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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린매] 여명지화(黎明之花) 03

강호에서 나고 자란 매장소와 린신의 이야기






지난 4년간 매장소는 한 해의 절반 이상을 랑야각에서 보냈다. 4년 전, 랑야각에서 요양을 하며 몸을 회복하여 랑주로 돌아갔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병을 얻어 랑야산을 찾았다. 이러한 일이 꾸준히 반복되어 온 것이었다. 그러나 첫 방문 때를 제외하고는 강좌맹 의원들이 해결하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앓았던 적은 없었다. 이에 린신은 제 아버지에게 강좌맹에도 좋은 의원이 많고, 그들의 힘으로 충분히 돌볼 수 있는 병자인데 굳이 멀리 떨어진 랑야각에서 돌봐야 하느냐며 따지고 들었다. 린요는 랑주에서는 매장소가 ‘강좌맹 종주의 아들’이라는 위치가 주는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것이 병을 키우기 때문이라 설명하였으나 린신의 불만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저 랑주만 아니면 될 일이다. 랑야각이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다고. 이유라면 아버지께서 그 녀석을 가까이 두고 돌보길 원하신다는 것뿐. 어머니께 그만큼 주의를 기울이고 정성을 들이셨다면 좋았을 것을. 그랬다면 그리 허무하게 보내드리지 않았을 터인데…….’



병상에 누운 매장소를 내려다보면서, 린신은 항상 어머니를 떠올렸다. 어린 소년들에게 서로 함께한 4년의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으나, 린신의 마음가짐이 내내 이러했던 탓에 두 사람은 조금도 친해질 수 없었다. 린신은 매장소에게 대놓고 싫은 티를 냈고, 매장소는 구태여 그런 린신과의 거리를 좁히려 하지 않았다.



“소 각주, 이만 내려오시지요. 각주께서 간만에 셋이서 함께 석반을 들자 하십니다.”



린신의 처소에서 일하는 시동이 한 시진동안 남쪽 봉우리의 너른 바위 위에서 검을 휘두르고 있는 린신을 향해 외쳤다. 린신은 잠시 멈춰서 바위 아래에 선 시동을 내려다보았다.



“셋이라면 매장소도?”



린신의 물음에 시동은 공수를 하며 예, 하고 답했다.



“그럼 되었다. 난 조금 더 있다가 내려갈 생각이니 물러가 있거라.”



검을 고쳐 쥔 린신은 땅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각주의 명을 완수하지 못한 시동은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이다가 걸음을 돌렸다.


자신의 처소에서 매장소와 마주 앉은 린요는 비어있는 매장소의 옆자리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시동이 늦는 것을 보면 그 자리가 채워질 일은 없을 듯했다. 그런 린요를 보는 매장소의 낯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제가 부자 사이를 갈라놓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매장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린요는 얼른 손을 내저었다.



“신이 녀석이 철이 없어 그런 것이지, 네 잘못이 아니다. 이제 곧 네가 랑주로 돌아가지 않느냐. 송별의 의미로 맛난 음식들을 준비했건만, 오지 않는 놈이 손해지! 신경 쓰지 말고 마음껏 들거라.”



린요가 상 위에 펼쳐진 진미들을 가리키며 손짓했다. 매장소는 살며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니 낮에 경내에서 한 여인을 보았습니다. 소각주가 직접 맞이한 객이니 귀빈일 테지요. 혹 그 여인이 활족의 선기공주입니까?”



매장소가 젓가락을 들다 말고 물었다. 린요는 제 몫의 고기를 한 점 입에 넣고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얼마 전의 그 질문에 값을 치르고 답을 얻어간 것이겠군요. 강호의 정파들은 활족의 사정에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을 테니 사파 중 한 곳과 손을 잡겠지요. 자칫 강호 전체가 혼란에 휩싸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린요는 또다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나 가진 재물을 모두 끌어 모아 답을 얻어간 선기공주의 의지로 보아, 쉬이 포기하지 않을 것 같구나. 그만한 의지라면 활족이 가져올 혼란은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지.”



