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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호가 필모른 배포전 <호우주의보> 우5 [호우시절] 부스에서 뵙겠습니다.







  "뭐?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안돼."



  주 교수는 어이없다는 듯 눈썹을 꿈틀거리며 말했다. 그 목소리가 매우 단호하여, 린신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하고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저씨, 그러지 말고 한 번만요. 네?"

  "어허."



  소맷자락을 붙잡고 답지 않게 살랑살랑 애교까지 부려가며 말해 보았지만 주 교수는 완강했다.



  "게다가 아저씨? 학생으로서 교수를 찾아온 거 아니었냐?"



  주 교수의 지적에, 린신은 곧장 한 발 물러서 정자세로 섰다.



  "부탁드립니다, 교수님!"



  단숨에 태도를 바꾸어 90도로 허리를 숙이는 린신을 보며, 주 교수는 헛웃음을 지었다.



  "이 녀석아, 첫 수업을 한 지가 벌써 한 달이나 지났다! 과제 파트너가 마음에 안 들었으면 그 때 얘기를 했어야지! 생각을 해 봐라, 신아. 전부 다 파트너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너 하나만 바꿔줄 수 있겠어?"



  린신은 아침 일찍부터 사학과 주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와, 과제 파트너를 변경해 달라는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매장소와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서는 제대로 과제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주 교수는 그 요청을 받아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럼 저는 혼자 할게요. 그것 때문에 제 과제만 형편 없는 꼴이 된다면 그냥 점수 깎으세요. 전 정말로 괜찮아요. 학점 좀 깎이는 게 나아요. 그 녀석하고는 절대로 같이 못 해요! 그러니까 제발요, 아저ㅆ……, 아니, 교수님."



  린신의 목소리는 애원에 가까운 수준이 되었다. 주 교수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신아. 네가 자꾸 이러니까 네 아버지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게 아니냐."



  린 원장이 언급되자, 린신은 입술을 삐죽이며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 얘기는 갑자기 왜 나와요?"



  주 교수의 입에서 또 다시 한숨이 새었다.



  "네 이런 행동이 요즘 네 아버지의 가장 큰 걱정거리라는 얘기다. 이렇게나 사회성이 모자라서야……."



  주 교수가 쯧쯧 혀를 찼다. 린신은 무어라 대꾸를 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는 이제껏 딱히 타인에게 관심을 갖지 않고 살아왔기에 누군가를 특별히 좋아해본 적도, 싫어했던 적도 없었다. 즉, 매장소는 '사람'으로서는 처음으로 린신의 관심사가 된 셈인데, 그 첫 관심은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렇다 보니 사회성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에 차마 반박을 할 수가 없었다.



  "그게 아니더라도, 같은 의대생이 아니면 시간을 맞추기가 힘들 게다. 그러니 요청은 전부 기각이야. 어서 수업이나 들어가!"



  주 교수는 연구실 밖으로 린신의 등을 떠밀었다. 린신은 쫓겨나는 기분으로 연구실에서 나와야 했다. 굳게 닫힌 연구실 문을 보고 있자니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었다. 아침 첫 수업이 시작되기까지 겨우 15분 정도 남았으니, 의대 학과동까지 이동하는 시간을 생각하면 더 매달려 볼 여유도 없었다.



  '어떻게든 되겠지. 지금은 퀴즈나 신경 쓰자.'



  결국 린신은 아무런 소득도 없이 걸음을 돌려야 했다.








***








  "평소에 공부 해뒀으면 어렵지 않다더니!"



  북적거리는 점심시간의 학생 식당에서 빈 자리를 찾아 앉자마자 양광이 탄식조로 말했다. 언제나처럼 린신과 그 무리들은 한데 모여 앉은 채였다. 주홍진은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양광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장환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으나, 그것은 퀴즈를 절반도 제대로 풀지 못한 것에 충격을 받아, 주변에서 하는 말이 아예 들리지 않는 탓이었다. 얼굴이 좋지 못한 것은 린신도 마찬가지였다.



  "넌 만점 받은 놈이 표정이 왜 그래?"



