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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04

희망과 절망






  선계에는 빙속초라는 풀이 있다. 아니, 있다고 전해진다. 태고의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으나, 이미 혼돈으로 돌아간 부신을 제외하면 그 누구도 빙속초를 본 이가 없었기에, 그것이 여전히 존재하는지는 알 수 없다. 기록된 바에 따르면, 빙속초는 본래 독초이나 그 독기를 제거하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영약이 되는 신비로운 풀이었다. 독기를 정화하는 것은 상신에 이를 정도로 강한 신력을 가진 신선만 할 수 있으며, 정화를 마친 빙속초는 그 독기를 정화한 자가 원하는 효험을 지닌 약초가 된다. 그것은 다시 말해, 누군가 빙속초를 찾아 정화하는 데에 성공한다 해도 빙속초를 이용하여 어떠한 증세를 낫게 할 것인지에 관한 명확한 의지가 없으면 기껏 찾은 귀한 약재가 잡초에 지나지 않게 되어버린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언젠가의 밤이었다. 며칠간 앓던 매장소가 말끔히 나아 혈색 좋은 얼굴로 잠들 수 있었던 그 밤, 아우의 곁을 지키던 절안은 기지개를 켜며 도화림으로 나왔다. 자꾸만 술 생각이 나는 것을 떨쳐낼 수 없는 탓이었다. 어린 아우가 병을 달고 살아온 세월은 그가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거의 십만 년이 다 되었고, 최초의 봉황인 절안에게도 그 시간은 결코 짧지 않음에도 매장소를 보며 느끼는 안쓰러움이나 죄책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해가 갈수록 더 짙어지기만 했다. 절안은 도화주 몇 병을 들고 병째로 마시며 십리로 늘어선 나무 사이를 걸었다. 마음이 괴로운 탓인지 술을 들이켜는 속도가 평소보다 빨라, 금세 취기가 올랐다. 매장소의 알을 놓아두었던 오래된 나무가 시야에 비치기 시작했을 즈음, 그는 벌써 꿈을 꾸는 듯 몽롱한 기분이 되어 있었다.


  “응……? 자네, 왜 여기 있나?”


  바로 그 나무 앞에서, 절안은 린신과 마주쳤다. 린신은 제 정인에게 병이 나면 그 병세가 가볍든 무겁든 좀처럼 그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러면 절안은 의원이 제 몸뚱이 아낄 줄 모른다고 나무라며 어떻게든 린신이 휴식을 취하도록 만들곤 했다. 오늘도 그러했다. 그나마 오늘은 저녁께 이미 매장소의 상태가 안정되어 있었기에, 린신은 평소에 비하면 순순히 청구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깊은 밤에 그 린신을 십리도림에서 마주친 것이었다.


  “잠이 오질 않아서.”


  절안은 린신의 답을 듣고는 고개를 젓더니 들고 있던 도화주 한 병을 건넸다.


  “마침 나도 잠이 오질 않아서.”


  두 신선은 술병을 손에 들고 커다란 나무 아래 나란히 앉았다.


  “절안 상신께선 보기 드물게 일찍 취하셨구먼. 홀로 몇 병이나 비웠기에 얼굴이 그리 붉은가?”


  린신이 건네받은 술병의 마개를 열면서 가벼운 투로 말했다. 절안은 나지막이 웃더니 들고 있던 병을 마저 비우고 새 병을 꺼내들었다.


  “조금 전 것까지 겨우 세 병이고, 이게 네 병째야. 달이 밝아서 그런지 오늘은 금세 취하더군.”


  린신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달이라…….”


  오늘 밤은 달이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더욱 새카만 하늘에는 금가루를 뿌려놓은 듯 별들이 가득했다.


  “그렇군. 달이 아주 밝아. 술이 아니라 달빛에 취하셨군.”


  린신이 능청스레 말했다. 절안은 다시금 낮은 소리로 웃었다. 그 뒤로 한동안 바람이 스치는 소리 외에는 아무 것도 들리지 않았다. 두 신선은 어둠이 내려앉은 도화림을 바라보며 묵묵히 술병을 비웠다.


  “절안.”


  정적을 깨뜨린 것은 린신이었다. 그는 세 번째 술병을 집어든 채였다. 그것은 마지막 술병이기도 했다.


  “우리……, 나와 장소가 벌써 9만 살이 넘었어. 10만 살까지 고작 몇 천 년 남았을 뿐이지.”


