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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12일, 호가 필모른 배포전 <호우주의보> 우5 [호우시절] 부스에서 뵙겠습니다.







  넓은 강의실에는 서너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긴 책상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마음에 드는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고 앉았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 잘 하는 학생들만 모인 의대라고 해도 맨 앞줄 가운데 자리는 부담스러운 모양인지, 아무도 그 자리에는 앉으려 하지 않았다. 두 번째 줄 역시 가운데는 비워진 채였고, 그나마 양 사이드에는 서너 명 정도의 학생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강의 시작 5분 전 즈음 강의실에 들어선 매장소는 주저 없이 비어있는 맨 앞 가운데 자리로 향했다. 그것은 이제까지 그가 해온 노력과 맥을 같이하는 행동이었다. 전생의 그는 뛰어난 타고난 무인이면서 출중한 두뇌까지 지니고 있어 문무에 두루 뛰어났지만, 무예와 학문 사이의 호불호를 따지자면 무예를 닦는 쪽을 더 선호했다. 이번 생에도 전생과 마찬가지로 그의 두뇌는 날 때부터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고, 다만, 옛 기억을 떠올린 뒤로는 그 때와는 달리 오로지 공부에만 매진했다. 의대 진학을 위해서였다. 지난 생에서는 지독한 불치병으로 의원인 연인을 괴롭혔으니, 이번 생에는 의사가 되어 그 때의 저처럼 몹쓸 병을 앓는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사는 것 역시 속죄의 한 가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중의학에 대한 관심 역시 그 때문이었다. 그 옛날은 아직 양의학이 들어오기 한참 전이었으니, 당연히 매장소의 기억 속 린신도 중의사일 수밖에 없었고, 매장소는 그처럼 되고자 했던 것이다.


  매장소는 긴 책상의 왼쪽 끝 자리에 앉아, 등에 메고 있던 커다란 백팩을 비어있는 옆자리 의자 위에 올려놓고 책과 노트, 필기구를 꺼냈다. 그리고 잠시 뒤, 강의 시작 직전에 도착한 린신도 망설임 없이 강의실 맨 앞 가운데 자리로 향했다. 그는 매장소가 먼저 와 앉아있는 것을 보고는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며 기다란 책상의 오른쪽 끝으로 가 자리를 잡았다.



  "어제 잘 들어갔어?"



  매장소는 린신을 향해 활짝 웃어 보이며 물었다. 저를 싫어한다는 사람에게 지어 보일 수 있는 표정은 결코 아니었다. 린신은 매장소의 웃는 얼굴이 예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동시에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어제 술 많이 마시는 것 같던데……."



  그런 차가운 대우에도 불구하고 매장소는 가방에서 숙취 해소 음료를 꺼내 린신에게 건넸다. 그를 위해 준비한 것이기는 하지만 전해줄 기회가 있으리라고는 장담하지 못했기에, 운이 좋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거, 다들 효과가 좋다고 하더라고."



  하지만 린신은 매장소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정면만 응시했다. 다시 한 번 권하는 말을 하려는데, 때마침 수업 담당 교수가 강의실에 들어섰고, 매장소는 손에 들고 있던 음료수를 린신이 앉은 자리 가까이에 올려놓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끝내 그 음료수에 린신의 손이 닿는 일은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설 때까지 음료수는 처음 상태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내가 주는 거라서 안 받는 건지, 성격이 변한 건지…….'



  매장소는 음료수를 다시 가방에 챙겨 넣으면서 무겁게 한숨을 내쉬었다.


  비슷한 상황은 모든 전공 수업에서 반복되었다. 매장소는 어떤 수업에서든 강의실에 들어서는 대로 망설이지 않고 맨 앞 가운데 자리로 향했고, 린신도 매번 불쾌한 감정을 드러내면서도 그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매장소는 틈틈이 린신을 쳐다보고, 린신은 결코 매장소 쪽으로 눈길을 주지 않는 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개강 첫 날의 마지막 수업에서 한 번, 두 사람이 눈을 마주치는 일이 있기는 했다.



  "아."



  필기에 열중하던 매장소는 펜을 다른 것으로 바꿔 잡으려다가 책상 아래로 떨어뜨렸는데, 하필이면 린신이 앉아 있는 쪽으로 굴러가 버렸다. 종일 나란히 앉아 수업을 들었음에도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던 린신이기에, 매장소는 차마 주워달라고 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다른 펜을 꺼내려고 필통을 뒤적거리고 있는데, 방금 전에 떨어뜨린 펜이 눈 앞에 불쑥 나타났다. 여전히 시선은 정면에 둔 채였지만, 린신이 펜을 주워서 매장소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 펜이 매장소의 것임을 잊고 무심결에 주운 듯했다. 뜻밖의 상황에 매장소는 그것을 선뜻 받아 들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러자 매장소가 알아차리지 못했다고 생각한 린신이 슬쩍 고개를 돌렸고, 비로소 두 사람의 시선이 서로 맞닿았다.