  양광은 그런 린신이 못마땅하여 짜증스럽게 물었다.



  "그러게? 야, 넌 양심적으로 얼굴 좀 펴야 하는 거 아니냐?"



  주홍진도 거들었다. 장환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으나, 린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결코 곱지는 못했다.



  "닥치고 밥이나 먹지?"



  린신이 그들을 차례대로 노려보며 조용히 말했다. 차분하지만 한겨울 칼바람보다 차갑고 날이 서 있는 목소리였기에 세 사람은 황급히 밥그릇으로 시선을 돌렸다.


  퀴즈에서 만점을 받고도 린신의 기분이 좋지 못한 것은 역시나 매장소 때문이었다. 퀴즈는 수업을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진행되었다. 양광의 말처럼, 대부분의 학생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문제의 난이도가 높았다. 문제지가 배포된 직후, 강의실 여기저기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을 정도였다. 개강 첫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빼놓지 않고 전공 공부를 꼼꼼히 해온 것은 물론, 전날에는 평소보다 더 전공 공부에 매진했던 린신에게도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 그래도 그는 마지막 문제까지 정답을 확신하며 모두 풀어 내었다. 린신은 뿌듯하게 펜을 내려놓고 슬쩍 눈동자를 굴려 매장소 쪽을 살폈다. 매장소도 문제를 다 풀었는지 펜을 놓은 채 눈으로만 자신이 적은 답을 훑어보는 중이었다. 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는데, 린신은 그 미소에서 흘러 넘치는 여유를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정해진 시간이 다 되자, 교수는 답안지를 걷어 조교에게 넘기고 수업을 이어나갔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기 직전, 조교가 채점이 완료된 답안지를 교수에게 전달했고, 학생들은 자신의 점수를 바로 확인할 수 있었다.



  "혹시 다 맞은 사람 있나?"



  교수가 강의실을 뒤쪽부터 둘러보며 물었다. 손을 드는 학생이 눈에 띄지 않았다. 그는 맨 앞줄까지 시선을 옮긴 다음에야 만점을 받은 학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만점자는 맨 앞 가운데 책상의 양 끝에 앉은 두 사람, 린신과 매장소뿐이었다.



  "그렇지! 만점이 아무도 없을 리가 없지!"



  교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매장소는 쑥스러운지 얼굴을 살짝 붉히며 웃었다. 하지만 린신은 웃을 수 없었다. 전날 도서관 폐관 시간까지 전공책만 보았던 자신과는 달리, 매장소는 내내 역사서만 들춰보고 있었던 것을 아는 탓이었다.



  "역시 수석과 차석은 뭔가 다르군! 여러분들도 이 두 학생을 본받도록 하세요."



  입학식 때 신입생 선서를 했기 때문에, 매장소가 수석 입학생이라는 건 동기들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하지만 린신이 차석이라는 것은 그가 직접 떠벌리지 않는 한 알려질 방법이 없었다. 사실, 린신 스스로도 린 원장이 아니었다면 자신의 입학 성적을 알 수 없었을 터였다.



  "쟤가 차석이었어?"

  "그런가 봐. 수석과 차석이라잖아."

  "역시 보통은 아니었네, 저 녀석도. 하긴, 린 원장 아들이랬지."



  뒤쪽에서 목소리를 낮춰 수군거리는 것이 린신의 귀에도 닿았다. 감탄이 묻어 있는 목소리이긴 했지만, 린신에게는 '린 원장의 아들임에도 수석을 차지하지 못하고 차석에 머문' 자신의 처지를 다시금 인지하게 만드는 이야기일 뿐이었다. 퀴즈 점수는 똑같이 만점이었지만, 만점을 받기까지의 과정까지 살펴본다면 이번에도 그는 이번에도 매장소에게 뒤쳐진 셈이었다.


  린신 때문에 찬물 끼얹은 듯 분위기가 가라앉은 점심 식사 자리는 매장소의 등장으로 아예 꽁꽁 얼어붙어 버렸다. 여러 명의 동기들에게 둘러싸여 학생 식당에 들어선 매장소가 그들 모두를 뒤로하고 비어 있던 린신의 맞은 편 자리에 앉은 것이었다. 린신은 물론이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던 세 사람 역시 매장소를 싫어한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니 분위기가 나빠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 먼저 간다."



