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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09

알 수 없는 떨림






  의식을 잃은 매장소는 또다시 기묘한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거의 매일 밤 마주하는 꿈이었다. 그는 임수일 적의 모습을 한 채 홀로 어둠 속에 서 있었고, 어둠이 걷히고 빛이 드리워지면 신비로운 사내가 나타났다. 여전히 사내의 얼굴은 명확하게 보이지 않았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 수도 없이 꾼 꿈이지만, 꿈에서 깨어나는 순간 자기 자신 외의 다른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기묘한 느낌 이상으로는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꿈의 내용 역시 매번 제자리를 맴돌 뿐이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좀처럼 귀에 닿지 않는 사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꿈 역시 끝을 맺으며 기억도 함께 사라졌다.


  “……그리 말씀하셔도 저는 믿지 못하겠습니다.”


  꿈이 사라진 자리를 현실의 소리가 채우기 시작했다.


  “랑야각주인 내가 랑야각의 이름을 걸고 말하는데도 정녕 믿지 못하겠는가? 우리 랑야각의 신뢰도가 그 정도인지 내 미처 몰랐네!”


  익숙한 두 목소리가 언쟁을 벌이는 것을 들으며, 매장소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는 푹신한 보료 위에 누운 채였고, 린신은 그의 머리맡에 팔짱을 끼고 앉아, 맞은편에 앉은 이를 노려보고 있었다.


  “장소! 정확히 맞춰 일어났군!”


  반쯤 눈을 뜬 매장소를 발견한 린신의 목소리에는 진심 가득한 반가움이 실려 있었다.


  “자네 부관이 도통 내 말을 믿지를 않네. 랑야각의 이름을 걸고 이야기한 것인데도……! 화한독에 대해서는 벌써 세 번이나 설명했다고! 자네가 알아듣게 말 좀 해 주게나.”


  린신이 매장소를 일으켜 앉히며 애원조로 말했다. 정신을 혼미하게 했던 향은 선선한 바람에 실려 날아갔으나 아직 경미한 두통은 남아있던 터라, 귓가에서 곧바로 울리는 린신의 목소리가 마냥 반갑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시끄러워, 린신.”


  그런 까닭에 다소 날이 선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린신은 고분고분 입을 다물었다. 매장소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으며 린신과 언쟁을 벌이던 사내를 쳐다보았다. 역시, 그는 위쟁이 맞았다. 매장소의 얼굴 위로 숨길 수 없는 기쁨과 안도감, 그리고 반가움이 떠올랐다. 그러나 위쟁은 자칫 잘못 건드리면 파스스 부서져 버릴 듯 유약한 서생을 잔뜩 긴장한 낯으로 응시할 뿐이었다.


  “위쟁.”


  매장소는 나지막이 그의 이름을 불렀다. 퍽 다정한 말투였음에도 위쟁의 낯에 어린 경계심은 더욱 짙어졌다. 그의 뒤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앉아 있는, 아마도 약왕곡에서 위쟁이 부리고 있는 이들로 보이는 두 사내 역시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었다. 신선한 공기가 들어올 수 있도록 활짝 열어 놓은 커다란 창문 사이로 펼쳐진 산골짜기의 한가로운 풍경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결국 매장소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린신이 이야기한대로 나는 매령에서 화한독에 중독되어, 그것을 해독하기 위해 이전의 외양을 버려야만 했네. 수천, 수만 번을 이야기해도 쉬이 납득이 되지 않을 거란 걸 알아. 그래서 나와 자네, 둘만 아는 이야기를 해볼까 하네.”




***




  그 날은 임수의 열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그것은 다시 말해, 소년장수가 드디어 성년이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임부에서는 큰 연회가 열렸고, 임수는 쉴 새 없이 먹고 마시며 이를 즐겼다. 술을 처음 마시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전까지는 아직 성년에 이르지 못했던 탓에 어른들이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마음껏 마실 수 없었다. 그나마 절친한 지기인 7황자, 정왕 소경염이 왕부를 하사받은 뒤에는 집안 어른들의 눈을 피해 정왕부에서 몇 번 진탕 마신 적이 있기는 하나, 무언가를 남들 몰래 하는 것은 아무래도 비겁한 행동 같다는 생각이 들어, 뒷맛이 영 찝찝했다. 이제는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흥이 절로 날 수밖에 없었다.