  절안은 머리 위로 드리워진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저 가지들이 만든 그늘 아래에서 생의 기운을 받고 있던 그 알에서 태어난 작은 봉황이 벌써 10만 살이 다 되어간다고 생각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새삼스레 제 나이가 너무 많다는 생각도 들었다. 기실 이런 생각들보다 먼저 떠오른 것이 있었으나, 절안은 그것을 애써 무시했다. 하지만 린신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절안이 피하고자 하는 바로 그 주제였다.


  “장소는 항상 나보다 훨씬 열심히 수련을 쌓았네. 타고난 신력도 강한 편이지만 더 강해졌어. 몸도 어릴 적에 비하면 많이 좋아졌지. 다만, 신체가 강건해지면 신력도 그만큼 강해져서 여전히 저렇게 앓고 있네. 이대로라면…….”


  린신은 문장을 끝맺는 대신 제 입술을 깨물었다. 매장소의 병증이 깊지 않아 쉬이 안정을 찾은 날이었음에도 린신이 잠을 이루지 못한 이유는 때때로 그를 찾아오는 꿈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영원에 가까운 삶을 마지막까지 매장소와 함께 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그 간절함의 크기만큼 불안감 또한 그의 마음 한쪽 구석에 아주 묵직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불안감은 매장소가 뜨거운 화염에게 삼켜져 새까만 잿더미만 남아버리는 꿈이 되어 린신을 찾아오곤 했던 것이다. 나이가 들고 정겁의 때가 가까워짐을 느낄 때마다 린신은 그 꿈이 현실이 될까 두려워졌다. 그 두려움을 모를 리 없는 절안의 입에서 긴 한숨이 빠져나왔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알겠네. 장소 정도면 적어도 2만 년, 늦어도 3만 년 안에는 비승상신의 기회가 오겠지. 매우 혹독한 정겁을 겪을 테고. 그리고 혹독한 정겁을 겪은 신선은 선계에 돌아온 이후에도 그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해 끝내 혼돈으로 돌아가는 경우가 많아. 멀리 갈 것 없이 장소의 알이 바로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 봉황의 잿더미 위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린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혹 자네에게 어떤 대책이 있는지 묻고 싶어서 말일세. 정겁을 겪은 뒤, 장소가 범계에서의 아픈 기억으로 인해 앓게 된다 해도 살아만 있어준다면 다친 마음은 내가 어떻게든 보듬어줄 수 있네.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장소의 숨이 끊어지는 일이야.”


  린신의 두려움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정겁을 겪고 비승상신 하게 되면 매장소의 신력을 한층 더 강해질 테고, 몸이 그것을 따라가지 못할 것은 자명했다. 그런 상태에서 병을 얻으면 절안이나 린신이 손을 쓸 겨를도 없이 곧장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수도 있었다. 운이 좋아 매장소가 겪을 아픔이 그가 간신히나마 견딜 수 있을 정도의 혹독함이라면 다행이지만, 운이 좋기만을 바라고 있기에는 너무나 위험했다. 절안은 린신의 손에 들려 있는 마지막 술병을 낚아채 자신의 입에 털어 넣었다. 어린 아우의 처지를 생각하고 있자니 속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병을 수직으로 들고 바닥까지 비운 뒤, 소맷자락으로 입가를 훔치자 급속도로 취기가 올라왔다. 그 취기를 쫓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으나 그다지 효과는 없었다.


  “대책이라…….”


  절안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감싼 채 입을 열었다.


  “자네도 그렇겠지만 생각해 본 것은 많아. 허나, 하나같이 쓸모없는 것들뿐이지. 일단 망각수를 준비해놓기는 하겠지만, 기억을 지운다 해도 목숨을 앗아갈 정도의 정신적 고통이라면 그 아픔은 남아. 장소의 알을 남기고 혼돈으로 돌아간 그 아이가 그랬다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범계에서 얼마나 괴로운 삶을 겪든, 돌아왔을 때 그것을 이겨낼 수 있는 몸과 정신을 갖추는 것이지만……. 자네도 알다시피 시간이 많지 않지.”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린신은 나무뿌리 위에 반쯤 누워 보이지 않는 달을 올려다보았다. 매장소의 안위가 마치 그 달과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절안도 같은 자세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다만 과음이 불러온 수마를 이기지 못해, 눈꺼풀은 빠르게 무거워졌다.


  “하나 방법이 있기는 한데…….”
  “뭐?”


