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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매] 여명지화(黎明之花) 07

강호에서 나고 자란 매장소와 린신의 이야기







린신이 약재를 실은 마차와 함께 랑주에 도착했을 때, 랑주 곳곳에는 강좌맹의 상징인 매화가 그려진 하얀 깃발이 내걸려 있었다. 매석남과 소진양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랑주 사람들이 부부의 죽음을 애도하며 자발적으로 자신들의 집 대문과 운영하고 있는 가게 등에 걸어놓은 것이었다. 마치 국상이라도 당한 듯 흰 옷을 입고 지내는 사람도 여럿 보였다.



‘이거야 원, 온 마을이 초상집이로군.’



지나가는 이들의 침울한 표정을 보며, 린신은 그렇게 생각했다. 강좌맹의 본진이 랑주이기에 이곳의 분위기가 유독 침체되어 있기는 하나, 사실 강좌 지역에 들어서면서부터 초상집 같은 분위기는 줄곧 이어져왔다. 그것은 린신이 말로만 듣던 강좌맹 종주의 위상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엄격히 따지면 매석남은 큰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장수나 후대에 길이 남을 성군이 아닌 일개 강호인이었다. 그런 이의 죽음을 애도하는 이들의 수가 이 정도로 많은 것을 보면 그는 후세에 다시없을 영웅인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린신의 기분도 다소 무겁게 가라앉았다. 역사 속에 천하 영웅은 흘러넘친다지만 생전 매석남과 제대로 대화를 나누어 보지 못한 것은 참으로 아쉬웠다.



“송구하오나 조문객은 따로 받지 않으니 돌아가 주십시오.”



린신이 강좌맹 본원의 대문을 두드리자, 문지기 노릇을 하는 말단 맹원이 나와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네 윗전에게 랑야각 소각주가 왔다 전하거라. 그리고 랑야각과 강좌맹의 연이 깊으니 돌아가신 분들께 인사는 올려야 하겠으나, 애초에 나는 조문을 하러 온 것이 아니라 의원으로서 병자를 돌보러 온 것이다.”



린신의 이야기에 나이 어린 문지기는 화들짝 놀라 허리를 더욱 깊이 숙이더니 황급히 안으로 들어갔다. 일각도 채 지나지 않아 린신을 맞이하러 온 이는 견평이었다.



“린 공자를 뵙습니다.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지금 강좌맹은 상중이라 예를 다하여 귀빈을 대접할 여력이 없습니다. 넓은 아량으로 이해해 주십시오.”



견평이 두 손을 모으며 양해를 구했고, 린신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손을 내저었다.



“되었네. 의원으로 온 것이라 하지 않았나. 종주 내외께 변고가 있을 줄은 예상치 못했네만, 다른 병자들이 어떤 독에 당했는지는 알고 있네. 해약을 만드는 데에 쓸 약재가 부족할 것 같아 챙겨 왔으니 맹의 의원들에게 전해주고…….”



견평이 뒤에 선 마차를 확인하고 사람을 불러 약재를 나르게 하는 동안 린신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다음 말을 하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를 자네 주군에게로 안내하게.”



그는 한 숨 더 뜸을 들인 뒤에야 그렇게 말했다. 강좌맹에 갑자기 닥친 변고는, 설사 매장소가 아무런 부상을 입지 않았다 하더라도, 몸 약한 그가 온전히 견뎌낼 수 없는 일이었다. 린신은 제 아버지의 명에 따라 수년간 매장소를 돌봤으니 아마도 지금 이 순간, 병자가 되어 있을 매장소를 가장 잘 아는 의원은 바로 그일 터였다. 하지만 매장소가 한 해의 절반 이상을 랑야각에서 보내던 시절에도, 지금도 린신은 그를 마주하는 것이 편치 않았다. 예나 지금이나 매장소는 린신에게 있어 열등감과 투기, 원망을 느끼게 하는 존재인 탓이었다. 병자를 찾아 돌보는 것은 의원으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으나, 개인적인 감정으로는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인 것이다.



