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에 앞서, <프로젝트 하동춘>을 소개합니다.


하동춘은 세 명의 린매러가 같은 설정, 다른 시간적 배경 하에서 이야기를 풀어보는 프로젝트입니다.

<곡우(穀雨)>는 환생 파트로, 21세기에 환생한 린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초반 일정 분량 연재 후, 최종본은 8월, 호가 필모른 배포전 <호우주의보>에서 회지로 발간됩니다.


이 프로젝트는 저와 힘껏님, 피뽀님이 함께하고 있습니다.

힘껏님과 피뽀님의 글 역시 두 분의 포스타입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피뽀님이 쓰시는 린매의 강호 시절, <우수(雨水)> ▶ https://wkduck2.postype.com/

힘껏님이 쓰시는 린매의 금릉 시절, <백로(白露)> ▶ https://eiosoluno.postype.com/


<프로젝트 하동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새 학기를 맞은 가을의 대학가 식당은 이른 저녁부터 이십 대 초반의 젊은, 혹은 어린 학생들의 목소리로 왁자지껄했다. 저녁 일곱 시가 조금 넘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잔뜩 취해서 친구의 부축을 받으며 귀가하는 이들도 있었다. 소란스럽고 정신을 쏙 빼 놓는 그 풍경은, 한편으로는 젊은 생기로 뜨거운 현장이기도 했다.


  한 남자가 이미 신입생 환영회를 하는 학생들로 가득한 식당의 유리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소년티를 채 벗지 못한 하얀 피부의 남자는 등장만으로 출입문과 가까운 테이블에 앉아 있던 몇몇 여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전체적으로 선이 고운 그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매우 뚜렷했으며, 그 중에서도 눈은 아름답다는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었는데, 눈매는 날카로움과 부드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었고, 맑은 빛을 내는 갈색 눈동자는 그의 내면의 깊이를 대변하고 있는 듯했다. 훤칠한 키와 호리호리한 몸매는 그를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잡티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위, 왼쪽 귀 옆에 점이 딱 하나 있었는데, 별다를 것 없는 그 점이 남자의 매력을 한층 더 끌어올리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예약자 이름이 빼곡하게 적힌 화이트보드에서 자신이 가야 할 곳을 찾기에 바빴다. 화이트보드에는 대학의 학과 이름이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각각의 예약 인원이 몇 명인지는 적혀 있었으나, 예약 시간이 몇 시부터인지는 적혀 있지 않았다. 오늘 같은 날 이 일대의 식당은 모두 그러할 터였다. 매년 이 날은 입학식을 마치고 온 신입생들과 그들을 환영하는 선배 무리로 식당이 가득 차는데, 이들은 저녁 장사를 막 시작할 즈음부터 주문 마감 시간까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법이 없었다. 그러니 시간은 무의미했다.



  "무슨 과에요?"



  점원이 화이트보드를 살피는 남자에게 다가가 물었다.



  "의과 대학입니다."



  점원은 남자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식당 가장 안쪽, 어쩌면 가장 명당이라고 할 수 있는 칸막이로 분리된 공간 뒤가 의대의 자리였다. 점원은 칸막이가 보이는 곳까지만 안내를 하고 다시 일을 하러 돌아갔다. 남자는 점원을 향해 예의 바르게 목례를 한 뒤, 조금은 긴장된 표정으로 두 개의 칸막이 사이로 난 입구로 들어섰다.



  "우리 수석 입학생께서 드디어 오셨군!"



  과대표가 남자를 발견하고는 소리쳤다. 왁자지껄하던 분위기가 다소 사그라지며 모든 시선이 그에게로 향했다. 식당에 처음 들어섰을 때처럼 그를 발견한 몇몇 여학생들의 볼에 옅은 홍조가 떠올랐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매장소입니다. 공항까지 부모님을 배웅하고 오느라 늦었습니다."



