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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매] 여명지화(黎明之花) 01

강호에서 나고 자란 매장소와 린신의 이야기

‘매장소가 처음부터 매장소였다면?’ 하는 상상에서 시작된 글입니다.

오랜만에 린매 새 연재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녹음이 짙어져가는 어느 계절의 시작, 좁고 험한 산길 위에서 한 여인이 제 키의 서너 배는 되어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올려다보며 길게 숨을 내쉬었다. 나뭇잎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하얀 피부 위에 맺힌 땀을 식혀주었다. 그 기분 좋은 느낌에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녀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를 지녔으나, 그 아름다움에는 정체 모를 독기가 서려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정이라고는 조금도 보이지 않는 날선 눈빛 탓일 터였다. 절세가인의 새카만 두 눈은 매우 강하지만, 동시에 아주 잔인한 의지로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여인은 힘껏 움켜쥔 주먹을 하늘을 향해 내질렀다. 마치 머리 위를 덮고 있는 높은 하늘을 깨부수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그런 채로 결심을 다지듯 심호흡을 한 뒤, 그녀는 다시 산 아래로 향하기 시작했다.


여인이 지나온 길을 거꾸로 따라 산을 올라가면 크고 작은 전각들이 수없이 늘어선 기묘한 곳에 다다르게 된다. 전각 하나하나의 생김은 화려하기보다는 소박하였으나, 가장 큰 전각의 폭은 경성의 어느 대갓집 못지않았다. 전각 하나하나 매우 정교하게 축조된 것으로 보아, 꽤 실력 좋은 목공의 손길이 닿은 것이 분명했다. 깊은 산중에 자리한 풍경으로는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혹자는 이곳을 신선들의 세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다.


쉬이 믿기지 않는 풍경 속에서도 가장 비현실적인 모습은 가장 높이 솟은 전각의 지붕 위에 올라앉은 앳된 얼굴의 소년이었다. 그는 겨우 십대 중반 즈음 되어 보일 뿐이었으나, 서늘하게 식은 눈동자 탓에 제 나이 보다 몇 살은 더 성숙하게 느껴졌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계절과는 상반된 그 눈동자는 조금 전에 이곳을 떠난 여인의 뒤를 쫓고 있었다. 이내 소년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불편한 심기를 감추기 어려운 모양이었다.


소년의 이름은 린신. 랑야각주 린요의 외아들이자, 이제 막 열여섯이 된 랑야각의 소각주였다. 랑야각은 신선이 살 것만 같은 이 한 무리의 산중 전각들을 칭하는 이름으로, 그 정체는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다 하여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방대한 정보량을 자랑하는 지재상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질문자가 누구든 각에서 제시한 값을 지불할 수만 있다면 조건 없이 답을 내어주었으나, 그 값이 결코 만만치 않은데다가 험준한 랑야산을 올라 랑야각의 질문함에 질문을 적은 종이를 넣어야만 했기에 그 누구도 랑야각의 정보를 쉬이 얻어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정보력을 가진 것에 대한 책임감인지, 랑야각은 때때로 고작 하나의 질문에 나라를 통째로 갖다 바친다 하여도 지불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값을 매겨 답을 거부하기도 하였다.


그 랑야각의 소각주, 열여섯 살 소년 린신의 낯은 언제나 차갑고 오만한 빛을 띠고 있었으나,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빛을 띠는 두 눈을 가리고 살펴보면 머리 모양만 바꾸어도 어여쁜 소녀로 착각할 정도로 생김이 고왔다. 얇게 땋은 머리카락 한 줄과 함께 반절만 잡아 살짝 묶은 머리 모양, 한쪽 귓바퀴에만 달아 놓은 귀걸이, 은은하지만 정교한 자수가 놓인 도포에서 엿보이는 그의 미감은 그 고운 얼굴과 기막히게 조화를 이루었다. 그러한 외양도 린신을 지상의 존재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데에 크게 한 몫 하고 있었다. 그가 정식으로 랑야각의 소각주가 된 것은 지난 달,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이하면서부터였으나, 빛나는 외양 못지않게 빛나는 총기를 지닌 소년은 이미 랑야각에 없어서는 안 될 인재였다.


험한 산길을 내려가고 있는 여인은 린신이 랑야각 소각주로서 정식으로 맞이한 첫 번째 손님이었다. 각주의 신분에 있는 이가 직접 맞이했다 함은 그녀가 보통의 객이 아닌 귀빈이라는 의미였다. 랑야각이 객을 귀빈인지 아닌지는 판단하는 기준은 그의 신분이 아니라 질문의 내용이니, 그녀가 범상치 않은 질문을 던진 것임에 틀림이 없었다.


