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량에는 ‘적염군’이라는 군대가 있다. 그들은 명실상부 대량의 최정예군으로, 말단 병사조차도 일당백의 무공을 자랑했다. 이러한 적염군을 이끌고 있는 임부(林府)는 대량 최고의 무인 가문이었으며, 언제나 한 세대의 가장 뛰어난 무장은 임부의 사람이었다. 현 적염군 사령관 임섭은 황제 소선과 어린 시절부터 절친한 지기로, 천자에게 있어 신하로서나 벗으로서나 부족함이 없는 이였다. 소선은 아직 태자도 되지 못 하였던 시절에 역모를 꾀했다는 모함을 받은 적이 있었는데, 이때 임섭은 제 목숨을 걸고 소선의 결백을 입증할 증좌를 찾아 그를 구명하였다. 이후 임섭은 순방영 통령을 지내며 ‘오왕의 난’을 진압하여 소선이 제위에 오르는 데에 큰 기여를 하였고, 서진, 활족, 대유가 동시에 대량을 공격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에도 그는 먼 북방에서부터 밤낮 없이 달려와 사흘간 혈전 끝에 금릉을 지켜내었다. 이렇듯 임섭은 소선에게 있어 가장 믿음직한 친우이자 은인이었고, 누구보다 충직한 신하였으며, 나라를 구한 영웅이었다.

  영웅 임섭은 소선의 누이인 진양 장공주와 혼인하여 아들을 하나 두고 이름을 임수라 하였다. 임수는 임가의 아이답게 무공을 익히는 속도가 매우 빠르고 총기 또한 남달라, 태황태후는 황가의 피를 물려받은 여러 아이들 중에서도 유독 그를 귀애하였다. 그러한 탓에 임수가 잘못을 저질러도 그의 부모인 임섭과 진양조차 크게 혼을 낼 수 없었다. 다행히 장난치는 것을 좋아하고 성격이 다소 불같은 구석이 있긴 하여도 임수는 올바른 성정을 타고난 아이였다. 무예든 학문이든 배움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구태여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익히고 정진하여 나날이 실력이 늘어갔다.

  유년 시절부터 임수는 절친한 벗 하나와 거의 모든 일상을 함께했다. 벗의 이름은 소경염으로, 소선의 일곱째 아들, 즉, 대량의 제 7황자였다. 그의 어미인 정빈 임정이는 일찍이 임섭과 소선, 언궐이 유람을 하던 중 영남 지방의 악덕 유지에게서 구해낸 여인이었는데, 당시 임섭과 의남매를 맺어 임가의 성과 이름을 받은 바 있었다. 임정이는 본디 의녀로, 임섭의 누이이자 소선의 비이며 황장자 기왕 소경우의 친모인 신비 임악요의 병치레가 잦아진 탓에 그녀를 돌보기 위해 입궁하였다가 황제의 눈에 들어 소경염을 출산하고 첩지를 받은 것이었다. 임수에게 있어 모든 황자들은 외사촌 형제들이었지만, 소경우와 소경염은 각각 신비와 정빈이라는 연결고리가 있어 더욱 각별한 이들이었다. 그것은 소경우와 소경염, 두 황자끼리도 마찬가지여서 유아기를 막 벗어난 뒤부터 소경염은 기왕부에서 지내게 되었고, 자연히 임수도 형님과 벗이 있는 기왕부를 자주 드나들었다. 소경우는 두 아우에게 직접 학문을 가르치지는 않았으나 수시로 차를 나누며 군자로서의 마음가짐에 관하여 이야기를 주고받았고, 그 결과 두 아이는 소경우와 같은 신념을 품게 되었다. 그것은 옳고 그름을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굽히지 않는 기개, 그릇된 것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의지와 같은, 장차 대량을 이끌어나가야 할 황자와 귀공자라면 마땅히 신봉해야 할 것들이었다.

  임수의 곁에는 그를 유독 잘 따르는 아우들이 있었는데, 바로 소경예와 언예진이었다. 소경예는 ‘일단은’ 녕국후 사옥과 리양 장공주 사이에서 난 아이였으나 그가 태어나던 날 발생한 사고 때문에 강호 방파 중 하나인 천천산장을 이끄는 탁정풍의 아들이기도 했다. 하여, 그는 해를 번갈아 금릉과 강호를 오가며 지냈으며 금릉 귀족이 갖추어야 할 학식과 천천산장 장주의 아들로서 지녀야 할 무공을 두루 익히느라 꽤 애를 먹고 있었다. 그런 소경예에게 문무에 모두 뛰어난 임수는 동경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소경예는 금릉에 머무는 동안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임수의 꽁무니를 졸졸 쫓아다녔는데, 그 곁에는 늘 언예진이 함께했다. 언예진은 언궐의 외동아들로, 아비가 아들에게 무심한 탓에 밖으로 나돌며 소경예와 가까이 지냈다. 임수는 어린 아이들을 돌보는 것을 귀찮아해서 두 아우를 제게서 떼어놓으려 자주 괴롭혔고, 그 때문에 언예진은 임수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싫어했는가 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고, 무서워했다 하는 편이 가장 정확할 것이었다. 한번은 임수가 잘못을 저질러서 그 벌로 이 두 아이를 돌보는 일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벌을 받는 것이었음에도 임수는 아이들, 특히 언예진을 성가시게 여겨 나무에 묶어버리고는 후에 임섭이 나무라자 소경염에게 그것을 덮어씌우려 한 적이 있었다. 소경염도 순순히 그에 동조해 주었으나 임섭은 아들의 잔꾀에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한 이가 아니었기에 임수는 결국 배로 혼이 나고 말았다. 이 날의 일은 언예진의 머릿속에 깊이 남아, 후일 약관이 지난 뒤에도 이를 잊지 못했을 정도였다.

