다. 아무리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해도, 그는 주군이 원치 않는 이야기를 고집스럽게 이어나갈 수 없는 이였다.

  위쟁이 하려던 이야기는 다름이 아니라 린신을 향한 매장소의 마음에 관한 것이었다. 린신과 매장소가 함께 저를 찾아 약왕곡에 왔던 그 날, 위쟁은 매장소가 린신에게 연심을 품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정작 당사자인 매장소는 이것이 첫 정인 탓에, 린신과 닿을 때마다 가슴이 뛰고,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연정 때문임을 깨닫는 데에 꽤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제 마음을 인지한 이후, 매장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위장하는 법을 익히는 것이었다. 연정은 삶을 낭비하는 것이라 여기는 탓이었다. 임수일 적이었다면 제 감정을 적극적으로 드러내며 누구보다도 뜨거운 사랑을 했을 터였으나, 지금은 사정이 너무나 많이 달랐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연약한 몸뚱이였다. 대업을 완수하는 데에 모든 시간을 쏟아 부어도 모자랄지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서 매장소는 더 이상 린신과 닿아도 얼굴을 붉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위쟁은 매장소의 조급함을 잘 알지 못하였고, 그저 자신의 주군이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종종 ‘쓸데없는 소리’를 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게 본전도 못 찾을 소리는 왜 자꾸 하나?”


  매장소의 처소를 나서자마자 불쑥 나타난 린신 때문에 위쟁은 하마터면 빽 비명을 지를 뻔했다.


  “엿들으신 겝니까?”


  위쟁의 목소리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린신 역시 매장소에게 연정을 품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하루가 멀다 하고 랑야산과 랑주 사이를 오가고, 랑주에 있는 동안은 매장소의 처소에서 나올 줄을 몰랐으며, 언제나 매장소만을 바라보고 있었으니 어찌 모를 수 있으랴. 하지만 린신의 상황도 매장소와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장소가 나를 연모한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그러니 저 치가 자네를 상대도 안 해주는 것이 아닌가.”


  저를 향한 매장소의 마음을 정말로 모르는 것인지, 알고도 모른 척 하는 것인지, 린신은 종종 매장소가 자신을 연모할 리 없다는 말을 하곤 했다. 이러한 꼴을 보고 있자니 미칠 듯이 답답해져, 위쟁은 제 가슴을 쳤다.


  “괜한 소리로 장소를 곤란하게 하지 말게. 임수에 관해서는 자네가 나보다 더 잘 알지 몰라도 매장소는 내가 가장 잘 알아. 자네 입장에서는 임수를 위해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결코 장소를 위하는 일이 아닐세.”


  린신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하고는 발걸음을 돌려 제가 묵고 있는 객방으로 향했다. 임수가 곧 매장소이거늘, 임수의 바람과 매장소의 바람이 다를 것은 또 무엇인가. 위쟁은 강좌맹 본원 경내를 걸으며 한참이나 생각했지만 끝내 답을 알아내지 못했다.




***




  “순풍이다! 돛을 펴!”


  이른 새벽, 강 한 가운데에 떠 있는 작은 배 위, 한 사내가 일행들을 향해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듬직한 체격의 사내는 배의 후미에 서서 주변을 넓게 살피며 일행들을 이끌고 있었다. 배의 가운데 즈음에 앉은 작고 깡마른 소년은 불안한 눈빛을 감추지 못했다. 소년의 바로 옆에는 날카로운 눈빛의 무사가 서 있었고, 다른 두 사내는 돛을 매어 놓은 끈을 푸는 중이었다. 곧 돛이 활짝 펼쳐지며 배가 빠르게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는 강을 가로질러 가고 있었고, 목적지는 당연히 반대편 강가였다.


  “제아무리 녀석들이 대단한 살수라 해도 경공만으로는 이 넓은 강을 건너지 못해. 저쪽에 있는 배라는 배는 전부 부숴놓았으니 이틈에 최대한 멀리 가서 몸을 숨겨야만 한다.”