  과대표는 괜찮다고 말하며 재빨리 그에게 빈자리를 찾아주었다. 매장소는 늦게 합류했지만 놀랍도록 빠르게 무리에 녹아들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곧잘 웃어주었고, 맞장구를 쳐 주는 데에도 탁월했다. 머리 좋은 이들에게서 자주 나타나는 오만이나 영악도 그에게선 전혀 보이지 않았다. 사실, 그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능력을 타고난 이였다. 스스로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매장소는 이제껏 자신의 능력을 십분 활용하며 살아왔다. 출중한 외모 역시 그 능력의 일부였다. 웃을 때에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웠으나, 진지한 표정을 지을 때에는 남자다운 멋이 있어, 남녀를 막론하고 모두에게 호감을 심어주는 얼굴이었다.


  모두의 관심이 매장소에게로 집중된 듯했으나, 테이블 제일 가장자리에 앉은 남자만은 그 쪽으로 눈길조차 주지 않고 있었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할 정도의 층진 머리칼을 대강 하나로 묶은 그는 척 보아도 꽤 멋을 부릴 줄 아는 이였다. 선이 굵고 시원스러운 생김의 그는 매장소와는 또 다른 느낌의 미남이었다. 꼼꼼히 묶지 않은 탓에 흘러내린 잔머리에 반쯤 가려져 있었음에도 아주 잘생긴 얼굴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쟤가 걔 맞지?"



  신입생 중 한 명이 턱짓으로 그를 가리키며 제 옆에 앉은 동기의 옆구리를 찔렀다.



  "맞을걸. 린 원장 아들. 이름이 뭐더라……. 린…… 신이라고 했던가?"



  자신과 아버지가 언급되는 것을 듣고, 술잔을 쥔 린신의 손이 잠시 멈칫했다.



  "의외다. 아까 입학식 때, 이번 신입생 중에 린 원장 아들이 있다고 해서, 신입생 선서를 걔가 할 거라고 생각했거든. 엄청 대단한 의사 집안이잖아. 수석 입학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할 줄 알았지."



  이야기가 계속 이어지자, 린신은 단숨에 술잔을 비웠다.



  "린 원장이 누군데?"



  누군가 끼어들어 물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이야기를 나누던 이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마치 절대 모르면 안 될 사람을 모르고 있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정말 몰라? 우리 학교 부속 병원 원장이잖아. 수술 잘하기로는 세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써전일걸! 이 학교 의대 유명세에 크게 한 몫 했는데. 다들 그래서 여기 지원한 거 아니야?"



  그를 시작으로 저마다 린 원장에 대해 아는 것을 하나씩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린 원장이 성공시킨 어려운 수술들에 대한 것이었고, 일부는 그의 학창 시절 일화들이었다. 이제는 병원장이 되어 직접 메스를 잡는 일은 거의 없다는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목소리도 있었다. 모든 이야기는 결국 린 원장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설명하는 것들이었다. 그만큼 외과의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린 원장은 영웅적인 존재였던 것이다. 어느새 테이블 전체의 대화 주제가 린 원장으로 바뀌어, 매장소와 대화를 나누던 사람들도 하나 둘 동참하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린신은 더더욱 술만 퍼부어댔다.