  연회가 마무리 될 무렵, 임수는 술에 절여져 제대로 서 있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흐느적흐느적 춤을 추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 철없는 적염군 소원수를 침소까지 안전하게 모시는 일은 그의 부관인 위쟁의 몫이었다. 그 역시 술에 취한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발음이 꼬이거나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봐, 위쟁! 성년이 된다는 게 이리 좋은 것이었나아? 으응? 자네는 나보다 나이가 많자나……. 이 맛을 나보다 훨씬 먼저 본 게 아닌가! 이리도 좋은 것이라고 미리 말을 좀 해 주지 그랬어? 이렇게나 마셨는데도! 아무도! 아아아아무도! 내게 뭐라고 하는 이가 없다니!”


  양껏 술을 마신 것이 그리도 좋았을까. 위쟁의 어린 주군은 제 부관의 부축을 받아 걷는 내내 그 이야기뿐이었다.


  “이제 그만큼 더 큰 책임이 생기는 겁니다, 소원수.”


  위쟁이 임수의 어깨를 단단히 잡으며 말했다. 임수는 입을 헤 벌리고 웃었다.


  “사시일……. 이렇게까지 마실 생각은 없었어. 솔직히 꼴사납자나. 말도 잘 못하고, 부축이나 바꼬……. 하지만 그래도, 내가 성년이 된 걸 축하해주겠다고 온 사람드리 한 잔씩 따라주는데, 어떠케 거절해? 헌데! 왜 그리 사람이 마나? 정말로 한 사람당 한두 잔씩바께 안 바닸는데!”


  술이 감정 기복을 심하게 만드는 것인지, 임수는 언제 웃었냐는 듯 잔뜩 구겨진 낯으로 짜증을 부렸다. 위쟁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목구멍 너머로 삼켰다. 여기서 웃었다가는 술에 취한 임수가 지켜서 곯아떨어질 때까지 투정을 받아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번갈아가며 웃다가 짜증을 내다가 하느라 연회장에서 침소까지 움직이는 데에 이각 가까이 걸렸다. 훈기가 도는 침소에 들어서자 졸음이 쏟아지는지 도포를 그대로 입은 채로 침상 위에 드러누운 임수를 다시 일으켜 침의로 갈아입히는 것까지 전부 위쟁이 도맡았다. 이는 본래 그가 할 일이 아니었으나, 그가 아니라면 술 취한 소년 장수를 다룰 수 있는 이는 없을 터였다. 불만을 가질 만도 했지만 위쟁은 존경하는 소원수를 보다 가까이서 모실 수 있고, 평소 부하들 앞에서는 잘 보여주지 않는 그의 이면을 볼 수도 있었기에 오늘의 제 역할이 꽤나 만족스러웠다.


  “소원수. 다시 한 번 생일을 감축드립니다.”


  위쟁의 도움을 받아 침의로 갈아입은 임수가 침상 위로 풀썩 쓰러지자, 위쟁은 그 아래에 무릎을 꿇고 공수를 하며 예를 갖추었다. 임수는 입술을 양쪽으로 길게 찢으며 히― 하고 웃었다. 그 표정을 보며 위쟁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아마도 오늘은 임수에게 있어 이제까지 살아온 날들 중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최고의 날이었을 것이다. 위쟁은 임수의 남은 생이 모두 오늘처럼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엇이라 명확히 이야기 하기는 힘들지만, 소년 장수에게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소원수.”


  위쟁은 임수의 곁으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이 위쟁은 무관이긴 하나 관군이 아니라 적염군에, 또한 소원수께서 이끄는 적우영에 속한 사람입니다. 소원수께서 천자께 충성하고자 하시기에 그에 따를 뿐, 제 충심의 주인은 소원수이십니다. 저를 아껴주시는 만큼 앞으로도 위쟁은 소원수께 충성을 다할 것입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위쟁의 이야기를 듣던 임수가 별안간 몸을 벌떡 일으켰다.