랑야각에 질문을 하고 답을 얻는 과정은 바깥마당에 놓인 질문함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선, 질문자는 수십 개의 자그마한 질문함 중 하나를 골라 궁금한 것을 적어 넣는다. 그러면 랑야각은 그 답에 대한 값을 적어 같은 함에 넣었다. 질문자가 제시된 값이 합당하다 여겨 정해진 시일 내에 다시 그 함에 은자를 넣어두면, 다음번에 질문함을 열었을 때에는 그가 얻고자 했던 답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간혹 치러야 하는 값이 상당하여 작은 함에 다 넣을 수 없는 경우에는 각원들이 나와 접객을 하였으나 각주는 그러한 일에 직접 나서지 않았다. 즉, 보통의 경우라면 질문자와 랑야각의 수장은 전혀 마주할 일이 없었다. 그러나 질문의 내용이나 그 질문에 대한 답의 쓰임이 비범하여 랑야각에서 아예 답을 하지 않을 생각으로 아주 높은 값이 매겼음에도 이를 기꺼이 지불하고 답을 얻고자 하는 이는 귀빈으로 분류되어 각주가 몸소 접객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정파와 사파를 불문하고 강호 모든 방파 각각의 기본적인 정보를 원합니다.”



이것이 오늘 랑야각에서 답을 얻어간 귀빈이 던진 질문이었다. 각 방파의 내밀한 사정까지 물은 것은 아니었으나, 강호의 ‘모든’ 방파에 관한 정보를 요구해온 것을 예삿일로 볼 수도 없었다. 랑야각은 이 질문에 삼백만 냥이라는 가격을 매겼다. 이는 웬만한 대갓집에서도 쉬이 지불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여인은 그만한 금액을 얼굴 색 하나 바꾸지 않고 자신과 마주 앉은 각원에게 건네주었다. 비단은커녕 넝마에 가까운 것을 옷이라고 걸치고 있는 행색으로 보아 결코 그만한 재력을 지녔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음에도 그녀는 상인에게 거액을 지불하는 것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었다. 랑야각은 지재 값으로 지불된 재물이 온당치 못한 것이라면 그것을 본래 있어야 할 곳으로 돌려보내고 부정으로 지재를 사려 한 이를 매몰차게 내치기도 했다. 여인이 랑야각에서 귀빈 대우를 받으며 답을 얻어서 무사히 산을 내려갔다는 것은 그 삼백만 냥의 은자가 그녀의 주머니에서 나온 정당한 재물임을 의미했다.



“소각주, 저 여인이 정녕 활족의 선기공주입니까……?”



여인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지붕 위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쫓던 린신이 땅에 내려서자마자 그와 비슷한 또래의 어린 각원이 다가와 조심스레 물었다. 그는 여인이 가져온 은자를 건네받아 확인하고 소각주에게 귀빈이 왔음을 알린 각원이었다. 린신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활족은 거의 멸족되어 극소수만 살아남았고 생존자 중 왕족은 오로지 선기공주 뿐이지 않습니까? 대체 삼백만 냥이라는 거금을 어디서 얻었을까요?”



린신은 성가신 기색을 최대한 감추려 노력하며 얕은 한숨을 내뱉었다.



“걸인과도 같은 행색을 보지 못하였느냐. 가지고 있던 패물은 물론 입고 있던 비단옷까지 팔아치운 게지. 공주가 정말로 이 강호에 모든 것을 건 모양이다.”



어린 각원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소각주는 그것을 못 본 체하며 경공을 써서 허공으로 날아오르더니 순식간에 각원의 시야에서 사라져버렸다. 사실 린신은 그의 호기심에 일일이 응해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선기공주와 대화를 나누던 중 지나간 어떤 짧은 순간 탓이었다.


며칠 전, 린신의 아버지이자 랑야각의 주인인 린요는 선기공주가 남기고 간 질문을 발견하고는 제 아들에게 질문자의 신원과 질문의 내용을 전하며 값을 얼마나 부르면 좋을 지 의견을 물었다. 린신은 반각도 고민하지 않고 곧장 삼백만 냥이면 족할 것이라 답했다. 아들의 답이 꽤나 흥미로운 듯 린요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 역시 이 질문에 값어치를 딱 그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값이 합당하다 판단한 이유가 있느냐?”



아비는 제 아들의 사고가 저와 같으리라 짐작하면서도 부러 판단의 배경을 물었다.