“랑야산에서 예까지 거리가 상당하고 자객의 습격이 있은 지는 이제 겨우 나흘째인데, 어찌 이리도 금세 당도하셨습니까? 이번 일에 대해 랑야각이 사전에 입수한 정보가 있었던 것입니까?”



매장소의 처소로 향하는 동안 견평이 린신을 향해 물었다. 린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랑야각도 강좌맹과 마찬가지로 활족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네. 최근 홍수초는 상당량의 미혼분(迷魂粉)을 사들였는데, 춘약에 미혼분을 소량 섞으면 최음 효과가 곱절로 증가하니 기루에서 이를 사들이는 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으나, 홍수초는 이제껏 춘약 자체를 사용한 적이 없는데다가, 미혼분과 함께 사들인 춘약의 재료는 그 배합 비율로 볼 때 터무니없이 적은 양이었어. 하여 그 배경을 의심하던 중, 때마침 강좌맹 소주로부터 서신이 도착했지.”



“소주의 서신이요?”



견평이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그래. 자네의 주군이 내 아버지께 감사를 표하는 서신을 보냈네. 신년 선물에 더하여 첫 랑야방 등극을 축하하는 의미로 보내준 무이암차에 대한 감사 인사였는데, 아버지께선 매 소주의 생일에 맞춰서 한 번 더 선물을 보낼 생각이셔서 신년 선물은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하셨거든. 보낸 적 없는 선물을 받았다 하니 참으로 이상하지 않은가. 랑야산에서 선물을 가지고 출발한 각원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 것인가 싶어 그 자취를 추적해보니, 과연 도중에 흔적이 사라졌더군. 그가 변절한 것이든 변고를 당한 것이든 간에, 사자가 사라졌는데 선물은 무사히 도착했으니 그 또한 기묘한 일이지. 랑야각은 이에 대해 누군가 강좌맹 종주 일가를 해하려 계책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중이라 판단했네. 강좌맹과 가장 악연이 깊은 것은 현경사이고, 현경사는 한때 활족이 머물렀던 곳이기도 한데, 마침 활족은 독약을 잔뜩 사들였다……. 어떤가? 선물로 보낸 약재와 술, 그리고 보낸 적 없는 선물인 무이암차 모두 먹는 것이니 몰래 독을 섞기에 아주 좋지 않겠는가?”



매석남의 명으로 신년 선물과 함께 랑주를 방문한 랑야각의 사자를 미행했던 견평은 자신이 알아낸 것과 린신의 이야기를 종합하여 이번 사건의 내막을 일부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랑야각으로부터의 신년 선물이 도착했던 날, 견평은 매석남의 명을 받아 선물을 갖고 온 사내의 뒤를 쫓았고, 나흘간 끈질기게 뒤를 밟은 결과, 그가 랑야각의 사자가 아닌 현경사의 일원임을 알아냈다.



“놈을 쫓아 나흘 만에 도착한 곳은 깎아지른 골짜기 한쪽 면에 난 구멍을 입구로 하는,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동굴이었습니다. 근방에 현경사 놈들이 잔뜩 깔려 있어, 거리를 두고 몸을 숨긴 채 다시 이틀, 그들이 자리를 비울 때까지 기다렸다가 동굴 안쪽을 살펴보았는데, 미혼분의 흔적과 진짜 랑야각의 사자로 보이는 소년의 시신이 남아 있었습니다.”



숨이 끊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보이는 사체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을 했다. 등 뒤로 묶여 있는 두 손과 상체에서 유독 강한 술 냄새로 미루어 누군가 그에게 강제로 술을 먹인 것 같았다.



“실험을 한 게지.”



린신이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그 아이를 이용해서 미혼분의 치사량을 확인한 게야. 랑야산부터 랑주까지 먼 길을 가야 하니 나이는 어리더라도 무공이 약한 이를 보내진 않네. 어느 정도 내공을 쌓은 아이였으니 실험 대상으로 적당했겠지. 그 결과를 토대로 술에 섞을 독의 양을 정했을 걸세.”



