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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매] 여명지화(黎明之花) 02

강호에서 나고 자란 매장소와 린신의 이야기






매장소는 무엇이든 배움이 빠른 아이였다. 걸음마를 떼는 것도 보통의 아이들보다 몇 개월은 빨랐고, 말과 글을 배우는 속도도 남달랐으며, 하나를 알려주면 열에서 스물을 깨우칠 정도로 총명했다. 단 한 가지 걱정거리라면 잔병치레가 잦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하여 안 의원은 어려서 자주 앓았던 아이가 커서는 더 강건해지는 법이라며 부부를 안심시켰으나, 소진양은 아이가 자꾸 앓는 것이 독을 품고 허약해진 저에게서 좋지 않은 기운을 물려받았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그리고 안타깝게도 소진양의 불안은 틀리지 않았다.


매석남의 어린 아들은 걷는 것에 익숙해져 달릴 수 있게 되었을 무렵부터 아버지와 강좌맹의 무사들에게 무예를 배우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무엇이든 쉽게 배우고 익혀왔던 것처럼 아이는 그들의 가르침을 곧잘 따라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가지 못해 체력의 한계에 부딪쳤다. 아직 어려서 그런 것이라 보기도 힘든 것이, 스스로도 기억 못할 정도로 어릴 때부터 숨 쉬듯 무예를 익혀왔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소의 체력은 보통의 그 나잇대 아이들보다 훨씬 못했다.



“종주께서 보신 것처럼 또래의 아이들보다 몸이 약한 것은 물론이고……. 그리 어렸을 때부터 단련을 해왔음에도 내공이 조금도 쌓이지 않은 것을 보면, 처음부터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었다 보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또다시 앓아 누운 매장소에 대해 안 의원이 내린 진단이었다. 매석남이 무어라 반응하기 전에, 소진양이 있는 힘껏 바닥에 주먹을 내리쳤다. 공력을 모두 잃은 탓에 부딪친 손 마디마디에 푸르게 멍이 올라오고 있었다.



“전부 사옥 탓입니다. 그 자가 그리 비겁한 수만 쓰지 않았어도 그 몹쓸 독이 내 아이를 약하게 만들 일은 없었어요! 이곳은 강호입니다. 다섯 개 랑야방 중 고수방을 최고로 치는 강호라고요! 날 때부터 내공을 쌓을 수 없는 몸이라니……. 장소는 강좌맹의 아이이니 목숨을 위협받을 일이 많을 터인데, 스스로를 지킬 수 없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당장 사옥을 찾아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놓는다 해도 분이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늘 냉철하고 침착했던 소진양이 이처럼 불같이 화를 내는 것은 매석남도 처음 보았다. 그녀는 당장이라도 검을 뽑아들고 사옥을 찾아 나설 기세였다. 매석남은 그런 소진양을 어르고 달래 진정시키기는 하였으나, 속마음은 그녀와 다를 바 없었다. 결국 몇 년 만에 사옥을 잡기 위한 수색이 재개되었다. 이번에는 매석남은 물론 소진양도 그를 찾아낼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사옥은 이미 몇 해 전, 강좌맹의 눈을 피해 어디론가 숨어버린 데다가 수색이 중단된 지도 꽤 되었으니 꼬리를 잡는 일이 쉽지 않았고, 강좌맹 종주의 어린 아들이 열병으로 쓰러지는 것이 그보다 족히 십 년은 빨랐다.

 

 




 

***

 




 

 

눈보라 치는 겨울 밤, 소진양은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랑야산의 험준한 산길을 걷고 있었다. 랑주에서부터 조금도 쉬지 않고 달려왔으나, 여전히 걸음을 늦추지 못하는 것은 품에 안은 아들이 근래 들어 도통 열병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찬바람이 불기 시작할 무렵부터 시작된 아이의 병은 거의 다 나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다시 악화되는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안 의원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이 열병을 완전히 가라앉힐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고, 매석남은 강호 곳곳의 용하다는 의원은 전부 수소문하여 불러들였다. 평소라면 당장 린요에게 랑주로 와줄 것을 청했을 것이나, 하필 그 시기에 매석남의 오랜 친우이자 화타에 버금가는 의원인 린요는 바다 건너까지 유람을 떠나 쉬이 연락이 닿지 않았던 것이다. 매장소의 안전을 위해 그간 그의 몸 상태에 대한 사실을 철저히 숨겨왔던 매석남과 강좌맹이었지만, 좀처럼 나아지지 않는 열병에 생명의 빛을 잃어가는 어린 아이를 두고 볼 수만은 없었다.