  린 원장은 분명 좋은 아버지였다. 그는 실력이 출중한 외과의였지만 아들에게는 결코 자신을 따라오라고 강요하지도, 좋은 성과를 얻기 위해 애쓰기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저 자유롭게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살기를 바랐다. 그러다가 고민이 있을 때 상담자로서 아버지를 찾아준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는, 린 원장은 사람이었다. 그런 점은 그의 아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들이 의대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부부는 그것이 집안 분위기에 휩쓸려 얼떨결에 내린 결정은 아닌지 몇 번이고 묻기도 했다. 그 때, 린신은 온통 의사들뿐인 집안의 영향이 없지는 않겠지만, 거듭 숙고하여 결정한 것이라고 분명하게 답했고, 그제야 그의 부모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답에는 분명 거짓도, 허세도 없었다. 그러나 부모를 제외한 린신의 주변 환경이 그다지 좋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의 조부는 손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이미 제 아들이 세계에서 손꼽히는 써전이 되는 것을 지켜본 은퇴한 늙은 의사는 손자가 그보다 더 큰 것을 이루기를 바랐다. 여기에 더해, 린 원장에게 존경을 표하는 젊은 의사들도 린신에게는 압박으로 느껴졌다. 훌륭한 아버지의 주변을 둘러싼 이들은 당연히 린신도 그 명성에 걸맞은 사람으로 자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린신은 살면서 속했던 모든 곳에서 가장 우수한 성과를 내었다. 수석을 놓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취미 삼아 했던 동아리 활동에서조차 누구보다 뛰어난 기량을 뽐냈다. 그러한 결과를 낼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를 향한 기대에 찬 시선이 큰 몫을 차지했던 것이다. 그러는 사이, 린신의 목표는 아버지를 뛰어넘는 것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린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1인자의 자리에 있었다. 린신은 처음으로 2인자가 되었다. 그것도 하필 바로 이곳, 이 학교의 의대에서. 수석을 놓쳤다는 것을 알았을 때, 린신은 조부를 비롯한 다수의 사람들이 자신과 아버지를 비교하며 아들이 아버지보다 못하다고 고개를 젓는 장면을 떠올렸다. 수석과 큰 차이 없는 차석이라는 이야기는 조금의 위로도 되지 않았다. 모두의 관심이 매장소에게로 향하는 오늘의 상황도 자신이 더 이상 1인자가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했다. 사람들은 보통 2인자에게는 관심을 주지 않기 때문이었다. 매장소가 도착하기 전부터 동기들과 선배들은 신입생 선서를 했던 빼어난 외모의 수석 입학생에 대해 이야기했고, 린신은 이미 그 때부터 그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너도 나중에 외과로 갈 생각이지? 어쩌면 린 원장님이 네 이름을 벌써 알지도 모르겠다!"



  신입생 중 하나가 부러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매장소에게 물었다. 그제야 린신도 곁눈질로 매장소를 쳐다보았다. 매장소는 눈을 살짝 내리깔고 작게 미소를 지었다.



  "모르겠어. 나는 중의학에 관심이 많거든."



  그 답을 들은 모두가 일제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의대에서 특출한 이들은 외과를 지망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수재 중의 수재임을 증명하며 입학해놓고 정작 관심 있는 것은 중의학이라니, 대부분의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지나치게 소박하게 보이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도 이 학교에 지원한 건 린 원장님 영향이 컸어. 그러니 모르겠다는 거야."



  매장소가 그렇게 덧붙이자, 그를 둘러싼 이들은 결국은 그가 외과를 선택하게 될 거라며 저마다 한 마디씩 하였다. 린신은 고개를 돌리며 나지막이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매장소에게로 관심이 집중된 상태였기에 다른 이들은 보지 못했지만, 매장소만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린신에게로 다가갔다. 자연히 모두의 시선이 그를 따라 이동했다.



  "네가 린 원장님 아들이었구나."



  린신은 매장소를 본체만체하고 말없이 술잔만 채웠다. 명백히 무시하는 태도인데도 매장소는 조금도 당황하는 기색을 비치지 않았다.



  "입학식 때 나랑 눈 마주치지 않았어? 그 때 좋은 인상을 받아서…….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매장소는 오른손을 내밀어 린신에게 악수를 청했다. 린신은 또다시 그것을 완전히 무시하며 술잔을 비웠다. 이번에는 매장소도 약간 당황한 듯 했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조금 무안하게 손을 거두었다. 지켜보는 이들 사이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린신은 탁 소리가 나게 잔을 내려놓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난 너 같은 부류가 제일 싫어."



  린신이 차갑고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매장소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린신은 그러거나 말거나 제 겉옷과 가방을 챙겨 들었다.



  "저는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리고는 붙잡을 새도 없이 빠른 걸음으로 식당을 빠져나갔다. 매장소는 제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칸막이 너머는 여전히 들뜬 학생들이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지만, 의대생들이 모인 자리는 찬물을 끼얹은 듯했다.