  "……고마워."



  그제야 매장소는 펜을 받아 들었다. 린신은 말없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는 긴 머리카락이 얼굴을 가려주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으로 보아, 분명 붉게 상기되어 있을 터였다. 매장소가 안경을 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안경은 또 왜……!!'



  린신은 속으로 절규했다. 안 그래도 매장소의 외모에 끌리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울 지경인데, 안경을 쓴 매장소는 맨 얼굴하고는 또 다른 매력이 있어, 마음을 어지럽게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사실, 매장소는 매번 안경을 쓰고 수업을 들었다. 일상 생활에 지장 없는 수준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시력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이다. 린신이 매장소 쪽으로는 잠시도 눈길을 주지 않아 이제야 그 모습을 보게 된 것뿐이었다. 수업에 집중하는 사이 잠잠해졌던 불쾌감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하여간 마음에 안 들어, 저 자식.'



  린신은 애꿎은 펜과 공책에 화풀이 하듯 한껏 힘을 주어 필기를 했다. 수업이 끝났을 때, 그의 펜은 더 이상 쓸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








  개강 후 2, 3일 정도 지나자, 의대 신입생들은 크게 두 분류로 나뉘어졌다. 매장소를 좋아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었다. 대부분은 전자에 속했고, 후자에 속하는 이들 중에서도 매장소를 싫어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린신을 포함해서 단 네 명만이 '매장소를 싫어하는 사람'에 해당되었다. 그들은 모두 어느 정도 린신과 비슷한 성장 환경을 거쳐온 이들이었고, 매장소를 싫어하는 이유 역시 린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행동을 함께 하게 되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린신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데 다른 세 사람이 알아서 그를 따르는 것이라고 보는 편이 맞았다.



  "교양? 그것도 중세 중국사?"



  네 사람이 함께 점심 식사를 하던 중, 교양 수업을 신청했다는 린신의 말에 무리 중 한 명인 장환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장환은 형제가 많은 교육자 집안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온 이였다.



  "우린 교양 안 들어도 되잖아."



  주홍진도 끼어들어 한 마디 하였다. 그는 중소 규모의 의료 사업체를 운영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의대에 진학했다. 그의 말처럼, 의대생들은 졸업 요건에 교양 수업 이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전공 수업만으로도 벅찬 것이 의대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게. 물론 교양 수업을 듣지 말라는 얘기는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굳이 듣는다면 전공이랑 조금이라도 관련된 수업이 낫지 않아?"



  이번에는 양광이 물었다. 린신의 집안만큼 대단하지는 않지만, 그 역시 의사 집안에서 태어나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살아왔다. 다만, 그의 아버지는 린 원장과는 달리 아들에게 대놓고 우수한 성과를 요구하고 있었다.



  "사학과 주정우 교수님이 아버지 죽마고우야. 중세 중국사 수업을 그 분이 하시거든. 아버지께서 주 교수님 수업은 꼭 들어보라고 하시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자주 뵈었던 분이라 어떤 걸 가르치시는 지 궁금하기도 하고. 다음 학기부터는 더더욱 교양은 엄두도 못 낼 테니까 기회는 지금 뿐이잖아."



  린신은 대수롭지 않은 투로 답했다.



  "그래, 뭐……. 교양 수업 하나 정도야 너한테는 별 거 아니겠지."



  주홍진이 어깨를 으쓱 하며 말했다.


  점심 식사 후 이들과 헤어진 린신은 중세 중국사 수업을 듣기 위해 인문학관으로 향했다. 전공 수업을 들으러 갈 때에 비해 발걸음이 매우 가벼웠다. 교양 수업이라는 것만으로도 훨씬 부담이 덜한데다, 이 수업에서는 매장소와 마주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만큼 매장소의 존재는 린신에게 상당히 큰 스트레스 요인이었다.