그러던 중 린요가 중원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이 전해져왔다. 소진양은 그에게 서신을 보내 랑주로 와줄 것을 청하고 기다리기보다는 매장소를 랑야산으로 데려가기를 원했다. 그 편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약왕곡으로부터 질 좋은 약재들은 물론, 구하기 어려우나 효능이 뛰어난 희귀한 약재들까지 주기적으로 사들이고 있는 랑야각이라면 병을 치료하고 요양을 하기에도 더 나을 것이라는 판단이었다. 마침 아이의 병세도 많이 호전된 상태였다. 매석남도 소진양의 의견에 동의하였으나, 함께 랑야산으로 떠날 채비를 하던 중, 이번에는 그간 수색을 계속해왔던 사옥의 행방에 대한 정보가 강좌맹에 도착했다. 그 탓에 매석남은 랑주에 남아야 했고, 소진양만 아들을 데리고 랑야산으로 향하게 된 것이었다.



“소 타주,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거의 다 왔습니다.”



눈을 헤치고 길을 내기 위해 앞서 걷던 위쟁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소진양이 고개를 끄덕이며 한 발 더 내딛었다. 강좌맹의 무사들 중에서도 창술과 검술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위쟁은 매석남이 아내와 아들의 여정을 호위하도록 함께 보낸 이였다.



“아가, 조금만 더 버텨다오. 조금만…….”



모포에 싸여 제 어미의 품에 안긴 갓 여덟 살 된 아이의 몸은 그야말로 불덩이였다. 출발할 적에는 거의 다 나은 듯했던 병이 랑야산까지 오는 사이에 악화된 것이었다.



“진양!!”



눈 덮인 산길을 일 각 즈음 더 걸어 올라갔을 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요 오라버니……!”



소진양과 그녀의 아들이 랑야산에 당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산을 내려오던 린요가 마침내 그들을 발견한 것이었다. 린요는 소진양에게서 아이를 넘겨받아 자신이 가지고 온 모포로 그 작은 몸을 한 번 더 감쌌다.



“나는 장소를 데리고 먼저 올라가마. 내려오면서 두껍게 쌓인 눈을 치우고 길을 만들어 놓았으니 그 길을 따라 마저 올라오면 된다. 위쟁의 도움을 받으면 지금의 네게도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닐 게야.”



소진양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쟁이 곧바로 소진양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팔을 붙잡아 부축했다. 린요는 아이를 안은 채 눈이 쏟아지는 창공으로 날아올라 경공으로 높은 나뭇가지들을 차례로 밟으며 빠르게 랑야각으로 향했다. 소진양과 위쟁이 랑야각에 도착했을 때, 매장소는 이미 온기 가득한 방에 누워 있었고, 린요는 화로 곁에서 차가운 기운을 충분히 털어낸 뒤, 이제 막 진맥을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아이의 병이 다 나은 것만 같은 안도감에 다리에 힘이 풀린 소진양이 힘없이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행히 소진양은 하루 정도 몸살을 앓았을 뿐 금세 건강을 회복했지만 매장소의 병세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린요는 랑야각 일까지 총관에게 일임하고 하루 종일 매장소의 병을 돌보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는 하루에도 수십 번 어린 아이의 손목을 잡아 맥을 짚어보고, 여린 살결 위에 시침을 하고, 약재 창고에서 좋다는 약재는 전부 꺼내어 더 나은 효능을 낼 수 있는 조합을 궁리했다. 소진양은 그런 린요에게 수시로 머리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 때마다 린요는 당연한 일을 할 뿐이라며 손을 내저었다. 그에게 있어 매석남은 친형제나 다름없는 소중한 지기이고, 매장소 역시 피붙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었다. 총관을 포함한 랑야각 식구들 역시 각주와 강좌맹 종주의 깊은 친분을 익히 아는 바, 다른 모든 일보다 매장소의 병을 우선하는 린요의 행동에 불만을 품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사람, 열두 살 난 린요의 아들, 린신만은 그런 아버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병환은 제때 알아차리지도 못하셨으면서…….’