  반쯤 잠에 빠진 절안의 목소리가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아, 린신은 귀를 바짝 갖다 대었다.


  “빙속초만 찾을 수 있다면…….”
  “빙속초? 그게 뭔가? 약초 이름인가? 그게 있으면 장소를 지킬 수 있는 건가? 어디에 가면 구할 수 있지?”


  린신이 수도 없이 질문을 쏟아내었지만 어느새 반 이상 잠든 상태인 절안의 귀에는 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




  “으음……?”


  린신은 눈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이기지 못하고 미간을 좁히며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가 눈이 부셔 다시 질끈 감았다. 그렇게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니 밝은 빛에 적응이 되어 점차 시야가 선명해졌다.


  “해가 중천일세. 이제 그만 일어나야지.”


  맑아진 시야에 가장 먼저 비친 것은 고운 정인의 얼굴이었다. 린신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키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가 누워있던 곳은 다름 아닌 매장소의 침소였다.


  “간밤에 절안 형님과 술잔을 기울이다 도화림에서 잠들었다지? 형님께서 자네를 내 곁에 눕혀두셨네.”


  매장소는 찻잔에 따뜻한 차를 채워 린신에게 내밀었다.


  “머리가 깨질 것 같지? 형님마저도 눈가가 퀭했는데, 자네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것 같네만.”


  린신은 한 손으로 관자놀이를 짚으면서도 입술이 귀에 걸릴 듯 웃으며 찻잔을 받아들었다. 기실 숙취는 그다지 심하지 않았으나, 매번 보살핌을 받기만 하다가 모처럼 역으로 린신을 보살펴줄 기회를 얻은 매장소가 은근히 기쁜 기색을 내비치고 있는 까닭에,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헌데, 작일 밤에 형님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기에 그리도 술을 많이 마신 겐가? 자네에게……, 아니, 혹 내게 무슨 문제라도…….”


  매장소의 낯에 순식간에 그림자가 내려앉았다. 린신은 부러 매장소의 물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은 미소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매장소를 안심시켰다. 린신이 웃음을 지어보였다면 매장소는 그가 좋지 못한 상황을 그 웃음으로 가리려 한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오히려 자네가 이리 멀쩡히 나아서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기에 마셨다고 보는 편이 맞네. 근래 밤낮이 바뀐 탓에 잠이 오지 않아 밤마실을 나왔는데, 웬 늙은 봉황 하나가 홀가분한 낯으로 십리도림을 걷고 있지 않겠나. 아우가 이리 기운을 차렸으니 당연한 일이지. 그래서 붙잡아 한 잔 한 것뿐이네.”


  잠이 오지 않았다는 부분을 제외하면 이 이야기는 모두 거짓이었다. 지난 밤, 절안은 무거운 낯으로 술을 들이키며 걷고 있었고, 린신은 악몽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여 심란해진 마음을 달래려 도화림에 온 것이었으니. 하지만 절안도, 린신도 매장소가 이러한 속내를 알아차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이게 어디 한 잔인가? 적당히 하게. 호족이 술에 강하다고는 하나, 과음을 해서 좋을 것은 없잖은가.”


  매장소가 잔뜩 헝클어진 린신의 머리칼을 빗어 내리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 다정한 손길에 린신의 낯에 행복한 미소가 번지는가 싶더니, 이내 그의 입술이 매장소의 입술을 덮쳤다. 갑작스런 입맞춤에 다소 당황하던 매장소도 곧 살며시 눈을 감고 정인의 온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매장소의 두 팔이 린신의 목에 감기며 그의 푸른 소매가 린신의 등과 어깨를 덮었다. 린신은 한 팔로 이 사랑스러운 정인의 허리를 단단히 감아 잡고, 다른 쪽 손으로 그의 뒷덜미를 받쳤다. 자세가 안정되고 몸이 조금 더 가까워지자 입맞춤은 더욱 더 깊어졌다. 린신은 체력이 약한 매장소가 호흡이 달려 미간을 좁히며 제 옷자락을 움켜쥐었을 때에야 접문을 멈추었다.


  “하아…….”


  숨을 고르느라 한동안 매장소의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다. 그리고 이번에는 매장소가 먼저 린신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개었다. 고개가 틀어지며 순식간에 접문의 농도가 다시 짙어졌다. 젖은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고, 부대끼는 소리가 퍽 음란하게 들렸다. 본격적으로 아랫도리가 뜨거워질 즈음,


  “흠, 흠.”