매장소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사술로 힘을 키운 이들과 손을 잡고 재건된 활국을 상상하면 너무나 끔찍합니다. 나라를 세우는 과정에서 강호의 질서는 어지럽혀질 것이고, 그 새로운 나라가 중원을 활보하기 시작하면 천하가 뒤흔들릴 것입니다. 이번에 랑주에 돌아가면 아버지, 어머니와 활족의 일을 논해보아야 할 듯 싶습니다.”



소년의 눈빛은 어느새 강좌맹 소주(少主)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매장소는 아직 나이가 어려 맹 내에서 정식으로 지위를 얻지는 못하였으나 매석남과 소진양은 물론 대부분의 맹원들이 그를 맹의 다음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비록 매장소는 직접 몸을 움직여 무공을 펼치는 것은 할 수 없으나 고수방 으뜸인 매석남의 피를 이어받아, 다른 이의 무공을 읽는 데에는 웬만한 무인들보다 훨씬 능했다. 그것은 안으로는 무인들의 단련을 돕고, 밖으로는 지휘관으로서 싸움의 형세를 파악하여 전술을 지시하기에 탁월한 능력이었다. 게다가 그 전술 역시 어머니인 소진양의 명석한 두뇌를 이어받은 덕에 시시각각 변화하는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여 앞으로의 일을 예측하는 능력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 감히 승리를 향한 예언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였다. 이러하니 누구라도 그를 강좌맹의 다음 주인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오직 매장소 스스로 뿐이었다.



“논하는 것은 좋다만 그 논의가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네가 랑주와 랑야산을 오가는 것은 오직 약한 몸을 치료하고 요양을 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을 뿐, 랑야각 서고에 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은 랑야산 아래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니 말이다. 활족의 공주가 랑야각으로부터 강호 방파들에 관한 정보를 샀다는 사실은 그녀가 본격적으로 그 방파들과 접촉을 시도하기 시작한 뒤에야 강호에 알려질 것이다. 헌데, 그 전에 강좌맹이 이를 미리 알고 있었음이 알려지면 어떨 것 같으냐? 랑야각은 공정성을 의심받을 것이고, 강좌맹의 지금의 지위가 정당한 것인지 의문을 품는 이들이 쏟아져 나올 것이야.”



린요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알고 있습니다. 각주의 신뢰를 저버리는 행동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그랬듯 말입니다.”



매장소는 눈꼬리를 접으며 빙긋 웃었다. 린요도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래, 이제까지 그래왔지, 강좌맹은……. 석남이 강좌맹을 거대 방파로 키우는 일을 막 시작했을 즈음, 나는 아버지 몰래 강좌맹과 경쟁하던 방파에 관한 정보를 그에게 가져다주곤 했단다. 하지만 그는 내가 건넨 문서를 받으려 하지도, 내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도 않았지. 나를 지하 감옥에 가두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나는 그저 소중한 친우가 다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었고, 어떻게든 정보를 건네려는 나를 밀어내려면 석남에게는 나와 절연하는 것 말곤 방법이 없었을 게다. 하지만 정이 많은 그는 차마 그렇게 하지 못했어. 나 역시 석남의 올곧은 성정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니, 결국 은자 몇 푼이라도 지재 값을 받는 조건으로 정보를 건넸단다. 랑야각의 지재 값으로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싼 값이었지. 그러니 랑야각이 강좌맹에 한하여 전혀 공정하지 못한 것은 하루 이틀 일이 아니란다. 하지만 다른 그 누구도, 심지어 랑야각과 강좌맹 내에서도 나와 석남, 그리고 진양까지 세 사람을 제외하면 아무도 이 사실을 알지 못해. 이제는 너와 신이까지 다섯이 되었구나.”



랑야각주 린요는 본래 모험을 즐기는 이로, 젊은 시절, 매석남을 뒤에서 도우며 강좌맹의 성장을 지켜보던 때의 짜릿함을 잊지 못하여 요즈음도 틈만 나면 매장소에게 그 시절의 이야기를 늘어놓곤 했다.