  장환은 매장소가 자리에 앉자마자 탁 소리가 나게 수저를 내려놓고 아직 반도 비우지 못한 그릇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양광과 주홍진은 자리를 뜨지는 않았지만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매장소를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반면, 린신은 제 바로 앞에 앉은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식사에 열중했다. 매장소는 자신을 노려보는 두 사람을 무표정한 얼굴로 쳐다보다가 보일 듯 말 듯하게 한쪽 입 꼬리를 살짝 말아 올렸다. 그리고는 금세 언제 그랬냐는 듯 선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린신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양광과 주홍진은 대놓고 자신들을 무시하더니 순식간에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무해한 사람인 것처럼 미소 짓는 매장소의 두 얼굴에 입이 떡 벌어졌다. 두 사람은 결국 못 견디겠다는 표정으로 자리를 피했다. 매장소의 미소에 흡족한 감정이 더해졌다.


  매장소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린신을 바라보기만 할 뿐, 무어라 말을 걸지는 않았다. 린신 역시 매장소에게 잠시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대화가 시작된 것은 린신이 식사를 거의 다 마쳤을 즈음이었다. 그런데 먼저 말을 건 쪽은 의외로 린신이었다.



  "점심 안 먹어?"



  그는 매장소의 앞에 음식이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그제야 발견하고는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린신이 먼저 말을 걸어올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는지, 매장소는 다소 놀란 듯했다. 그리고는 다시 웃는 얼굴로 돌아와 답했다.



  "별로 배가 안 고파서."



  매장소의 답에는 '너를 보고 있으니까'라는 어구가 생략되어 있었지만, 린신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넌 의사가 되겠다는 놈이……."



  린신은 무엇이 못마땅한지 팔짱을 낀 채 혀를 찼다. 매장소는 의문이 가득 담긴 시선을 보내며 눈을 끔벅였다. 린신의 입에서 한숨이 떨어졌다. 그 모습이 그 옛날과 꼭 같아, 매장소의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제 시간에 제대로 챙겨 먹는 게 건강 관리의 시작이야. 키만 컸지 비쩍 말라서 안 그래도 비실비실 해 보이는 게……. 의사라면 스스로 환자가 되지 않도록 자기 건강은 자기가 챙겨야지.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좀 하면서 체력도 기르고. 마음가짐부터가 글렀잖아."



  린신이 말을 마치자, 둘 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매장소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진동했다. 린신은 자신이 갑작스레 몰아붙이듯 이야기하는 바람에 그가 당황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됐다……. 내가 괜한 참견을 했어. 네가 알아서 잘 할 텐데, 뭐. 그래서, 용건이 뭐야?"

  "아!"



  매장소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두 손을 맞부딪쳤다.



  "이제 슬슬 교양 과제를 해야 하지 않나 싶어서."



  린신은 퀴즈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아침의 일을 떠올렸다. 주 교수는 절대 과제 파트너를 바꿔준다거나 과제를 혼자 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을 터였다. 게다가 그 배경에 린 원장의 염려가 깔려 있었으니, 기적적으로 주 교수가 마음을 돌려준다 해도 이젠 린신이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결국 매장소와 함께 하는 것이 유일한 길인 셈이었다.



  "내일 수업 끝나고 시간 괜찮아?"



  매장소가 물었다. 의대는 전공 수업 시간표가 정해져 있었고, 두 사람은 딱 하나 듣는 교양 수업마저도 같은 과목이어서 모든 일정이 완벽하게 같았다. 그리고 내일은 세 시 이후로는 수업이 없었다.



  "과제 하는 데 얼마나 걸릴 지 모르니까 전공 공부부터 해 놓고 보는 게 낫겠지? 저녁 먹고 일곱 시 어때?"