“그것이 선기공주가 마련할 수 있는 금전의 최대치이기 때문입니다. 활족의 다른 생존자들은 일반 백성이라 가진 것이 거의 없으니, 이는 곧 활족 전체의 재산이기도 합니다. 질문의 내용으로 보아, 활족은 강호에서 부흥을 꾀하려는 모양인데, 강호 정파는 자신들의 무공이 그런 일에 이용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고, 반대로 사파는 그런 것에 전혀 얽매이지 않기에 활족과 결탁하여 혼란을 초래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선기공주의 총기는 이미 널리 알려진 바, 그녀의 지략이면 능히 강호 세력을 입맛대로 이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표면적으로는 각 방파의 아주 기본적인 정보만을 요구하고 있을 뿐이니 답을 거부할 만한 일은 못 됩니다. 값을 매기기가 참으로 까다로운 사안이지요. 그렇기에 역으로 질문을 던지려는 것입니다. 답을 얻어간다 하여도 후일 반드시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없을 터인데, 그럼에도 고작 이 정도 정보에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걸겠느냐고 말입니다. 활족에게 그 정도로 강한 의지가 있다면 랑야각이 답을 거부한다 하여도 일어날 일은 일어날 것이고, 그로 인해 혼란이 야기된다 하여도 그저 새로운 질서를 형성하는 과정으로 역사에 기록되지 않겠습니까.”



린요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손을 들었다가 눈앞의 소년이 이제는 어엿한 랑야각의 소각주임을 상기하고 들었던 손을 조금 아래로 내려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린신은 철없이 위로 향하려는 입 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느라 입술을 안쪽으로 말아 넣어야 했다.



“과연 알맞은 값이구나. 네 말대로 삼백만 냥을 제시해야겠다. 만일 공주가 값을 치르러 온다면 랑야각의 각주로서 네가 직접 맞이하거라. 가진 것을 전부 내어놓고서라도 답을 얻고자 하는 이는 귀한 객이니 그만한 대우를 해 주어야지.”



그리하여 오늘, 랑야각 소각주는 선기공주와 마주앉았다. 패물과 비단옷까지 모조리 팔아 급히 마련한 돈은 은표 한 장 없이 모두 은전으로만 되어 있어서 액수가 정확한지 확인하는 데에 다소 시간이 걸렸다. 린신과 선기공주는 각원들이 은전의 수를 헤아리는 동안 말 한 마디 없이 조용히 차를 음미하며 기다렸다. 이내 총관이 들어와 액수가 한 치의 오차도 없다는 사실을 전해왔고,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찻잔을 내려놓았다. 린신은 제 옆에 놓아둔 얇은 서책을 선기공주에게 내밀었다. 서책을 받아 든 선기공주는 눈꼬리를 휘며 미소를 지었다. 분명 아름다운 미소이긴 하나 매우 위험한 미색이라고, 린신은 생각했다.



“과연 랑야각입니다. 랑야각을 통하면 이리도 쉽게 강호의 모든 방파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선기공주는 허리를 깊이 숙이며 감사의 뜻을 표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렇게 말했다. 객을 배웅하고자 따라 일어나던 린신의 미간에 옅은 주름이 졌다.



“지금의 활족에게 삼백만 냥은 쉬운 액수가 아니었을 텐데요.”



소각주의 말에 공주의 입가에 다시금 위험하고 아름다운 미소가 걸렸다.



“액수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얼마가 되었든 값을 지불하기만 하면 되니 쉽다는 것이지요. 하긴, 속세와 거리를 두고 있는 랑야각에서 나고 자란 소각주에게는 어쩔 수 없는 일이려나요. 위험을 무릅쓰고 대국들을 양 손에 올려 저울질하고, 그 탓에 멸족의 위기에 처했으면서도 포기할 줄 모르고 이제는 강호 세력을 이용해 활국을 재건하겠다며 그나마 수중에 남아 있는 재물까지 전부 쏟아 붓는 도박을 하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 말입니다.”