  불청객이 끼어드는 바람에 두 사람의 입술이 떨어졌다.


  “눈치 없는 늙으니 같으니라고…….”


  린신이 문가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매장소는 린신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가 절안과 눈이 마주치고는 양 볼을 홍매화처럼 붉혔다.


  “내가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자네가 생각이 없는 게지. 연인끼리 정을 나누는 것이야 아무래도 좋다만, 지금은 장소가 탕약을 들 시간이라고.”


  성큼성큼 다가온 절안은 들고 온 탕약을 매장소에게 건넸다. 귓바퀴까지 붉게 물들인 매장소는 고개를 제대로 들지도 못한 채 허겁지겁 약사발을 비워냈다.


  “청구 사람들은 전부 나보다 술을 잘 마시는 줄 알았는데, 아닌 경우도 있더군.”


  절안이 의기양양한 낯으로 말했다. 그러자 린신이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내 분명 자네가 먼저 술에 취해 잠드는 꼴을 보았건만! 나는 자네가 잠든 뒤에도 자네 처소에서 도화주 한 병을 더 가져와 깨끗이 비웠네. 아마 내가 그것가지 마시고 잠든 뒤에 자네가 깨어나서 나를 이리 옮겨 놓은 거겠지. 안됐지만 전부 기억하고 있네.”


  팔짱을 끼며 가소롭다는 듯 이야기하던 린신은 문득 무언가를 떠올리고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빙속초가 뭔가? 자네가 잠결에 이야기했는데.”


  린신의 물음에 절안과 매장소가 서로를 쳐다보았다. 절안을 쳐다보는 매장소의 시선에 호기심보다는 놀라움과 의아함이 비치는 것으로 보아, 그 역시 이미 빙속초에 대해 알고 있으며, 절안이 린신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는 듯했다.


  “내가 자네에게 빙속초 이야기를 했다고?”


  절안이 믿을 수 없다는 말투로 되물었다. 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많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고, 그저 그게 있으면―“
  “그렇다면 잊어버리게.”


  절안은 린신의 말허리를 잘랐다. 그는 싸늘하게 식은 낯을 하고 있었다. 동시에 진한 슬픔과 안타까운 마음이 느껴지기도 했다. 린신이 무어라 더 묻기도 전에 절안은 휙 몸을 돌려 매장소의 침소에서 나가버렸다. 린신은 당황스러운 빛이 역력한 얼굴로 매장소를 쳐다보았다. 매장소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형님 말대로 잊어버리게. 빙속초는 존재하지 않는 약초야.”


  그러나 린신이 생각하기에 절안은 아무리 술에 취한 상태였다 해도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을 이가 아니었다.


  “절안은 그것만 있으면 자네의 몸을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했네. 비록 지금은 벗처럼 격의 없이 지내고 있다고는 하나, 저 이는 최초의 봉황이며 부신의 양자인 상고신이고,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이자 내게 의술을 가르쳐 준 스승이기도 하지. 그런 이가 존재하지도 않는 약초를 제가 아끼는 아우를 지킬 희망이라도 되는 양 이야기 할 리가 없잖은가.”


  매장소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존재했던’ 약초일세. 부신께서 직접 적어서 남긴 기록에서만 그 존재를 찾을 수 있네. 기록에는 빙속초는 본래 독초이나, 상신에 이를 정도의 신선이 이를 정화하여 어떠한 병증을 고치고 싶은 것인지에 대한 염원을 담으면 그것을 이루어줄 영약으로 변한다고 되어 있네.”


  린신은 침상을 박차고 일어나 매장소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얼굴은 이제껏 매장소가 보았던 것 중에 가장 밝게 빛나고 있었다. 구태여 말하지 않아도 그것은 희망이 만들어낸 빛이었다. 매장소는 손목을 비틀어 린신의 손아귀에서 제 두 손을 빼내었다.


  “말했잖은가. 빙속초는 이제 존재하지 않네. 과거, 부신께서 발견한 빙속초도 고작 한 뿌리였어. 사해팔황 어디에도 부신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건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뿌리였다고. 아직 남아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매장소는 이미 완전히 체념한 듯 했다. 그러나 린신은 도저히 체념해 버릴 수 없었다.


  “어딘가 또 한 뿌리 정도는 있을 지도 모르지.”