살짝 열린 손님방 문틈으로 잠도 잊은 채 어린 병자를 살피는 아버지를 지켜보면서, 린신은 그가 다섯 살 되는 해의 정월에 세상을 떠난 제 어머니가 떠올라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 해 겨울, 중원의 두 강자, 대량과 대유는 오랫동안 이어온 전쟁을 마침내 매듭지었다. 긴 전쟁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었다. 이 이상 전쟁을 지속하다가는 나란히 패망할 것을 예견한 양국이 화친을 맺기로 한 것이었다. 그것은 당사국인 대량과 대유 뿐 아니라 중원 전체의 정세를 뒤흔들었다. 중원 최고의 정보상인 랑야각이 눈 코 뜰 새 없이 바빠진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랑야각의 안주인은 자신의 병을 숨길 수밖에 없었다. 린요가 아내의 병을 알아차렸을 때에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었다. 그 때, 린신은 몇 번이고 제 아버지에게 어머니의 병환에 대해 알리려 하였으나, 격무에 시달리던 린요는 아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했다. 기실 그 시절의 린요는 랑야각을 온전히 물려받은 지 몇 해 지나지 않은 상태였기에 항상 각의 일로 바빴고, 그의 어린 아들은 온전히 아내의 몫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린신의 마음속에 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자리하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그것이 아버지의 탓만은 아님을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나이는 어렸지만 사랑하는 이에게 누가 되고 싶지 않았던 한 여인의 마음과 그런 아내를 지키지 못한 한 사내의 슬픔을 결코 모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가 품은 원망은 애증에 가까웠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허무하게 잃은 뒤, 린요는 다시는 그러한 상실을 겪지 않겠다는 듯 자신을 찾는 병자들을 더욱 극진히 살폈다. 매장소가 어린 아이이고, 친우의 아들이기에 좀 더 마음이 쓰이는 것은 사실이었으나, 특별히 평소보다 더 유난스럽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를 향하던 린신의 원망은 조금씩 매장소에게로 번져가는 중이었다. 그것은 아마 매장소가 랑야각에 당도한 시기가 좋지 않았기 때문일 터였다. 소진양이 온 몸이 불덩이 같은 어린 아들을 안고 랑야산을 올랐던 그 날이 세상을 떠난 랑야각 안주인의 기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열 일 제쳐놓고 병자를 돌보느라 제 아들에게조차 전혀 신경을 쓰지 못하는 린요의 모습은 아내의 병을 알아보지 못하던 때의 그의 모습과 너무나 상반되어, 린신을 더욱 슬프게 했다.



“신아.”



매장소가 랑야각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하고 보름이 지난 후에야 린요가 제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 린신은 차갑게 식은 표정을 가릴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여전히 앓고 있는 매장소를 사이에 두고 제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장소의 상태가 이제 많이 안정이 되었으니, 앞으로는 네가 장소를 돌보거라. 더 이상 각에 쌓인 일을 미룰 수가 없구나.”



그 말을 들은 린신의 미간에 내 천(川) 자가 그려졌다. 명백한 불쾌함의 표시였으나, 린요는 그것을 부러 모른 척 하였다. 어린 아들의 가슴속에 자리한 원망이 무엇 때문인지 아는 탓에 그릇된 태도를 보이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었으나, 한창 의술을 익히고 있는 린신이 제대로 된 의원이 되기 위해서는 그러한 감정을 다스릴 줄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기실 치료는 전부 끝이 났다. 병으로 쇠약해진 몸을 보하는 일만 남았으니, 이 아이를 돌보기에 네 배움이 모자라지는 않을 게야. 탕약은 내 미리 처방해 두었으니 아랫것들이 달여서 때를 맞추어 가지고 올 것이고, 너는 그저 장소의 곁에 머물며 혹 병이 도지지는 않는지, 식사 하는 데에 어려움은 없는지, 맥은 안정적인지, 탕약을 남기지는 않는지 살피기만 하면 된다.”



린신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낯으로 입술을 삐죽이더니 들릴락 말락 한 목소리로 예, 하고 답했다. 린요는 린신의 작은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툼하고 푹신한 포단 위에 누워 솜이불을 덮고 잠든 매장소는 천상의 아이인 듯 어여뻤고, 제 어미를 닮아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린신은 순간 그 말간 얼굴에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린신에게 아름다움이란 한때 미인방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적 있었던 어머니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였기에, 잠시간 일었던 흔들림은 금세 가라앉았다.