  “뭐……? 네 녀석 충심의 주인이 누구라고?”


  마치 술과 하나가 된 듯했던 조금 전까지의 모습이 온데간데없는 것은 물론, 두 눈동자에는 형형한 노기가 서려있었다. 임수가 내뿜는 위협적인 기운에, 위쟁은 꿇어앉은 채로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가 주군을 기쁘게 할 것이라 생각했으나, 결과는 정 반대였던 것이다.


  “그게 적우영 부관의 입에서 나올 말인가? 내게 충성을 바치겠다고? 나는 적염군 소원수고, 적우영의 사령관이다! 우리 적염군은 목숨을 걸고 적군과 싸우며 천자의 나라를 지키는 것으로 충성을 바쳐왔어! 헌데, 조금 전 네놈의 발언은 반역죄로 고발당해도 모자람이 없지 않느냐!! 반역이란 적염의 사내에게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거늘……! 네 녀석의 이야기는 나와 우리 적염군에 대한 모욕이다!”


  임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앉은 위쟁을 힘껏 걷어찼다. 위쟁은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방어하였으나, 내공을 잔뜩 실은 효기장군의 발길질을 완벽하게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윽……!”


  위쟁은 임수의 발에 맞은 팔을 감싸며 옆으로 쓰러졌다. 임수는 부러 그 위에 다시 발을 올리고 힘주어 밟았다. 임부만큼 대단한 가문은 아니었으나, 위쟁 역시 무인 가문에서 태어나,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단련을 해온 몸이었지만 그 순간에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을 수 없었다.


  “진정 내게 충성하고자 한다면 그 순서가 틀렸다. 황제 폐하와 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곧 내게 충성하는 길이야.”


  차갑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그렇게 이야기한 뒤에야 비로소 임수는 위쟁을 놓아주었다. 위쟁은 고통을 견뎌내느라 턱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며 주군을 향해 부복하였다.


  “위쟁이 어리석어 소원수를 욕보이고 적염군의 이름에 먹칠을 하였습니다. 어떤 벌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엎드린 채 연신 바닥에 이마를 부딪치며 죄를 청하는 위쟁을 보며, 임수는 입술을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어 그를 걷어차고 짓밟기까지 하였으나, 어찌되었든 위쟁은 임수가 가장 아끼는 부하였으며, 조금 전의 발언이 악의를 갖고 한 이야기가 아님을 아는 까닭이었다. 결국 임수는 위쟁을 일으켜 세웠다. 위쟁의 이마는 벌써 붉게 물들어 피가 배어나고 있었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게 나 하나뿐인 것을 다행으로 알게. 자네는 훌륭한 무관이야. 적우영의 사령관으로서 자네처럼 뛰어난 부하를 잃고 싶지 않네. 앞으로는 더욱 언행에 주의하고 경거망동 말게.”


  다정하게 타이르는 목소리에, 위쟁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 솟아오르는 것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다시 한 번 깊이 부복하였다.




***




  “……그 때에는 그리 성을 내었으나……. 거동이 가능해지자마자 자네를 찾아 예까지 온 데에는 그날 자네가 이야기했던 충심이 떠올라서였음을 부정하지 않겠네.”


  매장소가 말을 마쳤을 때, 위쟁은 경악스러운 낯을 전혀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매장소를 떠나 린신에게로 향했다. 린신은 턱을 높게 쳐들고 거만한 자세로 그 시선을 받았다.


  “그날 그곳에는 저와 소원수 뿐이었습니다. 아랫것들은 연회장을 정리하느라 전부 자리를 비웠지요. 그리고 소원수께서는 저를 위해 그 일을 철저히 함구하셨습니다. 부끄러운 일이니 저 역시 그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고요. 아무리 랑야각이라도 이런 일까지 알 수는 없습니다……! 제 앞에 계신 이 분이 정녕 소원수라는 말씀이십니까? 정말로 이 분이…….”