  "저 녀석 주사가 별로 좋지 못하네. 자, 다들 개의치 말고 즐기자! 다시 한 번 환영한다, 신입생들!"



  과대표가 나서서 분위기를 바꿔보려 안간힘이었다. 그제야 정신이 든 매장소는 다시금 웃어 보이며 과대표를 도왔다. 두 사람의 노력에 부응하듯 장내는 점차 원래의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회복했다. 잠시 뒤, 매장소는 화장실을 핑계로 그 자리를 빠져나와 린신의 뒤를 쫓아보려 하였으나, 너무나 당연하게도 소용없는 짓이었다. 조금의 지체도 없이 발걸음을 옮긴 린신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








  신입생 환영회는 식당에서 호프로 자리를 옮겨서까지 지속되었다. 매장소는 호프까지는 따라가지 않고 적당히 빠지려 하였으나, 어느새 그에게 친밀감을 느끼기 시작한 동기들과 선배들은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결국 그는 새벽 세 시가 다 되어서야 간신히 침대에 몸을 뉘일 수 있었다.


  아들의 입학식을 보러 왔던 부모님이 비행기를 타고 귀가해야 했을 정도로 매장소의 집과 학교는 거리가 상당했다. 그렇기에 자취는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아버지는 하나뿐인 아들이 조금이라도 더 나은 곳에서 살기를 바랐다. 아버지가 신중하게 고른 자취방은 학교와 버스로 서너 정거장 거리에 있는 신축 오피스텔이었다. 이 오피스텔은 A동과 B동 한 쌍으로 되어있는데, B동이 A동보다 방도 넓고 임대료도 비쌌다.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매장소의 방은 B동에 있었다. 학교에서 조금 더 멀어지면 더 좋은 집이 있지만 그만큼 통학이 불편해지기 때문에 그것이 최선이자 최고의 선택이었다.


  불 꺼진 방 침대 위에 홀로 누워, 매장소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만난 린신을 떠올렸다.



  "린신……."



  나직한 목소리로 그 이름을 불러보기도 했다. 천 년을 훨씬 넘는 세월을 건너 다시 만난 연인은 자신과 마찬가지로 그 때와 같은 얼굴, 같은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껏 멋을 낸 것도 그 시절과 같았다. 그 역시 한 번 죽고 다시 태어난 것일 텐데, 보자마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은 모습이었다. 달라진 것은 오직 그의 태도뿐이었다. 린신은 더 이상 매장소에게 다정하지 않았다. 재회의 기쁨은 순식간에 슬픔과 충격으로 바뀌었다.


  그 역시 그 옛날의 일들을 전부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래서 자신을 매정하게 떠나버린 나를 지금도 원망하고 있을까. 그래서 그토록 차가운 것일까……. 무엇 하나 확신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기억을 못 하는 편이 린신을 위해 더 낫겠지. 그 때의 그는 분명 슬퍼했을 테니까……. 괴로웠을 테니까. 그리고 전부 기억하기 때문에 차갑게 대하는 것이 아니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도―'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매장소는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만약 린신이 옛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해도 매장소가 그에게 크나큰 아픔을 안겨주었던 것이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매장소 자신이 그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십대 초반부터 머릿속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옛 기억들을, 매장소는 마치 어제 일처럼 생생하게 느꼈다. 그러니 린신과 다시 연인이 되는 일은 결국 그를 기만하는 일이 될 터였다. 설령 린신이 평생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다면 역시 오늘 같은 게 좋아. 전생을 기억하는지는 중요치 않아. 오늘처럼 나를 계속 미워해주게, 린신."



  린신에게 닿을 리 없건만, 매장소는 그의 얼굴이 어른거리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려 보았다. 그리고 잠시간 돌아오지 않는 답을 기다리다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여전히 린신의 얼굴이 보였다. 생을 건너 왔음에도 그를 향한 마음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크고 깊어져 있었다.


