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호우주의보에서 판매한 린매 단편집 <그들의 계절> 수록 단편 중 재록분인 '맥(貘)'입니다.

* 원작 이후 시점. 아픈 린신 소재.

* 발간된 회지 원고와 내용은 동일하나, 웹에서 읽기 편하시도록 문단 간격을 조정했습니다.








맥(貘)






  매장소는 잔뜩 쌓인 일거리를 두고 툇마루에 나와 앉았다. 선선한 바람에 긴 머리칼이 흩날렸다. 중추절이 지나고 계절은 본격적으로 가을로 접어들어, 강좌맹 본원의 나무들도 울긋불긋 저마다 잎사귀를 물들이고 있었다. 색색의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며 사락사락 잔잔한 음률이 피어났다. 매장소는 상체를 조금 뒤로 젖혀 장지문에 등을 기대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지난겨울, 그는 정인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받아낸 약을 먹고 전장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그 전쟁의 끝자락,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빙속초가 약속한 석 달은 다하였으나, 노각주가 늦지 않게 구해온 불로초가 그를 구한 것이었다. 물론, 불로초라 불리기는 하여도 실제로 늙거나 죽지 않게 해 주는 효능이 있는 것은 아니고, 단지 항상 그의 몸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던 맹독을 씻어내어 주는 것일 뿐인 약초였으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적이라 할 만 하였으니, 불로초라는 이름이 결코 과분하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얻은 새로운 삶이건만, 랑주로 돌아온 그를 반긴 것은 금릉에 머무는 사이에 잔뜩 밀려버린 일거리였다. 밀린 일을 처리하는 중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일거리는 생겨났고, 격무에 시달리며 봄, 여름을 고스란히 흘려보내야 했다. 밀린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었을 즈음, 중추절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고, 잠시 숨을 돌리나 싶었던 강좌맹은 또 다시 명절 준비로 분주해졌다. 명절이 지나기 전까지는 중간중간 휴식을 취한다 해도 마음이 마냥 편치만은 않았기에, 매장소는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에서 쉴 수 있게 된 것이다.


  조금 전보다 약간 더 강한 바람이 일며 매장소의 긴 머리칼을 헤집어놓았다. 매장소는 감았던 눈을 뜨고 어지러이 흐트러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돈하였다. 높고 푸른 하늘이 새삼스레 그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지금이라면 찾아와서 귀찮게 굴어도 괜찮은데.’



  매장소는 눈부시도록 푸른 하늘에서 그리운 이의 얼굴을 떠올렸다. 린신은 매장소를 랑주에 데려다 놓고 랑야산으로 돌아간 뒤, 여태껏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물론, 그것이 두 사람의 연정에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매장소가 대량의 정치판을 잔뜩 휘저어 놓은 것에 더하여 동시다발적으로 전쟁까지 벌어졌으니 랑야각도 봄까지는 꽤나 바빴고, 이후에는 강좌맹의 일이 정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매장소가 먼저 그의 방문을 거부했기에 그리 된 것뿐이었다. 바쁜 중에도 전서구는 랑주와 랑야산 사이를 분주히 오가며 연서를 전달했고, 가장 최근에 받은 서신은 지금도 매장소의 품 안에 있었다.



  ‘올해는 어째서인지 그와 엇갈리기만 하는군.’



  안타깝게도 여름 중에 랑야각이 다시 바빠졌다. 남초 조정의 후계 다툼이 시작된 것이었다. 지난겨울의 전쟁에서 대량의 철기군에 패한 것이 발단이 된 정쟁이었다. 매장소의 서안 위에 놓인 문서들도 그 일과 관련된 것이었다. 후계 다툼 과정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싸움의 패자들은 종종 강호로 도망쳐 은신하였기에, 매장소의 ‘대업’이 마무리되었다고 해도, 강호의 패자로서 강좌맹은 언제나 중원의 정세를 예의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다만, 강좌맹이 그저 전체적인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는 것이라면, 랑야각은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정보를 모으고, 이를 세심하게 분석하여 앞날을 추측해보는 일까지 해야 했다. 이러한 상황이 연인 사이를 갈라놓고 있는 것이었다.



  “종주!”



  다시금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려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중문을 넘어 빠른 걸음으로 매장소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노각주께서 오셨습니다.”

  “누구……? 누가 오셨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소식을 들은 매장소는 놀라움 반, 반가움 반으로 려강에게 되물었다.



  “노각주께서 오셨습니다. 약왕곡에 볼일이 있어 가셨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르셨다 합니다. 우선 편전으로 모셨습니다.”



  비록 찾아온 객이 린신은 아니었으나, 노각주는 린신의 부친이었고, 그가 용무를 마친 뒤, 서둘러 랑야산으로 돌아가지 않고 굳이 랑주에 들렀다는 것은 랑야각의 분주함에도 끝이 보인다는 의미였다. 매장소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옷매무새를 정돈하였다. 답지 않게 조금 긴장한 듯도 하였다. 려강은 그 꼴을 보고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억눌렀다.


  불로초로 새 삶을 얻은 매장소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린신과 평생을 약조하는 것이었다. 노각주는 그런 매장소를 자신의 아들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제 아들과 삶과 죽음을 함께할 정인이니 그 또한 아들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었다. 매장소 역시 그 마음에 감읍하며 기꺼이 노각주를 아버지로 모실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 한들 친아버지와 같지는 않아서, 매장소에게 노각주는 시아비 내지는 장인과 같은 존재가 되었다. 이제는 한 가족으로서 노각주가 이전보다 매장소에게 더욱 각별히 마음을 쓰고, 그를 보다 다정하게 대하고 있음에도, 매장소는 오히려 이전보다 그를 더 어렵게 여길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매장소의 발은 먼 곳까지 걸음 한 어른을 뵙기 위해 간만에 아주 재개 움직였다.


  한편, 노각주는 홀로 편전에 앉아 매장소를 기다리며 대접받은 차를 음미하고 있었다. 편전의 문은 사방으로 활짝 열려 있어, 선선한 가을바람이 전각을 관통하여 흘렀다. 그 바람을 타고 노각주의 멋들어진 백발이 가볍게 흩날렸다. 랑야산에서 약왕곡으로, 약왕곡에서 다시 랑주로 꽤 먼 여정을 이어온 노각주는 이대로 한동안 차나 즐기며 홀로 시간을 보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느긋한 생각을 하였다. 그러나 정작 매장소는 바람이 드나드는 문 사이로 노각주의 백발을 발견하고는 거의 달리다시피 하여 급히 편전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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