“강좌맹이 랑야각에 신세 진 것이 많습니다. 제가 랑주와 랑야산을 오간 것도 벌써 네 해 째이니 말입니다. 주신 은혜는 최선을 다해 갚을 것입니다.”



매장소가 공수를 하며 말했다. 린요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저었다.



“되었다, 되었어. 전부 내가 좋아서 한 일이니 은혜랄 것이 무엇이냐. 들거라. 이야기가 이리 길어져서야 소주방에서 애써 준비한 음식이 다 식겠구나.”



매장소는 그제야 내려놓았던 젓가락을 다시 집어 들었다. 랑야산의 하늘에 붉은 노을이 지고 있었다. 그런 중에도 린신은 여전히 랑야산 남쪽 봉우리 너른 바위 위에서 검을 놀리기 바빴다.




 

 

 

***




 

 


꾸준히 랑야산에서 요양을 한 것이 도움이 되었는지, 매장소가 병을 얻어 랑야각을 찾는 일은 해가 갈수록 줄어들었고, 요양 기간도 점차 짧아졌다. 만 16세가 되는 해를 앞둔 연말, 고뿔에 걸린 채로 랑야각을 찾아왔던 매장소는 이듬해의 정월, 원소절까지 랑야각에서 보내고는 곧장 랑주로 돌아갈 채비를 하였다. 몇 해 전이었다면 바로 다음 달인 그의 생일까지는 요양을 했을 터이나, 이제는 이만큼이나 체력이 좋아진 것이었다.



“다음 달에 생일이 지나면 정식으로 강좌맹의 소주가 되겠구나.”



랑주로 돌아가기 전날 저녁, 함께 차를 나누기 위해 마주앉은 자리에서 린요가 말했다. 린신은 이번에도 랑야각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불참한 채였다.



“예. 이리도 부족한 저를 맹원들이 진심을 다해 지지해주니 그저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는 되도록 각주를 의원으로서 찾는 일은 없도록 하려 합니다. 예전처럼 자주 아프지도 않고요. 물론 제 몸이 이만치 나아질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각주의 덕입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고 두고두고 갚겠습니다.”



은혜를 갚겠다는 말은 매장소의 입버릇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진심이기도 하였다. 물론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손을 내젓는 린요의 마음 역시 진심이었다.



“강좌맹에도 훌륭한 의원들이 많이 있으니, 기실 지난 세월, 네가 이곳까지 와서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의 중병을 앓았던 일은 손에 꼽을 정도란다. 너도 알다시피 석남은 네가 때로는 랑주를 떠나 ‘강좌맹 도련님’이라는 위치가 주는 중압감에서 벗어나기를 바랐지. 허나 이제는 그 부담감을 짊어지고 가야만 하는 때가 된 것이니 이처럼 자주 랑주를 비워서는 안 될 것이야. 진양이 그랬듯이 말이다. 잘 생각했어. 의술이든 지재든 랑야각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주저 말고 사람을 보내거라. 물론, 강좌맹에 랑야각을 필요로 할 정도의 일이 생긴다면, 강좌맹의 전령이 랑야산에 닿기 전에 이미 랑야각이 모든 상황을 파악하고 있겠지만 말이다.”



은근히 랑야각의 정보력을 자랑하는 린요의 이야기에 매장소가 나지막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리고는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반드시 그 누구보다 빠르게 연락을 취하겠다고 답하였다.


이튿날 아침, 랑주로 돌아가기 위해 그간 머물던 별채를 나서던 매장소는 갑작스레 전해진 소식에 일정을 며칠 미뤄야만 했다. 그 소식이란 약왕곡주 소천추의 아들, 소현이 괴한에게 살해당했다는 이야기였다. 소천추는 린요는 물론 매석남과도 돈독한 사이였으며, 매장소에게는 늘 자신의 곁을 지키는 호위, 위쟁의 스승이기도 했다. 어린 시절을 전부 약왕곡에서 보낸 위쟁에게 소현은 친형제와 같았고, 매장소는 그가 곧장 약왕곡으로 가, 그의 스승의 곁을 지키기를 바랐다.