  지난 생에서 죽음을 맞은 뒤, 매장소의 영혼은 새하얗고 텅 빈 공간에 홀로 남겨졌다. 상상하던 것과는 달랐지만 그 공간이 저승이라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매장소는 그 곳에서 어딘가에 있을 절대자를 향해 빌고 또 빌었다. 은혜를 갚는 것도, 사죄를 하는 것도, 무엇 하나 그를 위한 것은 제대로 한 것 없이 떠나왔으니 부디 한 번만 다시 만나게 해 달라고.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말할 기회를, 더불어 속죄할 기회를 달라고. 죄 많았던 생에서 단 한 가지라도 잘한 일이 있다면, 그 한 가지에 대한 상으로 그 기회를 달라고. 그 자신의 영혼 외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는 그 곳에서 셀 수 없을 만큼 기도를 되풀이했다.


  얼마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지 가늠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시간이 지났을 즈음, 새하얀 공간에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이 드리워졌다. 죽어버린 육신을 떠나 혼백인 채로 지내는 동안 단 한 번도 잠을 잔 적이 없었는데, 어둠과 함께 졸음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잠에 빠져들면서도 기도는 멈추지 않았다. 전생의 기억을 전부 떠올리게 된 십대 중반에야 비로소 매장소는 새하얀 공간과 어둠의 의미를 알 수 있었다. 그 공간은 그의 지난 생이었고, 어둠이 내린 순간이 곧 환생의 순간이었다. 즉, 어둠은 전생과 현생을 가르는 장막이었다. 하늘이 그 장막을 거두어 전생을 기억할 수 있게 함으로써 현생과의 구분을 지워주었으니, 이는 간절한 기도를 들어준 것이리라. 그러니 임수가 아닌 매장소의 얼굴로 태어나게 해 주고, 이름조차 그 때와 같은 것으로 갖게 해 준 것이 아닐까.


  그래서 매장소는 이번 생이 하늘이 내린 상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린신과 재회한 오늘, 그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기도는 이루어졌으나 현생은 상이 아닌 벌이었다.



  "하늘이 내 뜻을 들어준 모양이야. 참으로 잘 된 일이지. 이번 생이 벌이라 해도, 속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 나는 기쁘다네. 감히 자네에게 애정을 바라지 않을 걸세. 자네는 자네 하고픈 대로 나를 계속 미워하게. 나는 지난 생에 자네에게 다 주지 못한 애정을 줄 것이네만, 자네는 나를 계속 차갑게 대해야만 하네.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아파할 걸세. 하늘이, 그리고 자네가 내게 주는 벌이니까. 내가 마땅히 받아야 할 몫이니까……. 주는 그대로 달게 받겠네."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이내 감은 눈 사이를 비집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








  자취방으로 돌아온 린신은 옷도 벗지 않은 채로 거의 한 시간이 다 되도록 차가운 물이 쏟아지는 샤워기 아래에 서 있었다. 물을 잔뜩 먹은 옷가지가 그를 바닥으로 끌어당겼다. 이래서는 기분이 나아지는 데에 조금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타오르는 불이 좀처럼 가라앉지 않아, 아직은 물을 끌 수가 없었다. 천천히 심호흡을 해 보기도 하고, 크게 소리를 내질러 보기도 했건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머릿속에서 조금 전 신입생 환영회에서 있었던 일들이 빠르게 다시 재생되었다. 자연히 매장소의 웃는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싫은 이였다. 그는 내내 사람 좋게 웃어 보였지만, 린신은 그것이 그의 본모습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린신의 눈에는 그 웃음 아래에 숨겨진 오만함이 명확하게 보였다. 린신 자신도 지니고 있는 것이었기에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다른 점이라면, 매장소는 그것을 감추려 하는 반면, 린신은 드러나면 드러나는 대로 내버려 둔다는 것이었다.



  '난 너 같은 부류가 제일 싫어.'