  린신이 답을 내놓는 데에 뜸을 들이자, 매장소가 재차 덧붙여 물었다. 린신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렇게나 불친절하게 대하는데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매장소의 입가에선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매장소는 거의 모든 이들을 웃는 얼굴로 대했지만 대부분 예의상 짓는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린신은 그가 자신을 향해 지어 보이는 미소에서 진심을 느꼈다. 그래서 매번 고개를 돌려버리고 마는 것이었다.



  '또 나만 나쁜 놈이 된 기분…….'



  기분이 좋지 않았다. 린신은 제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문이 담긴 매장소의 시선이 따라왔다.



  "용건 다 끝난 거지?"



  린신은 매장소의 답은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다 먹은 그릇을 들고 곧장 식기 반납대로 향했다. 매장소는 자리에 앉은 채로 눈으로만 그의 뒷모습을 쫓았다. 아쉬운 빛이 더해지기는 하였으나, 그는 여전히 진심으로 기쁘게 웃고 있었다.








***








  집에 도착하자마자 매장소는 현관문에 기대어 그대로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려 집 안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커녕 제자리에 서 있는 것도 불가능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린신을 만나고 돌아오면 항상 이러했다. 린신이 저를 싫어하는 것을 벌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대놓고 싫어하는 티를 내는 그에게 지속적으로 호감을 나타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루 종일 그를 보며 진심을 담아 웃어 보이는 일은 매우 많은 에너지를 요구했다. 적정 수준 이상으로 기력을 소비한 몸을 회복시키기 위해 학교를 가지 않는 주말 이틀 중 하루는 거의 잠으로만 보내야 할 정도였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 벌이라 할 수 있지. 그래도 매일 마주치니까 좋은 일도 있고.'



  매장소는 점심 시간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키만 컸지 비쩍 말라서 안 그래도 비실비실 해 보이는 게……. 의사라면 스스로 환자가 되지 않도록 자기 건강은 자기가 챙겨야지. 잘 먹고, 잘 자고, 운동도 좀 하면서 체력도 기르고.'



  그 말을 할 때의 린신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지독한 독을 몸 안에 쌓아두고 살면서도 조심성 없이 찬바람을 맞고 돌아다닌다거나 쉬지 않고 일을 한다거나 할 때마다 그는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잔소리를 해대곤 했었다. 매장소는 린신의 그런 면을 좋아했다. 그 모든 말들은 그의 다정한 성정에서 기인한 것이었기에.



  '내 자네에게 누누이 말하지 않았는가? 자네 몸은 예전과 달라! 각별히 주의해야 한다는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게지. 약사발 깨끗이 비우게. 자그마한 약재 찌꺼기 하나까지도 전부. 그러게 처음부터 신경 써서 몸 관리를 했으면 이런 쓴 탕약은 먹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오래 전 어느 날, 앓아 누운 제 옆에 앉아 팔짱을 낀 채로 타박을 해대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하게 울려, 매장소는 낮은 소리로 쿡쿡 웃었다. 그러나 웃음소리는 금세 사그라졌고, 얼굴에는 다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정말 생각이 없네, 나……. 즐거워할 자격 따위 없는데."



  문득 이번 생이 벌이었음을 떠올린 것이다.



  "그래도, 린신. 진이 다 빠지는 일이긴 해도 나는 역시 자네를 보는 것이 좋아. 속도 없이 기쁘다네. 하늘이 내게 이 얼굴과 이 이름을 다시 주고도 자네를 주지 않았다면, 그건 더 심한 벌이었을 게야. 그래도 내 지난 생에 아주 조금은 잘한 일이 있는 모양이지."



  내일은 교양 과제를 핑계로 린신과 더 오래 마주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이 아무렇게나 늘어진 다리에 힘을 불어넣었다. 매장소는 끙,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 보니……."



  하지만 잠시 돌아왔던 힘은 다시 서서히 빠져나갔다. 교양 과제에 대해 생각하다 보니 집에 돌아오기 전, 주 교수를 만났던 일까지 떠오른 탓이었다.