공주는 왕가의 혈통답게 넝마와 같은 옷가지를 걸치고도 우아하게 걸었다. 린신은 그녀와 함께 걸으며 길을 안내했다. 그들이 내원을 지나던 중, 한쪽에서 다소 놀란 기색이 묻어있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요한 경내에 울리는 소리는 바람결에 흔들리는 나무의 움직임을 제외하면 그 소리가 유일하여, 선기공주는 저도 모르게 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매 공자! 어쩐 일로 이리 멀리 나오셨습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 매는 나이든 종의 앞에는 열 살 남짓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가 서 있었다. 어여쁜 용모로는 열여섯 살 소각주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였으나, 이 소년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외양을 지니고 있었다. 입고 있는 의복을 보면 사내아이임을 모를 수 없음에도 선기공주는 아주 잠깐 동안 참 예쁘게 생긴 여자 아이라고 생각했다가 급히 그 생각을 고쳤다. 활족에는 유독 아리따운 여인들이 많았고, 공주 본인도 매우 아름다운 여인이었으며, 어미의 용모를 그대로 물려받아 그려놓은 듯 예쁜 외양을 지닌 여아들도 활족에는 수없이 있었다. 그런 활족의 공주조차 잠시나마 성별을 혼동하였으니, 소년의 생김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으리라. 아이는 햇빛 한 번 본 적 없는 것처럼 백옥 같은 피부를 지녔고, 크고 동그란 눈은 최상등의 백진주와 흑진주를 섞어 빚어놓은 듯 맑고 투명했다. 반절만 묶어 단정히 빗어 내린 머리카락은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처럼 부드럽게 흔들렸다.



“그저 산책 중이었네. 근래 앓던 것도 다 나았고, 각주께서도 너무 안에만 있을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 맑은 공기를 마실 필요가 있다고 하셨어. 그러니 내 걱정은 말게.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이리 나와 돌아다닌 탓에 자네나 자네의 동료들이 상전들께 문책을 당한다면, 실은 전부 내 고집 때문이라고 솔직하게 고할 터이니 그 또한 염려할 것 없고.”



종을 대하는 태도로 보아 아이는 이곳에서 신분이 높은 편에 드는 듯하였다. 지위의 높고 낮음을 분명히 하되 상대를 배려하여 마음을 편히 먹도록 해 주는 말씨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차분하고 낮은 목소리는 아이가 얼마나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가르침을 완전히 제 것으로 만든 아이의 총기가 얼마나 빛이 나는지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었다. 앳된 얼굴의 소각주도 충분히 흥미로웠는데, 그보다 더 어린 아이가 소각주 못지않은 빛을 내고 있었으니, 선기공주가 걸음을 멈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 어린 공자는 누구입니까? 아랫것들이 ‘매 공자’라 부르는 것으로 보아, 린가의 자제인 소각주의 형제는 아닌 듯한데.”



궁금증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한 선기공주의 목소리에 린신의 낯빛이 얼음장처럼 차갑게 변했다. 그는 불편한 심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조용히 심호흡을 했다.



“내게 질문을 하고 답을 얻으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할 텐데요.”



린신이 그리 답하자, 선기공주의 눈동자 위로 더욱 강한 호기심이 비쳤다.



“랑야각은 질문의 내용에 따라 값을 달리 매긴다고 들었습니다. 저 공자의 신원이 따로 값을 지불해야 할 정도로 특별한 것인가요?”



선기공주가 거듭 물었고, 린신은 조금 더 깊이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익살맞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대가가 필요하다는 말은 농이었습니다. 그저 어린 아이 하나의 신원이 무에 그리 특별하겠습니까. 아이의 이름은 매장소이며, 강좌맹 종주의 아들입니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의술에 능통하여, 아버지께서 종종 병자를 각으로 데려와 돌보는 일이 있습니다. 저 아이도 그런 이유로 이곳에 잠시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매장소는 푸른 녹음을 바라보며 느린 걸음으로 계속해서 경내를 산책했고, 선기공주는 그를 조금 더 바라보다가 멈췄던 발을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린신은 꽉 쥔 주먹을 소매 아래로 숨기며 그녀와 보폭을 맞추었다. 각을 떠날 때까지 공주는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으나, 린신은 그녀의 모든 관심이 매장소에게 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 린신의 심기가 불편한 이유였다.



‘그 약해빠진 녀석은 끝내 강좌맹의 수치이자 약점밖에 되지 못할 것이거늘 다들 어찌 그리 관심이 많은지!’



아무도 매장소에 대해 그리 생각하지 않을 터이나, 린신은 괜스레 마음속으로 못된 소리를 지껄이고는 검을 챙겨들고 산의 남쪽 봉우리로 향했다. 남쪽 봉우리를 오르다보면 그 허리께에 랑야각의 비둘기장이 있고, 비둘기장을 지나 조금 더 올라가면 크고 편평한 바위가 나오는데, 그곳은 린신이 무예를 연마할 때 애용하는 장소였다. 몸을 움직이며 기력을 쏟아내는 것이 부정적인 감정을 털어내는 데에 꽤 효과가 있다는 것을, 그는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아직 완전히 어른이 되지 못한 소각주는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매장소와 관련된 불쾌한 기분을 떨쳐내고자 하는 것이었다.