  사실, 이 말은 핑계에 불과했다. 린신은 자신 외의 다른 사람에게 아예 관심을 갖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니 싫어하는 사람은 물론, 좋아하는 사람도 없다고 보는 것이 맞았다. 평소의 린신이었다면 매장소처럼 겸손하게 구는 것―나쁘게 말하면 가식적으로 구는 것―이 성미에 맞지 않긴 하지만, 자신에게 그러한 태도를 강요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매장소에게만 유독 싫은 감정이 생기는 것은, 매장소보다는 린신 스스로에게 원인이 있었다. 아버지와 비교당하고, 주변의 기대를 받으며 살아온 지난 날들이 그것이었다.



  '유치하고 한심하다는 거, 나도 잘 안다고. 아는데…….'



  이를 모르는 것이 아니기에, 매장소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피어오를수록 린신의 자괴감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감정이란 것은 원하는 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먼지 털 듯 한 번에 털어낼 수도 없었다.



  "망할,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생긴 건데?"



  린신이 괜스레 주먹을 말아 쥐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애초에 누군가를 싫어하는 것이 기분 좋은 일일 수 없건만, 매장소의 얼굴은 그 불쾌감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매장소라는 사람이 싫은 것과는 반대로, 그의 얼굴 생김은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상황이 지금과 조금만 달랐다면, 다시 말해, 그와 별다른 감정 없이 첫만남을 가질 수 있었다면 곧장 사랑에 빠질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린신의 취향 그 자체나 다름없는 얼굴이었다. 매장소를 싫어하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에게 끌리는 자신의 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첫 학기에 그 녀석보다 성적을 잘 받으면 이 불쾌감이 사라지려나…….'



  어차피 유치하고 한심할 뿐인 감정이니 해결 방법도 아주 단순하지 않을까. 린신은 한숨과 함께 샤워기 레버를 내렸다. 차가운 물줄기 아래 서 있은 지 한 시간이 조금 넘었을 때였다.


  그대로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온 린신은 이사하자마자 냉장고 가득 쟁여놓았던 캔맥주를 하나 꺼내 들었다. 휴대폰에는 부재중 전화 기록이 남아 있었다. 집에서 온 것이었다. 아버지에게서 온 문자 메시지도 있었다.



  [신입생 환영회 한다고 바쁜가 보구나. 자랑스러운 내 아들, 입학 축하한다.]



  린신은 맥주를 크게 한 모금 들이켰다.



  "자랑스러운 내 아들……."



  그리고 문자 메시지 중 그 부분만 소리 내어 읽어보았다. 조금이라도 기분이 나아질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자랑스럽다는 말은 아들에게 전혀 위로가 되지 못했다. 린신은 휴대폰을 침대 옆 서랍장 위에 대충 던져 놓고 남은 맥주를 모조리 목구멍 안쪽으로 털어 넣었다. 탄산 때문에 목이 따끔거렸다. 이미 신입생 환영회에서 상당한 양의 술을 마신 다음이어서 그런지 고작 맥주 한 캔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눈 앞이 빙빙 도는 느낌도 들었다. 린신은 침대 위에 쓰러지듯 몸을 뉘였다.



  "자랑스러운 내 아들……."



  다시 한 번 아버지의 문자 메시지를 중얼거려 보았다. 기분을 띄우는 데에는 여전히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내가 과연 당신이 자랑스러워 할 만한 아들일까요, 아버지……."



  만약 아버지가 듣는다면 당연히 자랑스러워 할 만하다고 답해 주었겠지만, 그 답을 해줘야 할 사람은 차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본가의 안방에서 잠을 자고 있을 것이다. 물론, 당장 아버지가 곁에 앉아 그렇게 말해준다 해도 자괴감이 사라질 것이라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내일 아홉 시부터 수업 있는데…….'



  기분이 어떻든 간에 첫 수업에 지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린신은 눈을 감은 채 시계의 초침이 내는 규칙적인 소리에 집중했다. 잡념이 많아 잠을 청하기 쉽지 않을 때, 이를 극복하는 나름의 방법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린신의 자취방에는 방 주인의 고른 숨소리와 초침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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