***








  지난 생에서 매장소는 오랜 벗인 소경염의 손에 천하를 쥐어주었으나, 그의 천하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지켜볼 새도 없이 눈을 감아야 했다. 소경염 치하의 대량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꿈꾸던 그 모습이었을까? 소경염이라면 분명 잘 해냈으리라 확신했지만, 그 확신과는 별개로, 매장소는 그의 날들이 어떤 빛깔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전생에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해낸 뒤부터 틈이 날 때마다 그 즈음의 역사 기록을 찾아보았지만 큰 소득은 없었다. 너무나 오랜 세월이 지났고, 기나긴 역사에 비하자면 소경염이 황좌에 머물렀던 기간은 찰나에 지나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매장소의 궁금증이 사라질 리 없었다.


  매장소가 중세 중국사 수업을 신청하게 된 배경이 바로 그것이었다. 주 교수는, 그가 맡은 강의가 무엇인지 보면 알 수 있듯, 주로 중국의 중세사를 연구하고 있었다. 역사 속에 대량이 머물렀던 시기는 중세에 속했으니 매장소로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대학 도서관에는 밖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서적과 논문도 잔뜩 있었기에 매장소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만들어낸 역사를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대량을 중심으로 대유, 북연, 남초를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서로 경쟁하던 그 시기는 아무래도 전쟁이 잦았던 탓에 사료가 많이 남지 않은 모양이었다. 몇몇 자료에 기왕 소경우와 적염군이 모함을 당하여 억울하게 몰락한 이야기, 헌왕 소경선과 예왕 소경환의 대립, 최후의 승리자인 정왕 소경염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기는 했지만, 그것은 아직 매장소가 세상을 떠나기 전의 일들이었다. 린신이 도서관에서 매장소를 발견했을 때, 매장소가 보고 있던 역사서와 논문이 바로 그 자료들이었다. 그것들을 전부 빠짐없이 확인한 매장소는 그저 적염군 사건의 진실에 관련된 기록이 후대까지 무사히 전해졌음을 확인한 것에서 만족해야 했다.


  그래서 이번에는 주 교수를 직접 찾아갔다. 그라면 아직 대외적으로 발표되지 않은 논문이나 출판되기 전의 서적 같은 것을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였다.



  "흐음……. 그 즈음의 역사를 알고 싶어하는 학생은 사학과에서도 거의 못 봤는데, 의대생인 매장소 군이 관심을 갖고 있다니 좀 놀랐어요."



  주 교수가 매장소에게 방금 내린 따뜻한 커피가 든 머그컵을 건네며 말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 연구자들도 아직 그 시기에 대해 아는 것은 많지 않아요. 매장소 군이 본 책이나 논문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과 현재 진행 중인 연구 사이에 의미 있는 차이가 없어요."



  매장소는 시선을 떨구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매장소 군은 그 비어 있는 역사가 어떤 내용으로 채워지기를 바라나요?"



  주 교수는 일부러 찾아온 학생에게 실망만 남길 수 없다는 생각에 얼른 덧붙여 물었다. 그 물음에 다시 고개를 든 매장소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서 열 아홉 소년의 것이라 보기 어려울 정도의 깊이가 느껴졌다. 주 교수는 겉보기엔 그저 앳되고 예쁘장한 이 학생의 내면은 생각보다 어른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기가 대량의 전성기였기를 바랍니다."



  매장소는 딱 먹기 좋을 정도로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신 뒤 말을 이었다.



  "이후의 역사를 보면 결국 대량은 몰락의 길을 걸었지만, 그 시기에는, 황제 소경염이 황위에 앉아 있던 그 때에는 대량의 몰락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기를 바랍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매장소가 가방과 외투를 챙겨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주 교수는 무언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매장소의 시선이 다시 그를 향하였다.



  "아, 이건 다른 이야기이긴 한데, 신이 녀석 때문에요."

  "신이라면……, 린신 말씀이십니까?"



  주 교수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장소는 얼른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실은, 그 녀석이 오늘 아침에 날 찾아와서 과제 파트너를 변경해 달라고 했어요. 안 된다고 얘기하긴 했지만."



  어느새 주 교수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매장소 군은 의대 수석 입학생이죠?"