 


 


 


***


 


 


 


랑야각은 그들이 지닌 독보적인 정보력을 바탕으로 매년 천하의 내로라하는 영웅들에게 순위를 매겨 발표했다. 이를 '랑야방'이라 하는데, 고수, 방파, 부호, 공자, 미인의 다섯 가지 분야로 나뉘어져 있으며, 이름과 순위가 공개되는 것은 각 분야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든 이들 뿐이었다. 랑야각의 명성만큼이나 랑야방의 신뢰도와 유명세 역시 대단하여, 다섯 분야 중 단 한 분야의 가장 끄트머리에 간신히 이름을 올린 정도만으로도 온 천하가 그 이름을 기억할 정도였다.


이러한 랑야방에서 무려 두 분야의 맨 꼭대기에 자신의 이름을 올린 이가 있었으니, 바로 매석남이었다. 그는 랑야고수방 제 1위에 오른 인물임과 동시에 랑야방파방 으뜸에 이름을 올린 강호의 패자, 강좌맹의 수장이며 매장소의 아버지였다.


매장소가 태어나기 두 해 전, 바꿔 말하면 린신이 정식으로 랑야각 소각주의 지위를 인정받은 그 해로부터 14년 전의 일이었다. 강좌맹 종주 매석남은 자신의 수하로부터 도전을 받았다. 도전자의 이름은 사옥으로, 본래 그와 매석남은 어릴 적부터 우애가 두터워, 맹에서의 지위와는 상관없이 호형호제 하는 사이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우애가 사옥에게는 독이었다. 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어린 시절에는 두 사람 사이에 큰 차이가 보이지 않았으나,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매석남은 점점 더 범접할 수 없는 고수가 되어갔고, 그에 비해 사옥의 무공은 적당히 강한 편에 드는 수준에 머물렀다. 성년에 이르러 매석남은 강좌맹주인 아비의 지위를 하나씩 물려받기 시작했고, 타주의 지위에 그쳐야 했던 사옥의 열등감은 더더욱 커져갔다. 마침내 매석남이 강좌맹을 최고의 방파 자리에 올리며 강호의 주인 자리를 꿰차자, 사옥은 매석남의 지위가 탐이 나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챙―


강 옆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에서 두 개의 칼날이 서로 맞부딪치며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매석남과 사옥의 대결을 보기 위해 모여든 맹원들이 들판 주변에 넓게 둘러 서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들의 수장이 승리할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드물게 대결이 끝날 때까지는 알 수 없는 일이라며 중립을 취하는 이들은 있었으나, 사옥의 승리를 확신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그 정도로 명백한 실력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차이를 가장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은 대결에 임하는 당사자들이었다. 그러나 사옥은 필사적이었고, 매석남은 강좌맹을 강호의 패자로 만드는 과정에서 소진한 기력을 완벽하게 회복하지 못한 상태였기에 대결은 쉬이 끝을 맺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하늘은 점차 먹구름으로 뒤덮여갔다.


우르르, 쾅―!


새카만 구름 사이로 섬광이 번쩍이며 커다란 소리가 났다. 갑작스레 시야를 가린 강한 빛에 매석남의 움직임이 아주 약간 느려졌고, 사옥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날카로운 칼끝이 매석남의 왼팔을 스쳤다. 그다지 깊은 상처는 아니었으나, 그 상처로 인해 매석남은 오랜 벗을 잃었다. 본래 사옥의 칼끝이 향했던 곳은 매석남의 심장이었다. 기력이 다소 소진된 상태라 해도 매석남은 여전히 중원의 최강자였고, 사옥이 자신의 심장을 노렸음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그가 그만한 고수였기에 그나마 팔을 조금 베이는 것에 그칠 수 있었던 것이다. 천하제일의 고수가 우레가 치는 것에 잠시나마 방심했던 것도 오랜 우정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된 느슨함이었으나, 사옥은 이미 그의 벗이 아니었다. 이제는 살기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달려드는 사옥에게, 매석남 역시 그를 죽이지 않으면 자신이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맞서기 시작했다. 이제 두 자루의 검에는 일말의 자비도 남아있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맹원들 모두가 달라진 분위기를 알아차렸다. 이제는 그들 모두 매석남의 승리와 사옥의 죽음을 확신했다. 수년간 고수방 으뜸을 지켜온 고수가 상대의 목숨이 끊어져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검을 휘두른다면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음이 자명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시간이 지날수록 밀리는 것은 사옥이 아니라 매석남이었다.



“저…, 저것은……!”