  위쟁의 목소리는 그의 눈동자와 마찬가지로 잘게 떨리고 있었다. 린신은 부러 과장되게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러게 내가 아까부터 계속 말했잖은가.”


  위쟁의 시선이 다시 매장소에게로 움직였다. 이 가녀린 사내가 소원수라니. 이 사내는 매일같이 연무장에 나가 무예를 닦느라 짙은 색을 띠었던 피부 대신 햇볕 한 번 쬔 적 없는 것처럼 온통 새하얀 살결을 지녔고, 얼굴선은 여인의 것처럼 가늘었으며, 태양처럼 뜨거운 활기 대신 서리처럼 차갑고 음울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이리도 모든 것이 반대이건만 같은 사람이라니. 그러나 조금 전의 이야기는 매장소가 곧 임수임을 증명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위쟁.”


  매장소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쟁을 불렀다. 그리고는 소매 안쪽 깊숙이 손을 넣어 무언가를 꺼냈다. 적염군에  속한 이들이라면 계급에 관계없이 누구든 지니고 있는 것, 바로 적염군 팔찌였다. 위쟁에게 자신의 신분을 증명하기 위해 함에 넣어두었던 것을 꺼내오기는 하였으나, 부러질 듯 가늘어진 손목에는 너무 커서 떨어뜨리지 않도록 팔꿈치 위까지 올려서 찼던 것이다.


  “자네는 적염군 소원수로서의 임수를 가장 가까이서 지켜보았으니 적염의 사내라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큰 자부심인지 잘 알 걸세. 이것은 자네도 알다시피 적염군의 일원임을 것을 증명하는 물건인데, 그 임수가 이 병약한 사내를 어찌 믿고 이 중한 것을 함부로 맡기겠나. 허나, 이 몸이 곧 임수라면 결코 저버릴 수 없는 것이 또한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


  매장소는 위쟁에게 자신의 팔찌를 건넸다. 위쟁은 그 팔찌에 새겨진 임수(林殊)라는 두 글자를 어루만졌다. 좀처럼 믿기 어려우나, 모든 정황이 매장소와 임수가 같은 사람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내가 이러한 꼴로 구차하게나마 살아남고자 한 것은 억울하게 떠나간 이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함일세. 경우 형님과 내 아버지, 그리고 7만의 적염군 형제들을 위해서, 나는 결코 눈을 감을 수 없었네. 물론, 모두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 그렇기에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내 사람’이 절실하네. 하여, 지금은 천자의 나라가 아닌 이 몸을 향한 자네의 충심이 필요해.”


  위쟁은 그 때, 매장소의 눈동자 속에서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그 형형한 눈빛은 주군의 것이 분명했다. 패배를 모르던 소년 장수가 적장과 마주했을 때 띠었던 안광과 정확히 같았다.


  “소원수!”


  비로소 눈앞에 있는 이의 정체를 확신하게 된 위쟁은 즉시 부복하며 예를 갖추었다. 위쟁의 수하인 줄로만 알았던 뒤쪽의 두 사내 역시 매장소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매장소는 그들까지 저에게 고개를 숙이는 것을 보고 다소 놀란 눈치였다.


  “일어나게.”


  매장소는 위쟁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잡아 일으켰다.


  “소원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다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다부진 사내의 눈은 어느새 붉게 물들어 굵은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매장소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여전히 저를 향해 엎드려 있는 다른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자네들도 일어나게. 내게 예를 갖추는 것으로 보아, 적염군에 속했던 이들인 것 같은데, 자네들의 얼굴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 적우영에 속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 적염군의 수가 7만에 이르는 탓에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하네. 부디 섭섭하게 생각지 말게나. 자네들, 이름이 어찌 되지?”


  두 사람은 항상 우러러보았던 무패의 소년장수가 자신들의 이름을 물어봐 주었다는 것에 감읍하여 섭섭하게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매우 벅찬 표정을 지었다.


  “려강이라 합니다.”
  “견평입니다.”