  매장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신이는 매장소 군을 시기하고 있죠?"

  "예?"



  놀란 듯 반문하는 매장소 때문에 놀란 것은 오히려 주 교수였다. 수재들만 모이는 의대에 당당히 수석으로 입학할 정도로 영리한 학생이 저를 시기하는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눈치가 없을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린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매장소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대가 린신이었기에, 매장소는 지난 생에 그에게 지은 죄에 대한 대가라는 생각 외에는 할 수가 없었다.



  "몰랐어요?"



  주 교수의 질문에 매장소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싫어하는 줄은 알았지만……."



  주 교수는 다시 깊은 한숨을 뱉었다.



  "매장소 군이 그 애를 이해해 주었으면 해요. 실은, 신이 아버지가 내 오랜 친구에요. 그래서 신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까이서 봐왔거든요. 타고난 심성은 착하고 다정한 아이인데, 주변 환경이 마냥 좋지만은 않아서……."



  주 교수는 매장소에게 린신의 성장 배경을 이야기해 주었다. 손자를 그의 아버지이자 자신의 훌륭한 아들과 비교하는 조부와 린 원장을 존경하는 이들의 기대 어린 시선에 의해 항상 과거의 아버지와 경쟁하며 살아온 이 생의 린신을, 매장소는 비로소 알게 된 것이었다.



  "이제까진 그럭저럭 제 아버지하고 비슷하거나 때로는 더 나은 성과를 내면서 살아왔는데, 대학에 입학하는 순간, 처음으로 실패한 거에요. 린 원장은 입학할 때부터 졸업할 때까지 줄곧 수석이었거든. 사실, 차석 입학도 대단한 건데, 신이 녀석 기준에 못 미칠 뿐이죠. 아무튼, 매장소 군은 본의 아니게 신이에게 첫 실패를 안겨준 사람이 된 거에요. 그 녀석, 참 유치하죠? 아직 덜 자라서 그래요.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었다는 걸 깨닫겠죠. 두 사람, 같은 과 동기이고 내 수업 과제도 함께 하게 되었으니, 어쩌면 신이가 어른스러운 매장소 군에게서 무언가 배우게 될 지도 모르겠어요. 그 애를 잘 부탁해요. 린 원장 대신 내가 부탁 좀 할게요."








***








  매장소는 침대 위로 쓰러지듯 엎어져 누웠다. 주 교수를 찾아간 것은 황제 소경염에 대해 묻기 위해서였는데, 정작 알게 된 것은 린신에 대한 것들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나를 싫어하는 거라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대로 미움 받는 것 말고는 없는 거잖아……."



  주 교수의 말처럼 시간만이 린신의 괴로움을 지워낼 수 있었다. 그의 경쟁 상대는 젊은 시절의 아버지였고, 이미 한 번 수석을 놓친 것으로 그는 영영 대학 시절의 아버지를 이길 수 없게 되었다. 지금부터 졸업할 때까지 계속 수석을 차지한다 해도 한 번이 모자란 것은 변함 없을 테니.



  "하하……."



  매장소가 허탈한 웃음을 뱉었다.



  "생을 건너 왔는데도 변한 게 없어. 그 때나 지금이나 결국 매장소의 존재는 자네에게 걸림돌일 뿐이야. 미안……, 미안해, 린신……."



  린신에게 닿을 리 없는 사죄의 말을 거듭 내뱉으며 매장소는 조용히 눈물지었다. 그와 동시에 아무래도 린신이 전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다는 확신이 들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지난 생, 홀로 남겨진 린신이 얼마나 아파하고, 언제까지 슬퍼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아픔과 슬픔이 매우 거대했으리라는 것은 구태여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몇 번을 거듭 생각해도 린신이 전생을 떠올리는 것은, 그를 위해 좋지 못했다. 그것 하나만은 다행이었다.



  "린신, 부디 앞으로도 계속 기억하지 못하는 채로 나를 미워하게.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나의 이번 생은 벌이 맞는 듯 하니……. 모든 것은 내 탓이야. 내 탓……."



   그 날, 창 밖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올 때까지 매장소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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