  하지만 린신은 교양 수업에서마저 매장소를 만나고 말았다. 그다지 넓지 않은 강의실은 의대 강의실과는 달리 둘씩 짝지어진 1인용 책걸상이 세 분단으로 늘어서 있었다. 불행하게도 린신이 강의실에 들어섰을 때에는 모든 자리가 학생들로 꽉 찬 상태였다. 단 한 곳, 매장소의 옆자리만 빼고. 그것을 보고 린신은 단번에 수강을 취소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러나 걸음을 돌리려던 순간, 린신의 등 뒤로 이 수업을 담당하고 있는 린 원장의 오랜 친구, 주 교수가 나타났다.



  "오, 신이 너도 내 수업을 들으러 온 거냐? 하긴, 의대생이 교양을 들으려면 이번 학기가 유일한 기회겠지. 자리에 앉지 않고 뭐 해?"



  주 교수와 마주친 이상 수강을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고, 린신은 낭패감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애써 웃어 보였다.



  "자리가 꽉 차서……, 빈 자리를 찾고 있었어요."



  린신의 대답을 듣고, 주 교수는 강의실을 둘러보았다. 매장소의 옆 자리가 비어있는 것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저기 한 자리 비었구나. 어서 가서 앉아라. 수업 시작해야지."



  린신은 마지못해 매장소의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매장소는 이번에도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는 정확히 린신의 취향 대로 예쁘게 웃으며 진심으로 기뻐하는 감정을 드러내고 있었다. 조금의 거짓도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그를 싫어하는 자신이 아주 못된 놈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린신의 불쾌감은 오히려 한층 더 깊어졌다.



  "여기서도 마주칠 줄은 몰랐어. 우리는 교양 안 들어도 되니까 의대생은 나 하나뿐일 줄 알았거든.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



  매장소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약간 들떠 있었다. 린신은 아예 고개를 반대로 돌려버렸다.



  '나는 전혀 다행스럽지 않다고!'



  첫 시간인 만큼, 주 교수는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자신의 수업 방식과 한 학기 동안 배울 내용에 대한 오리엔테이션부터 진행했다.



  "우리 수업은 중국의 중세사 전반을 다룹니다. 중국의 중세는 황건의 난으로 시작해서 황소의 난으로 끝을 맺지요. 2세기 후반부터 9세기 후반까지의 기간입니다. 이 수업의 목적은 여러분들의 머릿속에 중세의 역사의 흐름을 각인시키는 것입니다. 보통 역사라고 하면 달달 외워야 한다고 생각하죠? 열심히 외워서 시험 보고, 시험 끝나면 전부 잊어버리고."



  주 교수의 이야기에 공감한 학생들이 강의실 여기저기서 웃음을 터뜨렸다. 소리를 크게 내지는 않았지만 매장소도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린신은 곁눈질로 그것을 훔쳐보았다. 전공 수업을 들을 때와는 달리 가까이 앉아 있었기에 눈동자를 조금만 움직여도 매장소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인정하지 않으려 아무리 애써도 매장소의 얼굴, 특히 웃을 때의 얼굴이 마음에 든다는 것을, 그래서 자꾸만 눈길이 간다는 것을, 린신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수업은 중간, 기말 고사가 없습니다. 시험을 본다고 하면 또 다 잊어버릴 것 아닙니까? 그럼 뭘 보고 학점을 매기느냐……. 예상하다시피 과제로 대체하게 될 겁니다. 중간 고사 기간 전까지 두 개, 중간 고사와 기말 고사 사이에 한 개가 있을 텐데요. 앞의 두 개는 수업 진도에 맞춰서 탐구 과제가 나갈 겁니다. 리포트 작성해서 제출하면 되고요. 마지막 하나는 발표 과제입니다. 그 때가 되면 다시 공지하겠지만, 발표 주제는 수업 내용과 관련한 것이라면 뭐든 좋습니다. 여러분들의 전공을 살려도 괜찮겠죠. 예를 들어, 경제학과 학생이라면 중세 전반에 걸친 경제 활동 양상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 해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주 교수는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했지만, 몇몇 학생들은 부담을 느끼는지 표정이 굳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주 교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겁 먹지 않아도 돼요. 여러분은 역사 전공생이 아니니 과제가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거, 잘 압니다. 세 개의 과제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두 사람이 한 조가 되어서 하게 될 겁니다. 오늘은 첫 날이고 하니, 바로 진도를 나가기보다는 과제 파트너를 정하는 시간을 가질까 하는데……. 혹시 같이 하고 싶은 학생들은 손을 들고 이름을 얘기해주세요."



 거의 모든 학생들이 앞다투어 손을 들었다. 친구끼리 함께 수강 신청을 한 학생이 대부분이었던 것이다. 생각보다 빠르게 과제 조 편성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주 교수는 린신이 손을 들지 않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혹시 여기 의대생 있나요?"