대화가 이즈음에 이르렀을 때, 견평은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술을 마신 맹원들은 모두 미혼분에 중독되기는 하였으나, 죽음에 이를 정도로 상태가 심각한 이는 단 한 사람도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 사람을 상대로 실험까지 해가면서 치사량을 확인하고는 그만큼의 독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무언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린신은 견평의 낯에서 그러한 의문을 읽어내었다.



“중독 증세는 보이되 죽지는 않도록 하기 위해서 치사량을 알아야 했던 걸세. 강좌맹원들은 사옥의 승리를 증명해 줄 아주 중요한 증인들이니까. 허나, 매 종주께서 이리 되실 줄은 내 아버지께서도 예상치 못하셨네. 내게 랑주에 가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도 몸 약한 소주가 혹시라도 독이 든 약이나 차를 먹었을지 모른다는 걱정 뿐이셨으니…….”



순간 지극정성으로 어린 매장소를 돌보던 수 년 전의 아버지가 떠올라, 린신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단단히 말아 쥐었다. 제 아내의 병은 알아차리지도 못했으면서 다른 이의 아들은 잠도 자지 않고 살피던 그 야속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러고 보니 사옥은 어쩌다가 현경사와…….”



견평이 다시 한 번 질문을 하려고 입을 뗐을 때, 린신은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끊어냈다. 매장소의 처소에 다다른 까닭이었다.



“우선 병자부터 보고 나서 이야기하지.”



순식간에 사적인 감정을 저편으로 밀어둔 그는 이제 완벽한 의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린신이 매장소를 보지 못한 지 만 5년이 되었고, 그것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매장소가 강좌맹의 다음 주인으로서 그에 걸맞은 모습들을 하나씩 갖추어가고 있던 그 시간동안 린신 역시 보다 성숙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매장소의 처소는 골마루까지 탕약 냄새가 가득 차 있었다. 매장소는 침방 가장 안쪽에 놓인 제 침상 위에 누워 눈을 감은 채였고, 안 의원은 그 곁에 앉아 놓았던 침을 거두고 있었다. 방 한편에는 약탕기에 쉼 없이 부채질을 하는 어린 시동도 있었다.



“안 의원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병자의 상태는 좀 어떻습니까?”



린신이 침상으로 다가가며 안 의원을 향해 물었다. 나이든 의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의식 없는 병자를 내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기력이 쇠한 것 뿐 별다른 병증은 없네. 허나, 원체 약한 몸이니 이대로 계속 기운을 차리지 못한다면 죽음에 이르는 것도 아주 가능성이 없는 일은 아니지.”



린신은 조금 전까지 안 의원이 앉아 있던 의자에 앉아 매장소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병맥은 잡히지 않았으나 한창 심하게 앓았을 때 못지않게 힘이 없었다. 까칠한 얼굴과 백지장 같은 낯빛과 다를 바 없이 하얗게 질린 입술, 그와 대비되는 거뭇한 눈가는 이미 절반쯤은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누구라도 이 꼴을 본다면 안 의원의 묵직한 한숨을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 병자는 내가 가장 잘 압니다. 그러니 이 자는 제게 맡기고 안 의원께선 다른 맹원들을 살피시지요.”



린신이 특유의 오만한 말투로 말했다. 안 의원은 군말 없이 그리 하겠다며 물러섰다. 랑야각 소각주는 제 아버지를 닮아 어린 나이임에도 신의라 불리기에 모자람 없는 의술을 갖춘 것으로 강호 의원들 사이에서 정평이 나 있는데다가, 매장소가 열여섯이 되기 전까지는 병이 들 때마다 보는 눈이 많은 랑주를 떠나 랑야각에서 요양을 해왔던 탓에 실제로 안 의원이 그의 몸 상태에 대해 면밀히 알지 못하는 탓이었다.