“스승의 아픔을 모른 척 할 수는 없으나, 제가 약왕곡을 방문하더라도 그것은 소주―위쟁은 벌써 두 해 전부터 매장소를 이렇게 불렀다―를 랑주까지 안전하게 모신 뒤의 일입니다.”



그러나 우직하고 충성심이 강한 위쟁은 매장소의 곁을 쉬이 떠나려 하지 않았다.



“물론 자네 말이 틀린 것은 아니야. 자네는 내 사람이니까. 아버지께서도 자네에게 당신의 명보다는 내 명을 우선하라 하셨으니, 자네를 두고 강좌맹의 무사이기 이전에 매장소의 사람이라 이야기해도 되겠지. 그러니 항명하지 말게. 지금 당장 약왕곡으로 가라는 것은 제안이나 부탁이 아니라 명령일세. 계속해서 항명하겠다면 자네를 내치고 연을 끊을 수도 있어. 그리 되면 더 이상 내 곁을 지킬 의무도 사라지는 것이니 곧장 약왕곡으로 가게. 그 때의 자네는 내 사람이 아니니 이는 명이 아니라 제안이야. 명을 따르겠는가? 아니면 나와 절연하고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매장소는 웃음기 없는 차가운 낯으로 질문을 던졌다. 또래의 벗이 없는 그는 위쟁에게 곧잘 장난을 쳤으나, 이런 얼굴을 하고 있을 때의 그는 항상 진심이었다. 위쟁은 자신의 어린 주인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아꼈다. 그렇기에 괜히 고집을 부려 내쳐지는 것은 원치 않았다. 결국 그가 내어놓을 수 있는 답은 정해져 있는 셈이었다.



“……명, 받들겠습니다.”



위쟁의 답을 듣자마자 매장소의 낯 위로 따스한 빛이 퍼져나갔다.



“진작 그리 말할 것이지! 내 걱정은 말게. 지난 한 해, 견 타주가 랑주를 떠나 강호를 유람하며 수련을 쌓고 있었잖은가. 엿새 전에 그가 이 근방에 와 있다고 기별을 보내왔던 것을 기억하지? 그에게 전서구를 보냈으니 곧 이리로 올 걸세. 나는 그와 함께 랑주로 돌아갈 터이니 자네는 어서 약왕곡으로 가게. 갈 길이 멀어. 서두르는 게 좋을 걸세.”



매장소는 위쟁의 손에 은자 한 꾸러미를 쥐어주며 그의 등을 떠밀었다. 위쟁은 몇 번이고 허리를 깊이 숙여 감사를 표한 뒤에야 약왕곡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바로 다음 날, 견평이 랑야각에 도착했고, 매장소는 그와 함께 랑주로 향하였다.



“매 공자,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여정 도중, 객잔에 머물 때마다 매장소는 행장 속에서 종이 다발이나 죽간 같은 것을 꺼내어 읽고는 했다. 그때의 그는 굉장히 진지한 낯을 하고 있어, 차마 방해를 할 수 없었던 견평은 랑주에 도착하기 전 마지막 객자에 이르러서야 간신히 매장소에게 그가 읽고 있는 것들에 대해 물을 수 있었다.



“내가 랑야각을 떠나기 직전에 활족에 관한 새로운 정보가 도착해서 말일세. 출발 전에는 전부 살펴볼 수 없을 것 같아 각주께 부탁해서 문서의 필사본을 가지고 온 것이네.”



활족에 대해서라면 4년 전, 선기공주가 랑야각에서 강호 방파들에 관한 정보를 얻어 간 뒤부터 강좌맹에서도 계속 주시하고 있는 사안이었다. 그들은 지난 4년간 강호의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 않고 여러 방파를 전전하였으나 어느 한 방파와 손을 잡은 것으로 보이진 않았다. 매장소의 손에 들린 문서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활족은 최근 약 11개월간 사파 중 하나인 현경사에 의탁하고 있었는데, 지난 해 중추절 즈음, 홍수초라는 기루를 만들고 이를 중심으로 하여 독자 세력 구축을 시작하면서 현경사와의 왕래를 완전히 끊은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현경사는 은밀히 전해져 내려오는 사술로 내공을 끌어올리고, 암기와 독을 사용한 비겁한 수로 세력을 키워온 방파로, 지난 해 중추절이 지난 직후, 현경사 수장인 하강과 매석남이 일전을 벌인 바 있었다. 승리를 차지한 것은 매석남이었고, 하강은 자취를 감추었으며, 수장을 잃은 현경사는 지금까지도 자신들의 본거지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활족이 현경사를 떠난 시기가 하강이 아버지에게 패배하고 사라진 시기와 거의 비슷하군. 하강의 존재감을 생각할 때, 하강이 없는 현경사는 확실히 활족에게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겠지…….”