  주 교수가 강의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린신과 매장소 두 사람만 손을 들었다.



  "잘 됐군. 두 사람이 같이 하면 되겠네요. 아직 파트너 못 정한 학생들은 손 들어 주세요."



  린신은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주 교수는 아직 파트너를 찾지 못한 다른 학생들을 짝지어 주느라 린신 쪽으로는 더 이상 눈길을 주지 않았다. 반면, 매장소는 자꾸만 입 꼬리가 위로 올라가는 것을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여야 할 정도로 기뻐했다. 결국 그대로 수업은 끝이 나 버렸고, 직후에 다른 일정이 있었던 주 교수가 빠르게 강의실을 빠져나가는 바람에 린신은 끝내 파트너를 바꿔달라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








  전공 수업들은 한 주에 2, 3회씩 있는 반면, 교양인 중세 중국사 수업은 주 1회뿐이었고, 과제가 곧바로 나오는 것도 아니었기에, 린신은 과제 파트너에 관한 것은 잠시 잊어버렸다. 게다가 전공부터 하나뿐인 교양까지 전부 매장소와 나란히 앉아서 수업을 듣다 보니, 그것에 점차 익숙해지고 있었다. 물론, 익숙해지고 있을 뿐, 여전히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개강한 지 한 달 즈음 되자, 학사 시스템을 통해 몇몇 전공 수업에서 퀴즈를 본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매일매일 그 날 들은 수업 내용을 정리하고, 다음 수업 예습까지 철저하게 해온 린신이었지만, 퀴즈 점수가 평가에 반영된다고 하니 조금 더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두꺼운 전공 서적과 참고 도서를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그리고 뜻밖에도 전공 공부를 위해 간 도서관에서 교양 수업 과제에 관한 건을 떠올리게 되었다.


  린신은 도서관에 도착하자마자 매장소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앉은 자리 양 옆으로 두꺼운 책들을 잔뜩 쌓아놓고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했다. 그런데 그 두꺼운 책들은 전부 중세 중국사에 관한 것들이었다.



  '교양 공부나 하고 있을 여유가 있단 말이지?'



  주 교수가 다음 주에 첫 과제가 나갈 것이라고 예고하긴 했지만 아직 과제의 내용까지 나온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바로 하루 뒤에 전공 수업에서 퀴즈를 보는데 한가롭게 교양 과목 공부를 하고 있다니. 린신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하여간 재수 없는 놈이라니까.'



  린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적당히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매장소가 앉은 자리와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그가 아주 잘 보이는 위치였다. 전공책을 보느라 시선을 아래로 향하고 있다가도 고개를 들기만 하면 매장소를 볼 수 있었다. 린신은 공부를 하는 틈틈이 매장소의 동태를 살폈다. 의도적으로 하는 행동이 아니라, 신경이 쓰여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쳐다보게 되는 것이었다.



  '정말 전공 공부는 안 할 셈인가?'



  폐관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건만, 매장소는 여전히 역사서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제 린신은 의아스럽기까지 했다. 매장소가 모두가 부담스러워하는 맨 앞 가운데 자리를 고수하는 것은, 결국 자신과 마찬가지로 좋은 성적을 받기 위함일 것이 분명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교수에게 질문을 쏟아내는 것으로 보아, 평소에 전공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평가에 반영되는 퀴즈를 앞두고는 전공 공부를 조금도 하지 않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한편으로는 그만큼이나 자신이 있다는 뜻인가 싶어 짜증이 솟구쳤다. 그와는 달리 몇 시간 동안 전공 서적만 들여다 보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진 탓이었다.


  열한 시가 되자, 폐관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학생들은 저마다 소지품을 챙겨 도서관을 나섰다. 그들은 대부분 정문 앞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린신과 매장소도 마찬가지였다. 곧 버스 한 대가 정류장에 멈춰 섰고, 대다수의 학생들이 그 버스에 올라탔다. 그 버스로 두 정거장만 가면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철 역이 있었다. 린신도, 매장소도 그 버스에는 타지 않았다. 얼마 뒤에 도착한 다른 버스는 정확히 두 사람만 제외하고 다른 사람들을 전부 싣고 출발했다. 다시금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세 번째 버스가 도착했다. 린신이 기다리던 버스였다. 또한, 매장소가 기다리던 버스이기도 했다. 늦은 시간이어서 그런지 버스는 텅 비어 있었다. 린신은 일부러 매장소가 먼저 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았다. 매장소는 곁눈질로 린신을 계속 쳐다보았으나 린신의 시선은 내내 창 밖을 향한 채였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은 같은 정류장에서 내렸다. 심지어 걷는 방향도 같았다. 걸음 속도도 비슷해서 나란히 걷는 듯한 모양새였다.