  매장소는 그 두 이름을 머릿속에 새겼다.


  “지위는 어느 정도 되었는가?”
  “저희 둘 모두 십부장이었습니다.”


  견평이 나서서 답했다. 매장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위쟁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저들 이외에 살아남은 이들을 더 아는가?”
  “예. 이곳에 머물고 있는 이들도 조금 더 있습니다. 다만…….”


  위쟁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존자를 모두 파악하지는 못하였으나, 제가 알고 있는 선에서 적우영의 생존자는 저와 소원수 단 둘 뿐입니다. 또한, 높든 낮든 려강이나 견평처럼 지위가 있었던 이들 역시 한 손으로 전부 헤아릴 수 있는 수준입니다. 소원수께서 대업을 도모하고자 하신다면 모두가 따를 것이나, 현재로서는 병력이 턱없이 부족합니다.”


  매장소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반란을 일으키고자 함이 아닐세.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면 족해. 적염군은 역모의 누명을 썼네. 허나, 내가 군사를 일으켜 황상을 친다면 역모는 더 이상 누명이 아닌 진실이 되는 것이 아닌가. 나는 황상께서 그 날의 일이 잘못된 판단이었음을 인정하고 스스로 바로잡도록 할 생각일세. 그리 하면 우리는 명예를 되찾을 것이고, 황상께서는 간신의 혀에 놀아난 한심한 황제로 역사에 기록되는 일을 피할 수 있겠지. 물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이 황상께는 괴로운 일일 것이나, 군주가 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는 것 또한 신하의 도리이니…….”


  매장소와 위쟁의 대화를 말없이 지켜보던 린신은 제 벗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매장소, 아니, 임수가 린신에게 보여주었던 모습은 여느 강호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린신이 아는 임수는 무공을 쌓고, 고수들과 겨루어 자신의 강함을 증명하고 싶어하는 보통의―다만, 그의 내공은 나이에 비해 결코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무인이었다. 그러나 지금 위쟁과 마주하고 있는 매장소는 넘치는 충심으로 군을 이끌었던 장수이며 자긍심 가득한 귀족이었다. 하지만 린신은 금세 그 낯선 모습조차 사랑하게 되었다. 물론, 적염군 장수로서 매장소가 지닌 가치관은 린신의 것과는 전혀 달라, 가슴 깊이 공감하고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매장소가 원한을 뒤로 미뤄두고 힘들고 괴로울 것이 자명함에도 자신의 가치관 안에서 가장 올바른 길을 택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그 어려운 결정을 가능케 한 그의 올곧은 의지는 존경 받아 마땅했다. 바로 그 점이 린신을 또다시 매료시킨 것이었다.


  “우선은 살아남은 적염군 형제들을 되도록 많이 모아주게. 단, 모두가 반역자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있다는 점을 명심하게. 단 한 명만 배신을 해도 우리는 물론, 우리를 도와준 이들까지 피해를 입을 수 있어.”


  매장소가 위쟁에게 지시를 내렸다.


  “명 받들겠습니다.”


  위쟁은 공수를 하며 힘차게 답했다. 그는 죽은 줄 알았던 소원수가 살아 돌아와 다시금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게 된 것이 너무나도 기뻤다.


  “아직 곡주께 인사도 드리지 않았는데 너무 이야기가 길어졌군. 그만 일어나세. 자네의 양부께 안내해주게나.”


  매장소가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린신은 얼른 그의 팔과 허리를 받쳐 부축했다.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두통 탓에 매장소의 몸이 휘청이며 린신 쪽으로 기울었다. 린신은 그의 허리를 받치고 있던 손을 올려 재빨리 어깨를 감싸 잡았다. 저를 감싸는 린신의 온기를 느끼자마자 얼굴이 홧홧해져서, 매장소는 고개를 숙여 붉어진 낯을 감추어야 했다. 하지만 그 정도로는 바로 옆에 있는 린신의 눈을 피하는 것이 전부였다. 정면에 서 있는 위쟁이 보기에는 매장소의 얼굴 위로 떠오른 붉은 빛은 여전히 겉으로 훤히 드러난 채였다. 위쟁은 그 모습을 보며 참으로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것이 누군가를 향한 넘치는 연정을 지닌 이들이 자주 보이는 모습이기 때문이었다. 소원수를 곁에서 모시는 동안, 위쟁은 그가 누군가를 연모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그는 운남 목왕부의 예황군주와 혼약을 맺고 그녀를 각별히 아끼기는 하였으나, 그 역시 연심이라기보다는 여동생을 아끼는 오라비의 마음과 더 비슷했다. 만일 소원수에게 드디어 연모하는 이가 생긴 것이라면 그 상대는…….