“자네도 이만 나가보게.”



안 의원이 방에서 나간 뒤, 린신은 견평을 향해 말했다. 하지만 견평은 걱정 가득한 낯으로 매장소를 바라보며 제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여긴 나 혼자서도 충분하니 나가보란 말일세. 나갈 때 저쪽에 있는 아이도 데리고 가고. 애초에 몸에 문제가 있어 기력이 쇠한 것이 아닌데 보약을 달여 먹이고 시침을 한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안 의원도 달리 방법이 없으니 그리 처방한 것뿐일세. 그러니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그만 나가게.”



린신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숨도 쉬지 않고 그렇게 말을 쏟아낸 뒤에야 비로소 침방 안에는 의원 한 사람과 병자 한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쯧, 소리를 내며 혀를 찬 린신은 매장소의 상태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다시 한 번 맥을 짚었다.



“자네도 나가게.”



그러나 언제부터 깨어 있었던 것인지, 매장소가 의원의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그의 바짝 메마른 목소리와 텅 빈 눈동자는 마치 정말로 죽어버린 사람처럼 그 어떤 감정도 담고 있지 않은 듯 보였다. 하지만 린신은 그 이면에 감춰진 주체할 수 없는 감정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 속에는 한순간에 부모를 잃은 데에서 오는 슬픔이나 그들을 해한 적들을 향한 분노도 물론 있었지만, 조금 결이 다른 것도 있었다. 그는 소중한 사람을 지켜내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너무나 무력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을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무력하여 슬퍼하는 것밖에는 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나 한심하고 원망스러웠다. 그 탓에 눈물을 흘릴 수도 없었다. 그럴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이는 과거, 어머니를 잃은 직후의 어린 린신이 겪었던 것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는 매장소가 품고 있는 분노와 슬픔, 무력감 같은 것들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의원이야. 병자를 돌볼 의무가 있어.”



린신은 그렇게 말하며 매장소의 손목을 붙잡았다. 매장소는 이번에도 린신의 손길을 뿌리치려 하였으나 이번에는 린신도 순순히 놓아주지 않았다.



“날 돌보는 걸 내키지 않아 했잖나. 원치 않는 일 억지로 하지 말고 랑야산으로 돌아가게. 강좌맹에도 의원은 많아.”



매장소의 말에 린신이 코웃음을 쳤다.



“스스로가 한심해 미칠 지경이겠지. 이리 앓고 있는 것도 사실 그 때문인 것이고.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자네가 할 수 있는 일은 두 가지 뿐이야. 첫째는 계속 자책하며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이대로 단명하는 것이고, 둘째는 스스로를 탓하는 것을 그만 두고 당장 해야 할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는 것일세. 전자를 택한다면 나는 랑야산으로 돌아갈 것이고, 자네에게 남은 생은 길어야 수개월이 될 것이라 장담할 수 있네. 자네는 병 때문에 앓는 것이 아닌지라 별달리 쓸 수 있는 약이 없거든. 후자를 택한다면 부모의 원수를 갚을 기회를 얻을 수도 있고, 어떤 식으로든 지금보다는 강해질 테니 두 번 다시 소중한 사람을 잃지 않아도 되겠지. 나는 두 번째 방안을 추천하네만, 내 충고를 받아들일지 말지 역시 자네의 선택에 달린 일일세.”



린신의 이야기를 듣던 매장소의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그가 제 속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는데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진심 어린 충고까지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기실 린신으로서는 그저 병자를 앓아 눕게 만든 원인을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자 함이었으니, 의원으로서 의술을 행한 것일 뿐이었다.



“털고 일어나는 쪽을 택한다면 내가 좀 도와줄 수도 있고.”