지켜보는 맹원들 중 한 여인이 경악스러운 낯빛을 감추지 못한 채 소리쳤다. 소진양이라는 이름의 그 여인은 강좌맹의 일원이면서 동시에 매석남의 연인이었다. 그녀를 경악하게 한 것은 매석남의 왼쪽 손가락에 끼워진 검은 가락지였다. 그것은 소진양이 매석남에게 선물한 것으로, 본래 하얗게 빛나는 은가락지였다. 은은 독에 닿으면 검게 변하는 성질이 있었고, 은가락지에 닿은 것은 사옥의 검에 베인 상처에서 흘러나온 매석남의 피였다. 피에 섞여 은가락지를 검게 물들인 독의 출처는 뻔한 것이었다.



“이것으로 마지막이다!”



그 순간, 사옥이 검을 쥔 채 매석남을 향해 몸을 날렸다.



“진양!!”



그러나 그 검은 매석남에게 닿지 못했다. 소진양이 두 사람 사이를 막아 선 것이다. 소진양은 사옥의 검에 왼쪽 어깨를 깊게 베인 채였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매석남은 물론 사옥마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소진양은 얼음처럼 차가운 눈으로 사옥을 노려보며 오른손으로 머리에 꽂고 있던 은비녀를 뽑아, 여전히 제 어깨에 박혀 있는 칼날에 대고 긁었다. 두 금속이 마찰하며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은비녀는 순식간에 새카맣게 변했고, 소진양은 그것을 머리 위로 높이 쳐들었다.



“네 이놈, 이런 짓을 하고도 감히 무인이라 할 수 있느냐! 강좌맹은 네놈처럼 비겁한 자를 용납할 수 없다!”



소진양의 외침에 주변에 둘러선 강좌맹원들이 사옥을 향해 일제히 사나운 기운을 내뿜었다. 사옥이 당황하여 검을 놓고 한 발 뒤로 물러서자, 매석남은 재빨리 그의 가슴을 걷어차 바닥에 쓰러뜨렸다. 맹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사옥에게 달려들어 그를 제압했다. 매석남에 비할 바는 못 되어도 그 역시 꽤 강한 무공을 자랑하였지만 하나하나 무시할 수 없는 공력을 지닌 맹원 십 수 명이 동시에 달려들자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소진양은 사옥이 완전히 제압당한 것을 확인하자마자 제자리에 힘없이 주저앉았다. 독이 묻은 칼날에 깊게 베인 어깨에서부터 뜨거운 열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매석남은 소진양을 감싸 안고 안타까운 손길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소진양은 매석남의 품에 기대어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사옥은 강호의 규율에 따라 처단한다!”



매석남이 제 연인을 품에 안고 몸을 일으키며 맹원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리고는 여전히 살기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는 옛 벗을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강바닥에서 진정한 무인의 도리가 무엇인지 차분히 생각해보길 바라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말일세.”



그것을 마지막으로 사옥에게서 등을 돌린 매석남은 서둘러 강좌맹 본원으로 향하였다. 그 순간 그에게는 사옥의 처벌보다 소진양의 치료가 훨씬 시급한 일이었다.


강좌맹원이라 하여 모두가 무인인 것은 아니었다. 강호의 패자인 이 거대 방파의 구성원들에게는 각기 다른 여러 가지 역할이 있었고, 그 중에는 의원도 있었다. 사옥의 검에 독이 묻어 있었던 것이 밝혀진 직후, 별다른 명령이 없었음에도 발 빠르게 몇몇 맹원들이 본원에 소식을 알린 덕에 매석남이 도착했을 때, 본원의 의원들은 곧바로 소진양의 상처를 살필 수 있도록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만만한 독이 아니네. 서두르지 않으면 진양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어!”



매석남은 소진양을 의원들의 손에 맡기며 숨도 쉬지 않고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그 역시 같은 칼날에 스쳐 부상을 당했기에 소진양의 어깨를 파고든 독이 어느 정도로 지독한 것인지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었다. 그의 왼팔에 난 자그마한 상처에서도 아직 피가 굳지 않고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종주께서도 한시바삐 치료를 받으셔야 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예사 독은 아닌 듯 싶습니다.”