  “내 일행이 몸이 좋지 않으니 곡주께 이리로 오시라 하게.”


  린신이 위쟁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러자 매장소가 린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나는 위쟁……, 소현을 만나러 온 객일세. 곡주께선 약왕곡의 주인이자 소현의 양부이니 내가 인사를 드리러 가야 옳아. 이리로 오시라니, 그 무슨 무례인가!”


  매장소가 아직 임수였을 때, 그는 금릉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천둥벌거숭이였으나, 출신이 출신인지라 반드시 예를 갖추어야만 하는 자리에서는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칼 같았다. 매장소의 얼굴 위로 이제는 사라진 임수의 얼굴이 겹쳐지는 듯했다. 위쟁의 가슴 안에서 반가움과 서글픔이 한데 뒤섞였다.


  “예서 잠시만 기다리시지요. 곡주를 모셔오겠습니다.”


  위쟁은 씁쓸한 기분을 갈무리하며 린신을 향해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위쟁……!”


  매장소의 당황스러운 목소리가 곧바로 따라붙었으나 위쟁은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객방을 나섰다. 려강과 견평도 그의 뒤를 따랐다. 매장소는 고개를 돌려 난처한 표정으로 린신을 쳐다보았다. 린신은 빙긋 웃으면서 매장소를 다시 자리에 앉혔다.


  “괜찮네, 괜찮아. 자네는 소현의 객이기도 하지만 랑야각 소각주인 이 몸의 일행이 아닌가. 우리 랑야각은 약왕곡에게는 제법 큰 손님이거든. 그래서 랑야각에서 사람을 보내면 약왕곡에서는 곡주가 직접 나와 맞이하곤 했다네. 오늘은 아마 자네의 명함에 써 있던 '위쟁의 벗'이라는 글귀 때문에 소현을 따로 보낸 듯한데, 자네와 소현 사이의 용무가 끝났으니 이제 곡주께서 나를 맞이할 차례지. 단순하게 보면 시전 상인과 손님의 관계하고도 전혀 다를 바 없으니 예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네.”


  매장소는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며 편안한 얼굴을 하였다.


  “아직 머리가 아프지? 좀 더 누워 있게나.”


  린신이 매장소의 손목을 잡고 맥을 살피며 말했다. 매장소는 고개를 저었다.


  “곡주를 예까지 모셔오는 것은 무례가 아니라고 하였으나, 그렇다고 드러누운 채로 맞이할 수도 없는 일 아닌가.”


  린신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매장소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소 곡주는 의원은 아니나 약재상을 하는 만큼 병자에게는 관대한 편이네만, 그럼에도 자네 마음이 편치 않다면 이렇게 나를 등받이 삼아 기대어 앉게.”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저도 모르게 린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순간, 매장소는 황급히 몸을 뒤로 물렸다. 린신은 매장소의 반응에 어안이 벙벙하여 어정쩡하게 손을 든 채 동작을 멈추었다.


  “그……, 그냥 누워 있어야겠네. 다시 두통이 심해지는 듯하여…….”


  매장소는 황급히 둘러대며 보료 위에 몸을 누이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올려서 덮었다.


  “장소, 맑은 공기를 마셔야 두통이 나아질 걸세. 이불을 조금 내려서 덮는 것이 나을 듯한데…….”


  린신이 걱정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매장소는 그 말을 듣지 못한 척, 오히려 이불 속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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