그러나 무심코 여기까지 말했을 때, 린신은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적잖이 놀랐다. 어머니를 잃었을 때의 저와 닮은 매장소의 모습에 측은지심이라도 든 것일까. 린신이 저도 모르게 뱉은 말을 어떻게 주워 담아야 할 지 궁리하는 사이, 역시나 놀란 기색을 보였던 매장소의 표정이 조금 다른 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저를 진맥하고 있는 린신의 손목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물론 핏기 없이 앙상하게 마른 손으로 온 힘을 다한다 해도 닭 모가지 하나 비틀 수 없겠으나, 손아귀에서 전해지는 간절함은 그 누구도 그의 손길을 내치지 못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 말, 무를 생각 말게. 자네의 그 말이 이 병자로 하여금 두 번째 방안을 택하게 할 테니 말이야. 설마 랑야각 소각주가 스스로 한 말을 번복하는 것은 아니겠지?”



더욱이 망자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던 매장소의 낯에 약간이나마 생기가 비치기 시작한 탓에 린신은 달아날 길을 잃었다.



“물론이지.”



린신의 답에 매장소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손목을 놓아주었다. 그 사이 진맥을 마친 린신도 한숨을 삼키며 매장소의 손을 놓고 그 위로 모포를 덮어 주었다.



“5년 전에 소현이 선물한 호심단이 아직 남아있는가?”



린신이 물었다. 매장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침상 머리맡에 놓인 작은 서랍장을 가리켰다. 매장소가 워낙 자주 앓는 탓에 그 서랍장 안에 맹의 의원들이 그를 치료하면서 편히 꺼내어 쓸 수 있도록 면포나 약절구를 비롯한 몇 가지 도구들을 구비해 놓았는데, 한때 위쟁이라는 이름으로 매장소를 호위했고, 지금은 약왕곡의 소곡주가 된 소현이 매장소의 생일 선물로 보내온 호심단 역시 항상 그 안에 들어 있었다. 린신은 호심단이 든 병과 약절구를 꺼냈다.



“지금의 자네에게 가장 필요한 약이 바로 이 호심단이지. 자네가 이걸 받은 지 벌써 5년이나 되어서 안 의원께서도 잊고 있었던 모양이야.”



안 의원마저 잊고 있던 것을 린신이 어찌 기억하고 있는지 잠시 의문을 품었던 매장소는 이내 그가 모르는 것이 없다는 랑야각의 소각주인 동시에 의원임을 상기했다. 랑야각주가 호심단과 같은 귀한 약을 누가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기억하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충분히 타당한 추론이나, 린신의 경우에는 그저 어린 시절부터 매장소를 의식하며 살아온 탓에 저도 모르게 매장소와 관련된 정보들을 거듭하여 살펴본 결과일 뿐이었다.



“다만, 호심단의 기운은 너무 강해서 자네 같은 약골이 견뎌내긴 힘들어.”



린신은 호심단 한 알을 약절구에 넣고 곱게 가루를 내더니 조금 전까지 시동이 부채질을 하고 있던 약탕기에서 탕약 한 사발을 떠서 그 가루를 아주 조금 섞어 넣었다. 그리고는 매장소의 등 아래로 손을 넣어 그를 일으켜 앉혔다.



“몸이 어느 정도 회복되면 놈들에게 복수를 할 거야. 돕겠다는 그 말, 반드시 지켜.”



매장소가 린신이 건넨 탕약을 받아들며 말했다. 린신은 제 입술을 깨물고 꿍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매장소는 다시금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가 금세 거두고 비장한 낯으로 단숨에 약사발을 비워냈다.





 

매장소는 린신이 랑주에 당도하고 닷새 만에 거짓말처럼 평소보다 더 혈색 좋은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몸을 회복한 직후,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린신에게 사건의 내막을 캐묻는 것이었다. 지난 닷새간은 몸에 과하게 화가 쌓이면 회복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린신이 자세한 설명을 피했던 것이다. 그래서 여태껏 매장소가 아는 것이라고는 쳐들어온 적들이 23년 전에 강좌에서 도망친 그 사옥과, 그간 수없이 갈등을 빚어왔던 현경사라는 사실 뿐이었다. 린신은 매장소에게 현경사에 의해 변을 당한 랑야각원과 뒤바뀐 신년 선물, 그리고 활족이 현경사를 떠난 것은 눈속임에 불과했으며 술에 섞인 미혼분을 제공한 것이 활족이었다는 사실까지, 닷새 전에 견평에게 설명해준 것과 같은 내용을 이야기 해 주었다.