본원의 의원들을 이끌고 있는 안 의원이 본래 새하얀 색이었던 종주의 소맷자락이 온통 검붉은 핏빛으로 물든 것을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매석남은 고개를 끄덕이며 안 의원과 함께 제 처소로 향했다. 상처가 깊지 않았던 덕인지 그에게서는 중독 증세가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안 의원은 몇 번이나 거듭하여 진맥을 하고 혈을 짚어보고는 직접 칼날에 닿은 왼팔을 외에는 독기가 전혀 퍼지지 않았다는 진단을 내렸다. 왼팔에 남은 독기 역시 한가득 흘러내린 피에 섞여 상당수 몸 밖으로 빠져나온 상태였다. 안 의원은 환자의 상처 주변을 압박하여 그나마 남아 있던 미량의 독까지 완전히 짜낸 뒤, 핏자국을 닦아내고, 고약을 바르고, 붕대를 감았다. 매석남의 치료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는 곧장 몸을 일으켜 잰걸음으로 소진양의 처소로 향하는 안 의원의 뒤를 따랐다.


소진양은 매석남보다 훨씬 상황이 좋지 않았다. 환부 주변을 압박하여 독 섞인 피를 모두 뽑아내야 하는 것은 그녀도 마찬가지였으나, 안 의원 혼자만의 힘으로 충분했던 매석남의 경우와는 달리, 세 명의 의원이 그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매석남이 제 연인의 처소에 당도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의원이 자그마한 약병을 들고 방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다행히 아직 한 병 남아 있었습니다!”



약병을 건네받은 안 의원이 그 안에서 단약을 하나 꺼내 소진양에게 먹였다. 물론 의식이 없는 소진양이 그것을 목 뒤로 넘길 수 있도록 입술 사이로 물을 흘려 넣는 것 역시 잊지 않았다. 그 단약은 강좌맹에서 안 의원과 랑야각주이자 뛰어난 의원인 린요, 그리고 중원 최대의 약재상인 약왕곡의 곡주 소천추가 머리를 맞대고 만든 것으로, 독에 대해서는 만병통치약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탁월한 효과가 있었다. 사옥의 독은 여러 종류의 독을 조합하여 독기를 몇 곱절이나 끌어올린 것이었기에, 이 단약은 가장 적절한 해약이었다. 그러나 그 재료 중 삼분의 일 가량이 약왕곡조차 소량밖에 구하지 못할 정도로 희귀한 것들이어서 넉넉하게 보유할 수 없는 약이기도 했다. 그런 약이 작은 병으로나마 한 병 남아있었으니, 그야말로 하늘이 도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소진양이 병상을 벗어나는 데에는 상당한 시일이 걸렸다. 하지만 그나마도 병상에서 벗어난 것이 전부일 뿐, 그녀는 평생 쌓아온 내공을 모두 잃고 말았다. 린요가 급히 랑주로 찾아와 안 의원과 함께 치료에 매진하였음에도 공력이 없는 보통 여인의 몸 정도로 회복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본래 그녀는 랑야고수방 10위에 이름을 올릴 정도의 고수였으나, 그 모든 것이 옛 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당신을 볼 낯이 없소.”



검 대신 서책을 든 소진양의 맞은편에 앉은 매석남은 차마 그녀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였다.



“하다못해 당신을 이렇게 만든 그 놈을 확실하게 처단하기라도 했다면…….”



매석남이 분한 듯 두 주먹을 힘껏 말아 쥐었다. 그 날, 매석남이 쓰러진 소진양을 안고 사라진 뒤, 사옥은 맹원들이 보인 찰나의 틈을 이용해 달아나버렸다. 강좌맹은 물론 강좌맹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방파들까지 모두 합심하여 대대적인 수색을 벌였으나 사옥은 매번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 결국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강좌맹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사파들 중 한 곳에서 그를 숨겨주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매석남은 그들과 전쟁도 불사할 기세였으나, 소진양의 만류에 간신히 분노를 가라앉히고 추적을 중단했다. 소진양은 자신 때문에 매석남과 그를 따르는 수많은 무인들이 위험을 무릅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만하면 되었습니다. 그동안 등한시했던 서책을 다시 잡으니, 이 또한 아주 즐겁습니다. 강좌맹에는 몸을 쓰는 이들만 가득하니 한 사람 정도는 머리를 쓸 줄 알아야지요. 저는 지략가가 되렵니다. 어려서부터 저를 지켜봐온 오라버니라면 제 총기를 잊지 않으셨을 테지요.”



소진양은 침착한 말투와 온화한 표정으로 매석남을 달랬다. 검신이 짧은 두 자루의 검을 양 손에 쥐고 펄펄 날아다니던 소진양이었다. 이 순간, 가장 힘든 사람이 소진양임을 모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어느 때보다도 씩씩하게 행동했고, 지금처럼 오히려 다른 이들을 위로해주기도 했다. 그녀를 향한 매석남의 사랑이 더욱 더 그 깊이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소진양의 치료가 끝난 지 채 석 달도 지나지 않아, 매석남은 그녀에게 청혼을 했고, 소진양은 무공을 전부 잃은 처지임에도 주눅 들지 않고 자신은 사랑받아 마땅하다는 듯 당당하게 강호의 패자가 건넨 청혼을 받아들였다. 내공을 잃었어도 그녀는 여전히 그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었다.