매장소가 두 장의 문서를 나란히 펼쳐놓고 번갈아 읽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나, 매 공자. 하강은 보통 인물이 아닙니다. 한 번의 패배로 물러설 리가 없습니다. 모습을 감추고 숨을 죽인 채 무언가 계략을 꾸미고 있을 것입니다.”



견평이 말했다. 매장소는 조용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러자 견평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부복하였다.



“송구합니다. 주제넘은 참견이었습니다.”



그런 견평을 바라보는 매장소의 낯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나 역시 같은 생각일세. 하지만 활족이 홍수초를 만들고 독자 세력 구축에 나서게 된 원인은 하강의 패배가 맞아. 하강이라면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꾸미고 있겠지만, 보다 확실하게 숨기 위해서는 활족과 현경사 사이의 연이 끊어진 것처럼 보이게 할 필요가 있네. 만일 활족이 하강이 사라져 아무런 힘도 쓰지 못하는 현경사에 계속 붙어있었다면, 누구든 겉으로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할 것 아닌가. 물론, 정말로 보이는 그대로가 사실일 수도 있고. 나는 전자가 정답이라고 생각하고 있네만, 무엇도 확인된 것은 없으니 아직은 어느 쪽이든 가능성일 뿐이지.”



매장소는 서안 위에 펼쳐 놓은 문서들을 차곡차곡 접어 견평에게 건넸다. 견평은 그것을 받아 행장 안으로 챙겨 넣었다.



“하강이 모습을 보이지 않은 지도 반 년이 다 되어가는군. 그는 느긋한 성격이 못 돼. 동시에 아주 영리하고. 이제 슬슬 움직임을 보일 때가 된 것 같은데……. 어찌 움직일 지는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네. 랑주로 돌아가 아버지, 어머니와 논해 보아야겠어.”



매장소가 소맷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말했다. 생각에 잠겼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것을 본 견평은 서안부터 치웠다. 매장소를 그냥 두었다가는 밤새 생각에 빠져 잠들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다. 무언가에 골몰하면 잠조차 잊어버리는 매장소의 성격은 강좌맹 내에서는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다.



“랑주에 가면 해야 할 일이 많으실 것 아닙니까. 내일이면 랑주에 당도하니 오늘 밤은 일찍 주무시는 것이 어떠신지요.”



견평이 말하는 것은 분명 의사를 묻는 문장이었으나, 이부자리를 준비하는 그의 행동은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고 있었다. 매장소는 이제껏 견평이 위쟁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나, 지금 이 순간 견평의 모습은 매장소가 늘 보아왔던 위쟁의 모습과 매우 비슷했다.



“의외로 닮은 구석이 있군.”

“예?”



앞뒤를 다 잘라먹은 혼잣말에 견평이 의아한 기색을 보였으나 매장소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걸치고 있던 장포를 벗어 내렸다. 견평은 곧바로 의문을 지우고 재빨리 어린 주인에게 다가가 그의 옷시중을 들었다. 곧 하얀 침의 차림이 된 매장소가 푹신한 요 위에 몸을 뉘였고, 견평이 그의 가녀린 몸 위로 이불을 덮어주었다. 겹겹이 입고 있던 옷가지 대신 두터운 솜이불이 매장소의 몸 곳곳에 온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견평은 매장소가 잠에 빠져들 때까지 기다렸다가 이내 검을 품에 안고 문가에 기대어 앉아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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