  그렇게 말하며 린신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단단히 말아 쥔 주먹이 반드시 빙속초를 찾아내고야 말겠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듯했다.




***




  매장소가 빙속초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은 그가 린신에게 이야기해 준 것이 전부였고, 이는 모두 절안에게서 전해들은 것이었다. 따라서 린신은 그 이상의 정보를 얻고자 절안을 집요하게 쫓아다녔으나, 절안은 완전히 입을 굳게 다물고 그 어떤 이야기도 해 주려 하지 않았다. 결국 린신이 택할 수 있는 방법은 부신이 남긴 기록을 직접 찾아보는 것뿐이었다. 그는 가장 먼저 의술과 약초에 관해 기록한 것들을 모조리 찾아보고, 그런 다음에는 기행문과 지리서를 살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부신이 지은 시와 이야기, 그리고 절안이 갖고 있던 부신의 일기까지, 린신은 거의 모든 서책과 문서를 샅샅이 뒤졌다. 그러나 석 달간 자는 시간, 먹는 시간은 물론, 매장소과 함께 보내는 시간까지 줄여가며 몰두하였음에도 그는 매장소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 이상은 찾아내지 못했다.


  “부신께서 직접 기록한 것들은 자네와 묵연 상신이 나누어 가졌다고 들었는데, 내가 묵연 상신이 가진 서책들을 살펴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겠나?”


  마지막 서책의 마지막 장까지 모두 읽은 린신은 절안을 찾아가 물었다. 절안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쉬었다.


  “묵연이 가지고 있다 하여 내가 그것들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을 것 같은가? 빙속초에 대해서는 내가 장소에게 이야기해준 것이 전부야.”


  물론 린신도 절안이 이미 자신보다 먼저 모든 기록들을 살폈으리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직접 확인해보고 싶었다. 어쩌면 절안이 놓친 부분이 있지 않을까, 백 번 살펴서 찾지 못했으나 백 한 번 살폈으면 찾을 수 있었던 단서가 있지는 않을까……. 혼돈으로 향하는 화염으로부터 매장소를 확실하게 지켜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기에, 쉬이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곤륜허로 가서 묵연 상신의 제자가 되면 그 분이 갖고 있는 서책들을 읽어볼 기회도 있으려나? 자네는 묵연 상신과 형제로 자랐으니, 그 분께 나를 제자로 받으라고 이야기해 줄 수 있지?”


  절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수련을 하러 가겠다는 거라면 모를까, 그런 이유라면 오히려 절대 제자로 받지 말라고 이야기할 걸세.”


  린신은 그 답변이 불만스러워 뿌득, 이를 갈았다.


  “결국 다 장소를 위한 것인데, 어찌 이리 비협조적인가? 장소는 내 정인이기 이전에 자네가 둘도 없이 아끼는 아우잖나!”


  시선을 내리깐 채 린신이 악을 쓰는 것을 가만히 듣던 절안은 무언가 결심한 듯한 눈빛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린신의 팔을 있는 힘껏 잡아끌었다.


  “따라와. 그리 알고 싶다면 전부 알려주지.”


  절안은 그대로 신력을 써서 어떠한 산의 정상 부근으로 이동했다. 대체 그 산이 어디에 있는 어떤 산인지, 린신은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 절안만큼 오래 산 것은 아니지만 린신 역시 10만 년 가까이 살아왔으니 사해팔황에 모르는 곳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생경한 풍경이었던 것이다.


  “자네, 부려산이라고 들어봤지? 부신의 일기를 보았다면 알 터인데.”


  절안이 말했다. 린신은 기억을 더듬어 부신의 일기에서 부려산이 언급된 부분을 떠올렸다.


  “귀애하던 야생여우가 요괴가 되어, 부신께서 차마 죽이지 못하시고 부려산에 봉인하셨다 들었네. 내 10만 년 가까이 살면서 부려산이라는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어, 지금은 사라진 산이거나 다른 이름이 되었을 것이라 생각했네만……. 혹 이곳이 부려산인가?”


  절안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앞장서서 정상으로 향했다. 그를 따라 정상에 오른 린신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저도 모르게 한 발 물러섰다. 부려산의 정상은 화산처럼 커다란 구멍이 나 있었으나, 그것은 분화구가 아니었다. 그 구멍은 산 안쪽의 동굴처럼 보이는 공간으로 통하는 입구로, 아주 강한 결계로 막혀있었다. 결계 너머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갇혀있었는데, 구미호와 비슷한 형상을 하고 있었으나, 꼬리만 아홉 개인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아홉 개인 기이한 모양새였다. 그 기괴한 짐승은 절안을 보더니 위협적으로 포효하며 입구 쪽으로 몸을 날렸다. 하지만 단단한 결계에 부딪쳐 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저것이 그 일기 속의 여우일세. 이름은 농질이라 하지.”