매석남과 부부가 된 뒤, 소진양은 스스로 이야기했던 것처럼 훌륭한 지략가이자 강좌맹의 현명한 안주인이 되었다. 기실 그녀가 괴력을 자랑하는 강호의 사내들로 가득했던 고수방에 이름을 올렸던 것도 뛰어난 전술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승리를 이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강좌맹의 타주로서, 그녀는 훌륭한 협상 능력으로 불필요한 무력 충돌 없이 승전보를 가져왔고, 강호의 인재들을 불러들여 강좌맹에 합류하게 만들었다. 그 덕에 강좌맹은 날이 갈수록 강하고 단단해져 갔고, 다치고 상처 받은 이들을 더 많이 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부부가 환상의 호흡으로 맹을 이끈 지 2년째 되던 해, 마침내 소진양의 뱃속에 작은 생명이 자리를 잡았다. 처음 그 사실을 알았을 때 두 사람은 뛸 듯이 기뻐하였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내공을 잃었을 뿐 별다른 후유증은 없는 것처럼 보였던 소진양의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두고 안 의원은 기력이 쌓이는 대로 전부 뱃속의 아이에게 흘러들어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도 지금은 그저 잘 먹고, 푹 쉬면 큰 문제는 없습니다. 출산할 때가 문제이지요.”



안 의원이 말했다. 산달이 찰수록 산모의 몸은 점점 더 쇠약해질 것이고, 약해진 몸으로 출산을 하다가는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였다. 매석남이 떨리는 두 손을 소매 아래로 감추었다. 이를 본 소진양은 오히려 남편의 소맷자락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세요. 저는 그리 쉽게 쓰러지지 않습니다. 금릉을 떠나 검 한 자루 쥐고 홀로 강호에 발을 들였던 열두 살 때, 모두가 제게 며칠 버티지 못하고 죽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곱게 자란 경성의 아기씨가 지내기에 강호는 너무나 거칠고 험한 곳이라고요. 하지만 어떻게 되었습니까? 저는 한때 랑야고수방에 이름을 올렸고, 지금은 강호 최고의 방파를 이끌고 있어요. 전부 잘 될 것입니다. 게다가 저는 운이 좋은 편이거든요.”



확신에 찬 소진양의 목소리가 매석남의 두려움을 가라앉혔다. 물론 소진양이 씩씩하게 장담한 것과는 달리 현실은 가혹했으나, 매석남은 그녀의 강인함을 믿었다. 아이가 태어나던 날, 소진양은 거의 하루 종일 진통을 겪었고, 몇 번이나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었지만, 마침내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강좌맹 본원을 가득 채우던 순간, 아주 힘겨운 전투에서 끝끝내 승리를 거머쥔 투사처럼 호기롭게 웃었다.



“제 말이 맞았지요? 전부 잘 될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갓난아이를 품에 안고 침상에 기대어 앉은 소진양이 침상 가장자리에 걸터앉은 매석남을 바라보며 말했다. 매석남은 그녀와 시선을 맞추며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 부모의 생김 중 잘난 부분만 골라 닮은 조그마한 사내아이는 아주 어여쁜 얼굴로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헌데, 아이의 이름으로 생각해 둔 글자가 있으십니까?”



소진양이 물었다. 매석남은 소매 안쪽으로 손을 넣어 손바닥만한 종이를 꺼내어 그녀에게 건넸다.



“장소(長蘇).”



소진양은 종이에 적힌 두 글자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안 의원의 말로는 당신뿐 아니라 이 조그마한 녀석도 똑같이 생사의 고비를 넘나든 것이라 하더이다. 죽음의 문턱을 넘어 세상에 태어난 셈이니 꽤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하는데.”



매석남이 동의를 구하듯 소진양에게 눈짓을 했다. 소진양이 만족스럽게 웃으며 아이의 이름이 적힌 종이를 매석남에게 돌려주었다.



“아가, 네 이름은 ‘매장소’라고 하는구나. 어렵게 찾아와 주었으니 이제부터는 네게 온갖 아름다운 것들만 선물할 것이다. 약속하마.”



품속의 아이를 고쳐 안으면서, 그녀는 온 진심을 다해 다짐했다. 매석남은 사랑스러운 아내와 아들의 이마에 차례로 입을 맞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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