“자네가 선물 받은 무이암차를 의심하여 섣불리 먹지 않고 부러 랑야각으로 감사의 뜻을 적은 서신을 보낸 것은 현명한 일이었어. 어차피 각에서도 알게 될 일이었지만, 덕분에 조금이라도 일찍 알게 되었으니. 아, 그리고 한 가지 더. 목에 칼을 맞은 소 군사는 그렇다 치더라도 천하고수인 매 종주가 독 연기를 피하지 못했다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아 내 직접 시신을 살펴보았는데 말일세. 사옥이 왜 하필 현경사와 결탁했는지 알겠더군.”



사옥의 이름을 말하면서, 린신은 그 자체만으로도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멍청한 자와 비겁한 자를 싫어했다. 사옥은 멍청하고 비겁한데다가 악하기까지 했으니 린신으로서는 단순히 입에 올리는 것조차 내키지 않는 이였다.



“현경사는 오금환이라는 비기를 갖고 있어. 각종 맹독을 배합하여 만드는데, 정확한 제조법은 아직 우리 랑야각도 알지 못하네. 오금환의 독은 곧바로 발작을 일으키지 않고 이레의 잠복기를 가지며, 이레가 지나기 전까지는 맥을 짚어도 드러나는 것이 없어, 독이 발작하여 죽음에 이르렀을 때에야 중독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가 많지. 매 종주는 오금환에 당한 걸세. 사옥과의 싸움에서 입은 자잘한 상처에서 오금환의 독기를 발견했어.”



린신의 이야기를 듣던 매장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독은 이레간 잠복기가 있다며?”



매장소의 물음에 린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오금환의 독은 외부에서 자극을 가하면 바로 발작하기도 하네. 그저 기공에 한 번 맞는 것만으로도 온 몸에 독기가 퍼져나가지. 보통 이런 식으로 사용하지 않네만, 사옥은 강좌맹원들이 보는 앞에서 자신이 매 종주를 꺾는 모습을 보여야 했으니 미혼분을 섞은 술만으로는 불안했을 걸세.”



매장소가 주먹으로 찻상을 내리쳤다. 잔을 채운 찻물이 요동쳤다. 앞선 이야기들은 활족, 현경사, 사옥이 결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으나, 오금환까지는 미처 알지도, 예상하지도 못했던 것이다.



“려강! 견평!”



그는 이를 악물고 곁에 앉아 있는 수하들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당장 본원의 맹원들을 전부 집합시켜!”



려강과 견평이 깊이 부복한 뒤 명을 수행하러 나가자, 매장소는 시동들의 도움을 받아 의복을 갈아입었다. 병상에 누워 있는 사이 상복을 입어야 하는 기간은 지났으나, 그는 상복을 연상케 하는 흰 의복을 갖춰 입고 내원에 모인 맹원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인 이들 사이에는 회가 끝난 직후 갑작스레 닥친 변고 탓에 아직 돌아가지 못한 14주의 타주들과 견평이 지원군으로 데리고 온 분원의 맹원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맹의 타주들이 이리 전부 모여 있으니 번거로운 일을 하나 덜었군.”



매장소가 맹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다지 크지 않은 그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모두 숨을 죽이고 한껏 집중하여 귀를 기울였다.



“다섯 해 전, 이 몸이 맹의 소주 자리에 올라 정식으로 강좌맹 종주 매석남의 후계자로 인정받은 일을 그대들 모두 기억할 걸세. 그리고 그대들의 두 눈으로 목격한 그 사건으로 인해 지금 강좌맹 수장 자리는 공석이지.”