“나는 의원이니 너를 병자로서 가엾게 여길 것이나 그뿐이다. 아버지는 어떨지 몰라도 내게 있어 너의 의미는 딱 그 정도가 전부일 것이야.”



린신은 잠든 매장소의 새하얀 낯 위에 다짐하듯 그렇게 말했다. 잔뜩 힘을 준 눈동자에 붉게 핏대가 섰다. 매장소는 여전히 단잠에 빠져 있었다.




 

 

 

***

 

 




 

어린 의원은 처음으로 맡아 돌보게 된 병자는 생각보다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매장소는 열병을 앓느라 기력이 쇠한 것을 감안하더라도 약해빠진 몸뚱이를 갖고 있는 주제에 성격은 전혀 얌전하지 못해, 틈만 나면 따뜻한 방을 벗어나 눈 덮인 정원으로 나가려 했다.



“네 몸 상태로는 이 날씨에 외출은 안 된다고 했지!!”



문 앞을 막아선 린신이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제 아프지 않은걸? 열도 내렸고, 기침도 안 한단 말이야.”



매장소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병이 나았다고 해서 다가 아니야. 네 몸은 너무 약해서 한겨울의 추위를 버티기 힘들다고. 금세 다시 앓아 눕고 말 거다!”



린신은 아직 어리긴 해도 매장소보다는 네 살이 더 많았고, 의원으로서도 진맥이 꽤나 정확하여 병자가 신뢰할 만했다. 어미로부터 병자는 의원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법이라 배워왔던 매장소는 그런 린신을 상대로 끝까지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서책이나 더 읽어야겠네.”



오늘도 외출에 실패한 매장소가 걸음을 돌려 서안 앞에 앉았다. 린신은 아예 문 앞에 자리를 잡고는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매장소를 주시했다. 매장소는 한동안 린신의 눈치를 살피는 듯하더니 이내 완전히 포기한 듯 서책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대로 이각 정도가 지나자, 린신의 관심은 매장소의 손에 들린 서책으로 옮겨 갔다.



‘과연 저 책에 쓰인 문장들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서 읽는 것인지…….’



린신도 읽어본 적 있는 그 서책은 결코 여덟 살 난 아이의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총명하기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린신조차도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무리 없이 그 책 속의 모든 문장을 해석해낼 수 있었다.



“작은 의원님, 제가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생각에 잠겨있던 린신은 머리 위에서부터 들려온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소진양이 린신의 뒤에 서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송구합니다. 들어가시지요, 소 타주.”



린신은 재빨리 일어서서 그녀에게 방 안으로 들어가는 길을 내어주었다. 소진양은 따스한 미소와 함께 그를 지나쳐 아들에게 다가갔다. 매장소는 서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어머니를 향해 공수를 하며 허리를 숙였다.



“독서를 하고 있었구나.”



소진양이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예. 소자는 아버지처럼 무공을 쌓을 수는 없으나 성현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지혜를 얻는 것은 가능할 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그리 된다면 훗날 아버지의 자리를 이어받지는 못하더라도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을 것이고요.”



매장소의 말 속에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체념이 담겨 있었다. 그는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강호 최고의 방파를 이끄는 수장이자 고수방 으뜸인 아버지를 동경해왔고, 자신이 그 뒤를 잇는 미래를 꿈꿔왔다. 하지만 그의 명석한 두뇌는 그것이 절대 이룰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이제는 확실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기특한 생각을 하였으니 상을 주어야겠구나.”



소진양은 등 뒤로 숨기고 있던 손을 앞으로 꺼내어 보였다. 그 손에는 당과가 가득 든 3단짜리 찬합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아들이 앉아 있던 방석 위에 앉았다. 그리고는 옆으로 비켜 서 있던 매장소의 양 팔 아래에 두 손을 넣어 살짝 들어 올리더니 자신의 무릎 위에 앉혔다.



“어, 어머니……!”