  절안은 저를 향해 달려들었다가 바닥에 처박히기를 반복하는 괴상한 모습의 여우를 바라보며 쓸쓸하게 말했다.


  “부신께는 굉장히 슬픈 일이었기에 일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는 않을 걸세. 그보다 이전에 저 아이에 대해 적었던 글들도 거의 다 태워버리셨으니 다른 기록은 남아있지 않고. 몸이 약해 무리에서 버려진 야생여우를 부신께서 우연히 발견하여 데려오셨는데, 그 때 그 여우에게 먹인 것이 빙속초였네. 그리고 빙속초가 어여뻤던 아이를 이 꼴로 만들었지. 내가 어릴 적, 저 아이를 보고 여우의 아름다움을 깨달았다면 믿을 수 있겠나?”


  린신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소매 안쪽으로 팔짱을 질렀다. 하지만 흔들리는 눈동자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절안은 그런 린신을 흘끗 돌아보고는 말을 이었다.


  “물론 저것이 빙속초의 부작용이냐 하면 다행히 그런 것은 아닐세. 빙속초 자체는 아무런 부작용도 일으키지 않았어. 다만, 부신께서 약한 몸을 낫게 해 주고 귀애하였더니 농질은 제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더욱 사랑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 모양이야. 수련을 통해 강해지는 것이 한계에 도달하니, 마족의 사술까지 사용해서 힘을 키우려 했네. 그러다 저 꼴이 되었지. 그 뒤는 일기 내용대로일세. 부려산 자체가 결계로 둘러싸여 있기에 나나 묵연처럼 그 위치를 정확히 아는 이들이 아니고서는 이곳에 산이 있다는 것조차 알 수 없네. 그 탓에 후대에 이 산의 존재가 전해지지 않아, 자네도 부려산이라는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게야.”


  린신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장소는 어리석은 여우와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때문에 드는 의문도 있었다. 절안도 제 아우가 그 누구보다도 현명하다는 것을 알고 있건만, 어째서 여기로 데려와 저 멍청한 여우를 보여준 것일까. 그 의문에 대한 답은 이어지는 이야기에 있었다.


  “헌데, 요괴가 되어버린 농질이 갇혀있는 저 곳이 사해팔황에서 유일하게 빙속초가 자라는 곳일세.”
  “뭐?!”


  린신은 구멍에 바짝 다가서서 안쪽을 살펴보았다. 한쪽 구석, 물이 고여 작은 연못을 이룬 곳에 이끼처럼 나 있는 풀 무리가 보였다. 그 외에는 풀처럼 생긴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으므로, 그것이 빙속초임에 틀림없었다. 악몽이 아니라 희망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다만, 여전히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절안이 빙속초의 존재를 알면서도 손을 쓰지 않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그럼 자네는 빙속초가 여기에 있다는 걸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절안, 최초의 봉황인 자네조차도 저 놈을 어찌 하지는 못하는 겐가?”


  절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 상신에 이르지 못한 자네라면 힘들겠지만 내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네. 문제는 농질이 아니라 결계일세. 산 전체를 둘러싼 결계는 단지 산의 존재를 가리고 있는 것뿐이라 안팎으로 드나드는 것이 가능하지만, 산 정상의 구멍을 막고 있는 결계는 한 번 안으로 들어가면 다신 나올 수 없어. 이 결계를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이는 오로지 부신뿐일세. 부신께서 혼돈으로 돌아간 지금, 저 안에 들어가 빙속초를 취하여 다시 바깥으로 나올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는 것이지. 그러니 빙속초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약초인 게야.”


  린신이 간신히 찾은 희망은 순식간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그는 주저앉아 눈물을 쏟아내었다. 철없던 어린 시절,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너무나 원망스러웠다. 그 날, 십리도림을 찾아가지 않았더라면, 붉은 빛의 돌에 관심을 두지 않았더라면, 어설프게 사고를 수습해 보겠다고 천도복숭아의 과즙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그러나 이제와 후회한들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지금 당장 린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자신의 흐느낌으로 농질의 포효를 집어삼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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