다음 말을 하기 전, 매장소는 잠시간 눈을 감고 조용히 심호흡을 한 뒤, 다시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그 잠깐 사이, 매장소의 눈빛은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차갑고 날카롭게 빛나는 두 눈동자 속에서 굳은 의지가 타오르고 있었다.



“오늘 이 시간부로 나, 매장소는 선대 종주께서 생전 결정한 바에 따라 강좌맹의 새로운 지도자가 될 것이다. 이견이 있는 자는 맹을 떠나도 좋다. 선대 종주의 이름으로 떠나는 이들이 새로이 머물 곳을 보장해줄 터이니 속히 거취를 정하라.”



맹원들은 다소 놀란 듯한 낯으로 고개를 돌려 서로를 쳐다보았다. 술렁이는 분위기 속, 매장소는 제 발치로 시선을 떨구었다. 긴장감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소매 안으로 감추어 힘껏 맞잡은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다섯 개 랑야방 중 강호인들이 가장 중히 여기는 고수방에서 오래도록 최고의 자리를 유지하던 아버지를 주군으로 모시던 이들이 과연 자신을 새로운 주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 탓이었다.



“종주!”



하지만 그러한 염려가 무색하게 강좌맹원들은 한 목소리로 매장소를 그렇게 불렀다.



“목숨이 다할 때까지 충성할 것을 맹세합니다!”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굽히고 매장소를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기실 맹원들이 매장소의 말을 듣고 놀란 기색을 보였던 것은, 매장소가 강좌맹 내에 자신이 종주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이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는 것 때문이었다. 그들 중 누구도 매장소를 새로운 주인으로 받드는 데에 일말의 불만도 품지 않았다. 고개를 들어 그 광경을 바라보던 매장소는 흔들리는 눈동자를 감추기 위해 여러 번 눈을 깜빡였다.



“……다들 고맙네.”



그는 그 한 마디를 한 뒤, 다시 한 번 숨을 골랐다.



“강좌맹 종주로서 나는 비겁한 수로 내 부모이자 강좌맹의 선대 종주 부부를 살해한 현경사와 사옥을 반드시 처단할 것이다. 그들은 본거지를 숨기는 데에 탁월하여 추적하는 일이 쉽지 않을 것이나, 얼마의 세월이 걸리든 나는, 그리고 우리 강좌맹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매장소가 단단하게 말아 쥔 주먹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그를 따라 맹원들 역시 엄숙한 표정으로 주먹을 들었다. 한 걸음 뒤에서 그 모습을 바라보며, 린신은 이미 다음 해 랑야방파방 1위는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치에겐 사람을 끄는 힘이 있다. 매장소를 바라보는 저들의 눈빛에는 강한 신뢰와 애정이 있어. 하기사, 이제껏 강좌맹 소주가 계획했던 일들 중 실패한 것이 있었던가. 그러니 그가 종주로서 자신들을 이끄는 것에 불만을 품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당분간은 생각이 모자란 이들이 백면서생인 매장소를 얕잡아보고 강좌맹에 도전장을 내밀지 모르나, 결국 강호는 그 백면서생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게 될 것이라고, 그는 감히 확신하고 있었다. 여전히 매장소를 향한 마음은 불호 쪽으로 기울어져 있음에도 그러했다.



‘나는 지금 새로운 강호의 주인이 탄생하는 현장에 있는 건인지도 모르겠군.’



매장소 자체에 대한 호불호와는 별개로 강좌맹 신임 종주로서의 매장소는 린신의 흥미를 돋우기에 충분했다. 이제까지 말 한 번 잘못 했다가 코가 꿰였다고만 생각하던 린신은 저도 모르게 입 꼬리를 위로 끌어당겼다. 아무래도 한 몇 년 랑주에서 지내야겠다고, 랑야각에 서신을 보내야 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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