  "너도 이 근처 살아?"



  매장소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린신에게 말을 걸었다. 예상대로 린신은 답이 없었다. 이제 무시 당하는 것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매장소는 어깨를 한 번 으쓱 하고 소리 없는 한숨을 내뱉는 것으로 무안함을 갈무리했다.



  "……자신 있나 봐?"



  잠시 뒤, 대뜸 물어오는 목소리에 매장소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린신을 쳐다보았다. 린신의 입은 마치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것처럼 굳게 닫혀 있었고, 시선 역시 여전히 정면을 향해 있었지만, 조금 전의 목소리는 분명 린신의 것이었고, 매장소에게 건넨 질문이었다. 린신이 먼저 말을 걸어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 말의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매장소는 그 자체로 뛸 듯이 기뻤다.



  "뭐가?"



  그는 마구 날뛰는 감정을 가까스로 진정시키고는 물었다.



  "내일 전공 퀴즈 있잖아. 평가에도 반영된다고 했고. 그런데도 교양 공부를 할 여유가 있어? 자신감인지, 자만심인지……."



  누가 들어도 빈정거리는 말투였다. 린신은 자신이 매장소에게 괜한 시비를 걸고 있다는 것을 잘 알았다. 하지만 열등감이 가득 찬 마음은 머리를 거치지 않고 멋대로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있었다.



  "음……. 퀴즈는 시험 기간이 아닐 때에도 꾸준히 공부를 하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보는 거라고 생각해. 교수님도 평소에 열심히 했으면 어렵지 않을 거라고 하셨고. 그래서 오늘도 난 그냥 평소처럼 한 거야. 수업이 일찍 끝나서 복습도 일찍 끝냈고, 시간도 남았겠다, 좀 찾아보고 싶은 게 있어서. 만약 내일 점수가 형편 없다면 평소에 내가 공부를 제대로 해 놓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뭐."



  매장소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고 진지하게 대답했다. 그럴수록 린신의 자괴감은 깊어졌다. 린신은 신입생 환영회에서 사람들과 어울리는 매장소를 보았을 때부터 그가 마냥 순수하거나 순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 방금 전의 질문이 단순히 시비를 거는 것이었음을, 매장소가 몰랐을 리 없었다. 다 알면서도 그는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왜 시비냐며 화를 냈으면 좋을 텐데.



  '또 나만 나쁜 놈이 된 것 같잖아.'



  린신은 속으로 욕지거리를 했다.



  "그런데, 날 계속 보고 있었던 거야?"



  그런 린신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매장소는 조금은 기쁜 듯이 물었다. 린신은 입을 꾹 다물었다.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이 들며 얼굴이 화끈거렸다. 달도 뜨지 않은 밤의 어둠에 붉게 상기된 얼굴을 감출 수 있어 다행이었다.


  말없이 걷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제자리에 서서 놀란 토끼 눈을 하고 서로를 쳐다보았다. 물론, 계속 쳐다보고 있었던 것은 매장소뿐이고, 린신은 매장소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린신, 혹시―"



  매장소가 입을 여는 순간, 린신은 그를 무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매장소는 그의 뒷모습을 벅찬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린신이 사는 곳이 제가 사는 곳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린신의 방은 오피스텔의 A동에 있는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린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매장소가 마침내 걸음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을 즈음, 이번에는 린신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B동으로 향하는 매장소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자신의 자취방에 들어서서, 린신은 한동안 현관문에 기대어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잠시 뒤, 현관 센서등이 꺼지며 무거운 어둠이 내려 앉았다. 그는 B동으로 향하던 매장소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느새 양 손은 있는 힘껏 주먹을 쥐고 있었다. 곧 그 두 주먹은 애꿎은 현관문을 마구 때리며 큰 소리를 냈다.



  "기분 나빠……."



  린신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한심하게도 매장소가 저보다 더 나은 곳에 사는 것에 분한 마음이 들었다. 이런 유치한 생각을 반복할수록 오히려 매장소에게 지는 것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도무지 감정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매장소와 관련된 모든 것이 싫었다. 또한, 그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싫었다.



  "대체 이게 뭐야! 뭐냐고……."



   린신은 양 손으로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오늘 밤은 술의 힘을 빌리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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