  사내는 지나온 쪽을 돌아보며 말했다. 강물 위에 내려앉은 옅은 물안개만이 사내의 시야를 가득 채울 뿐, 추적자의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이 돕는 것인지 순풍도 멈추지 않아, 사내와 일행들은 예상했던 것보다 일찍 배에서 내릴 수 있었다.


  “혹 소호당 분들이십니까?”


  다섯 명의 일행이 모두 배에서 내렸을 때, 누군가 그들에게 말을 걸어왔다.


  “누구냐! 우리를 어찌 아느냐!”


  소년을 제외한 네 명의 사내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저희들에게 말을 걸어온 이들을 향해 겨누었다.


  “그리 경계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는 강좌맹의 견평이라 합니다. 맹주의 명을 받고 여러분을 모시러 왔습니다.”


  강좌맹이라는 말에 검을 든 사내들의 경계가 느슨해졌다. 하지만 가장 크게 반응을 보인 것은 그들의 보호를 받는 소년이었다.


  “강좌맹주라면 그 매장소를 말하는 것입니까? 그분께서 우리를 모셔오라 하셨다고요?”


  견평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공손히 손을 모으며 허리를 숙였다.


  “소호당 소당주이시지요? 맹주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견평에게서 조금도 위협적인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데도 소호당의 무사들은 소당주와 견평 사이를 단단히 막아섰다.


  “맹주께서 우리가 오늘 이곳에 올 것을 어찌 아시고?”


  배 후미에서 다른 무사들을 향해 지시를 내렸던 사내가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며 물었다. 하지만 견평의 눈빛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우리 강좌맹은 우리의 세력권 내에서는 원칙적으로 살생을 금하고 있습니다. 소호당이 무너진 이후부터 지금까지, 여러분은 줄곧 살수에게 쫓기고 있지 않으셨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쫓고 있는 살수도 곧 강좌에 당도한다는 뜻이겠지요. 살생을 불허한다는 규칙을 따르려면 살수가 제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여러분을 보다 확실히 보호하는 것이 맹주의 뜻입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동료의 죽음을 너무나 많이 보아온 터라, 무사들은 다른 이를 쉬이 신뢰하기 어려웠다. 이번에도 앞으로 나선 것은 소호당의 소당주라는 소년이었다.


  “맹주께로 안내해 주시죠.”


  견평의 뒤에 서 있던 맹원들이 반으로 갈라져, 각각 오른쪽, 왼쪽으로 한 발씩 물러섰다. 한 무리의 사람들 사이로 난 짧은 길 끝에는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견평이 먼저 마차를 향해 걷기 시작했고, 소호당 소당주가 그 뒤를 따랐다. 소당주를 지키고 있는 무사들도 자연히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두가 강좌맹 본원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랐다.


  소호당 소당주인 기현과 매장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무공을 쌓을 수 없을 정도로 병약하여 무인이 되지 못하고 서생에 머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다. 매장소의 경우에는 화한독에 중독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리 된 것이었으나,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이들은 랑야각주 부자와 강좌맹원 중 적염군 출신으로서 매장소를 지근거리에서 보필하는 일부의 인원뿐이었다. 조금의 인연도 없는 이들은 매장소가 날 때부터 백면서생이었으리라 생각했다. 기현도 매장소에 대해 그리 알고 있었다. 그는 저와 비슷한 꼴로 태어났음에도 랑야방에 오를 정도로 강한 방파의 수장이 된 매장소를 동경했다. 그가 소당주로 불리는 이유는 오로지 그의 부친이 소호당의 당주이기 때문이지, 그 스스로 얻어낸 것은 아니었기에, 모든 것을 자신의 힘으로 이뤄낸 매장소를 우러러 볼 수밖에 없었다. 이에 더하여 랑야각으로부터 기현이 아직은 철이 없는 편이라는 사소한 정보까지 전해 받은 매장소는 견평에게 ‘매장소’라는 이름으로 기현의 관심을 끌면 자연히 모든 이들이 따를 것이라고 조언했다. 정말로 모든 것은 매장소의 계획대로 흘러갔다. 물론, 이것은 강좌맹과 매장소의 위상을 보다 드높이기 위한 계획의 시작 단계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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