매장소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얼굴을 붉히며 린신 쪽을 흘끗거렸다. 그 꼴을 보고 린신이 두 손을 모으고 소진양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모자간의 즐거운 시간을 방해할 수는 없으니, 저는 물러가 있겠습니다. 곧 오반을 드실 시간이니 아랫것들에게 소 타주의 식사도 이리로 가져오라 일러두겠습니다. 타주께서도 잘 아시겠지만 노파심에 말씀드리건대 소(小)공자는 몸을 보하는 일이 최우선이니 편식은 아니 됩니다.”



소진양이 자애로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린신은 몸을 돌려 방을 나섰다. 모자의 점심 식사를 모두 매장소의 방으로 대령할 것을 지시하기 위해 소주방으로 향하는 내내 그는 가슴 속에 차오르는 우울감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아내기 위해 생각에 잠겨 있었다.



“강좌맹의 소 타주 말일세. 강좌맹 종주의 아내분이시라 했지?”



소주방 여인들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린신은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랑야각과 강좌맹은 서로 다른 부류에 들기는 하지만 둘 다 강호에선 엄청난 영향력을 끼치고 있잖아. 이만한 곳의 안주인이라면 다들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걸까?”



여인의 질문은 자신의 동료를 향한 것인 듯했다.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나. 우리처럼 마음 약한 여인네들은 그 자리를 감당할 수 없을 거야. 그래도 미모는 돌아가신 린 부인께서 더 뛰어나실걸?”

“이 사람, 그걸 말이라고 하나? 린 부인께선 혼인 전까지 줄곧 미인방 으뜸을 지켜오신 분이라고! 소 타주의 미모도 출중하지만 린 부인에 비할 수 없는 것이 당연하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린신은 고개를 돌려 소진양과 매장소가 머물고 있는 별채를 바라보았다. 우울감의 진원지가 그곳에 있음을 깨달은 것다. 다정한 모자의 모습은 한때 린신도 누렸던 것이나 이제는 영영 가질 수 없는 행복이었다.



‘기분 나빠.’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어설픈 어른이 되어버린 린신은 어린 아이처럼 매장소와 소진양을 질투하는 자기 자신이 못마땅했다. 하루 빨리 두 사람이 강좌맹으로 돌아가 버렸으면 했다. 모자의 방문 목적은 매장소의 치료였으니, 그들을 속히 돌려보내기 위해 린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내키든 내키지 않든 온 힘을 다해 매장소의 회복을 돕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앓다가 조금 나아졌다가 다시 앓기를 여러 번 반복한 여덟 살 아이의 몸은 좀처럼 기력을 되찾지 못했다. 한 달 가량의 시일이 더 지난 뒤, 린요는 린신의 마음과는 정 반대의 결정을 내렸다. 상태가 충분히 좋아질 때까지 매장소를 랑야각에 머물게 한기로 한 것이다.


린신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은 한 가지는 소진양이 랑주로 돌아간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매석남의 아내이며 매장소의 어머니였으나 동시에 강좌맹의 타주이기도 했다. 랑주를 너무 오래 떠나 있을 수 없는 몸인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을 남겨두고 돌아가야만 하는 마음이 편치는 않았으나, 그녀는 소중한 아들에게 자주 걸음 하겠다는 약속과 그를 지킬 호위무사를 남겨둔 채 랑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야 했다.


행복한 한때를 보내는 모자의 모습을 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린신에게 정말로 위안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문제가 고개를 든 것 역시 사실이었다. 린신의 총기는 비범하다 할 수 있었고, 또래의 어린 각원들은 굳이 대어보지 않아도 그에 훨씬 못 미쳤다. 만약 린신에게 형제가 있었다면 비슷한 수준의 명석함을 지녔을지 모르나, 그는 물론이고 그의 아버지에게도 형제는 없었다. 그렇기에 랑야각의 그 누구도 린신을 그 또래의 다른 소년들과 비교해 보겠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런데 매장소가 랑야각에서 요양하기로 결정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원들이 린신과 매장소 중 누가 더 뛰어난지에 대해 갑론을박을 하기 시작했다.



“무엇을 그리 열심히 읽고 있느냐. 이곳에 있는 문서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책과는 거리가 멀 터인데.”



랑야각 서고 한쪽 구석에 마련된 평상 위에 앉아 하나의 서책처럼 엮어놓은 문서 다발을 넘겨보던 매장소에게, 린요가 부드러운 말씨로 물었다. 매장소가 당분간 랑야각에 머물기로 결정된 직후, 린요는 아이에게 기꺼이 서고 출입을 허락했고―린신이 굉장히 못마땅해 했다―매장소는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을 그곳에서 보냈다. 랑야각의 서고는 중원 곳곳에서 수집된 정보들이 나름의 규칙에 따라 정리되어 있는 곳으로, 각의 심장이라고 불러도 과하지 않았다. 그런 곳을 매장소에게 완전히 개방한 일의 배경에는 역시나 매석남에 대한 린요의 신뢰가 있었다.



“아닙니다. 매우 재미있습니다. 여기에 적혀 있는 것은 그 무엇 하나 허구가 없지 않습니까. 앉은 자리에서 중원을 구석구석 살피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온데 재미있을 수밖에요.”



매장소가 또박또박 답을 하였다. 린요는 제 아들보다 몇 살 더 어린 작은 소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는 그가 읽고 있던 문서를 살펴보았다. 그것은 활국의 흥망성쇠를 기록한 글이었다. 아리따운 여인이 많고, 그 여인들이 모든 권력을 쥐고 있는 보기 드문 나라. 하지만 대량과 대유라는 두 강대국 사이에 자리를 잡는 바람에 양쪽에서 압박에 시달려야 했던 가여운 약소국. 끝내 나라는 무너졌고, 활족은 대량과 대유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줄타기를 하다가 대량에 흡수되었다. 활국 왕족은 대량 귀족의 지위를 얻었고, 본래 활국의 영토였던 땅은 그들의 영지가 되어, 활족 백성들은 나고 자란 곳에서 계속 살아갈 수 있었으므로 큰 불만을 표하지 않았다. 이렇듯 겉보기에는 대량이 활족을 완벽하게 품은 것처럼 보였으나, 랑야각이 수집한 여러 정보들은 활족 내부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활족의 이야기 중 어떤 부분이 가장 재미있느냐?”



린요가 매장소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으며 물었다.



“일국의 흥망성쇠를 이야기하는 글이다 보니 어느 장이든 다음 장을 기대하게 됩니다만, 가장 재미있는 일은 이 글을 토대로 활족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이었습니다.”



매장소가 답했다. 린요는 흥미롭다는 듯 입 꼬리를 끌어올렸다.



“그 상상을 한 번 들어보고 싶구나.”



매장소는 서안 한쪽에 올려둔 찻잔을 들어 목을 축인 뒤, 자신이 생각한 바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저는 활족이 활국 재건의 의지를 버리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얼핏 보기에는 활국 왕족이 나라를 통째로 대량에 갖다 바친 것처럼 보이지만, 당시 그들은 대량과 대유라는 두 강대국에게 화친 요구를 받고 있었고, 마주치기만 하면 으르렁대는 두 나라와 모두 화친을 할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느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한쪽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 뻔했지요. 왕가와 백성 모두를 확실하게 지킬 방도는 그 강대국의 일부가 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타협이지 패배가 아니니 이대로 얌전히 숨죽이고 살아간다는 것은 활족에게는 꽤나 억울한 일일 것입니다. 게다가…….”



매장소가 문서 다발을 뒤적여 어느 한 장의 문서를 펼쳐보였다.



“양제의 후궁이 된 영롱공주를 시작으로 수많은 활족 여인들이 대량 고관대작의 첩실이 되었습니다. 공주를 후궁으로 들인 것은 대유로부터 활족을 안전히 보호할 것이라는 대량 황실의 약속이라 볼 수 있겠으나, 다른 여인들까지 그리 보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습니다. 활족은 예로부터 여인들이 이끌어왔습니다. 사내들이 여인들보다 지위가 높은 대량과는 정 반대이지요. 그것만으로도 활족 여인들에게 대량에서의 새로운 삶은 매우 불편할 것입니다. 헌데, 대량에서도 가장 예와 법도를 중시하는 지체 높은 귀족 사내의 첩실이 된다니요? 활족의 여인들은 매우 영리합니다. 그녀들이 이끌었던 활국은 그 크기에 비해 부유했고, 전쟁을 겪지 않았으니 부를 잃지도 않았습니다. 활족 여인들이 대량 귀족가에 들어가야만 하는 이유가 없습니다. 저는 그녀들에게 무언가 다른 의도가 있다고 생각했고, 그것은 곧 활국 재건을 위한 무언가가 아닐까 했습니다.”



매장소의 의구심은 어린아이의 것이라기에는 매우 날카롭고 성숙했으며, 또한 정확했다. 린요는 어느덧 진지한 낯으로 아이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녀들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일지도 상상해 보았느냐?”



린요가 물었다.



“예. 미인방에 오르는 열 명 중 절반가량은 항상 활족 여인일 정도로 그녀들의 용모가 빼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대량의 고위 귀족 사내들이 아름답고 영리한 활족 첩실의 치마폭에 싸여 황제 앞에 나섰을 때에도 한낱 그녀의 대리인일 뿐이라면, 활족이 대량을 손에 넣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 아닐까요?”



매장소가 답을 마치자 린요는 조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눈꼬리를 부드럽게 휘며 미소를 지었다. 활족 여인들은 경국지색이라는 말에 걸맞은 미모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 미모를 이용해 대량을 차지한다는 계획은 너무 안일한 것이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안일한 계획은 실제로 활족의 현재였다. 랑야각 역시 그간 수집한 정보를 바탕으로 매장소와 같은 추론을 해냈다. 그에 더하여, 린요는 머지않아 활족이 자신들의 계략만으로는 대량과 같은 대국을 무너뜨리기에 무리가 있음을 깨닫고 다른 시도를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그리고,



“하지만 이것으로는 한참 모자랍니다. 대량은 쉬이 무너질 나라가 아니에요. 물론 활족도 쉽게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고요. 후일에는 결국 다른 길을 찾을 것입니다. 이를테면 대유의 힘을 빌리는 것이지요. 영롱공주의 동생인 선기공주의 몸종들이 변장을 하고 대량과 대유의 국경 부근을 자주 오가는 것을 보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매장소도 린요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린요는 이번에는 미소를 짓지 못했다. 그의 낯에는 오로지 놀라움만이 가득했다. 랑야각은 얼핏 아주 사소하고 중요하지 않은 듯 보이는 것들까지 온갖 정보를 모조리 수집한다. 그렇기에 그것을 바탕으로 한 추론은 매우 정확도가 높을 수밖에 없으나, 여기저기 흩어진 그 수많은 정보들 사이의 연관성을 찾아 각각 올바른 자리에 위치시키고, 하나로 엮어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활족의 일은 개중 추론이 쉬운 편이기는 하나, 어디까지나 다른 사안에 비해 난이도가 낮다는 이야기일 뿐, 이 또한 랑야각의 문사 서넛이 머리를 맞대어야 하는 수준은 되었다. 그런 것을 만 여덟 살 된 어린 소년이 홀로 해낸 것이다. 게다가 매장소가 처음 활족에 관한 문서를 읽기 시작한 때부터 지금의 결론을 얻어내기까지 걸린 시일은 사흘 남짓이었다. 린신이 매장소와 같은 나이일 때, 이와 비슷한 수준의 사안을 두고 타당한 추론을 해내기까지 닷새가 걸렸던 것과 비교하여 무려 이틀이나 빠른 것이다.



“하늘이 네게 강건한 육체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 대신 누구보다 비상한 두뇌를 준 듯하구나.”

린요가 매장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매장소는 아낌없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몰라 하며 얼굴을 붉혔다.



이후에도 매장소는 린요와 마주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처럼 서고를 드나드는 각원들에게 여러 가지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곤 했다. 한창 뛰어 놀 나이에 몸이 약해 가만히 앉아 글이나 읽어야 하는 아이가 안쓰러워 말을 걸어왔던 각원들은 매장소와 이야기를 나누고 나면 그 명석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각원들 사이에서 강좌맹 종주의 어린 아들과 랑야각 도련님보다 훨씬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퍼져나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사람이 셋 이상 모이면 어김없이 두 소년이 화두에 올랐고, 어느 아이가 더 뛰어난지에 대한 의견이 오가다가 ‘어찌 되었든 랑야각과 강좌맹 모두 비범한 후계를 두었으니 기쁜 일’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아무리 비범해도 아직 여덟 살밖에 되지 않은 매장소는 자신과 린신 사이에 형성된 미묘한 경쟁 구도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으나, 네 살 위인 린신은 분명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곧 세상에 저보다 잘난 이는 없는 줄로만 알았던 산골 소년이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음을 깨닫는 순간이었고, 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불쾌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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