  십대 중반 즈음은 임수가 살면서 가장 크게 도약한 시기였다. 태부 여숭이 금릉성 밖에 교단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자 임수도 그 아래에서 수학하였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여숭이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었으며, 금릉 최고의 재능으로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이 시기에 즈음하여 임수는 적염군 내에 적우영이라는 자신만의 군대를 창설하고 사령관이 되어 효기장군의 칭호를 얻었으니, 일각에서는 동년배인 황자 소경염보다 임수의 재능이 훨씬 출중하다는 이야기가 오갈 정도였다. 그리고 소경염 본인은 물론 스승인 여숭 역시 그것에 이견이 없었다. 이러한 주변의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임수는 항상 겸손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늘 자신감에 차 있었으며, 그 자신감만큼 자존심도 강하였다. 그런 그에게서 마치 빛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듯하여, 소경염은 임수를 태양에 비유하곤 했다.

 그렇다. 임수는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두에게 사랑받는 소년이었고,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이였다.










  임수가 살고 있는 대량의 수도 금릉에서 북서 방향으로 나아가다 보면 랑야산이라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흐르는 산에 닿게 되는데, 뛰어난 비경을 자랑하는 곳이었으나 산세가 험하여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만약 누군가 이 산을 오른다면, 그것은 필시 산 정상에 있는 ‘랑야각’에 방문하기 위함일 것이었다. 랑야각은 천하의 모든 지재가 모이는 곳으로, 천하의 일 중 랑야각이 모르는 일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랑야산은 지리상으로는 대량에 속하여 있었으나, 그 꼭대기에 터를 잡은 랑야각은 방대한 지재를 갖고도 대량은 물론이요, 어느 나라의 조정에도 관여하지 않았다. 다만 각자의 문제에 관해 답을 구하는 이들에게 값을 받고 그것을 내어줄 뿐이었다.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온갖 비밀들을 알고 있으면서 고작 지재 장사나 하는 것이 일견 지나치게 겸손한 것이 아니냐는 이야기도 있었지만 ‘고작’이라기에는 랑야각의 지재 값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에 관해 랑야각의 입장은 명백했다.


  “랑야각은 지재의 가치를 알아보는 이들에게만 그것을 내어 줍니다. 우리는 답을 얻고자 하는 이가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털어놓기 전에 미리 값을 정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답을 구하기 위해 랑야산에 오르는 이는 자신이 묻고자 하는 것에 관하여 얼마나 높은 값을 치러야 하는지 모른 채로 이 험준한 산에 발을 들이는 것이지요.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얼마나 높은 값이든 기꺼이 치를 각오가 되어있다는 뜻이고, 그에게는 그만큼 중한 문제이며, 문제의 해답은 그에게 매우 가치 있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 너무 낮은 값을 부른다면 오히려 단단히 각오를 하고 힘들게 들고 온 문제를 가벼이 여겨 무시하는 처사가 되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랑야각을 두고 누군가는 선인들이 모여 있는 곳 같다 말하였고, 누군가는 사기꾼 집단이라 말하였다. 그리고 이 기묘한 조직에서 나고 자란 한 소년에 대한 평도 그처럼 둘로 나뉘었다. 소년의 이름은 린신으로, 랑야각주의 외동아들이었다.


  랑야각은 가지고 있는 지재를 바탕으로 매 해 고수, 부호, 방파, 공자, 미인 각 다섯 분야의 으뜸가는 열 사람을 가려내어 ‘랑야방’을 발표했는데, 린신의 모친은 한때 랑야미인방수(瑯琊美人榜首)의 절세가인이었다. 그녀는 몸이 약하여 아들이 세 살이 되기도 전에 명을 달리하였기에 린신은 제 어미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많지 않았으나, 사내아이치고는 선이 가늘고 예쁘장한 그의 용모는 하늘에서 마실 나온 선녀라 칭송 받던 어미의 미색을 물려받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또한, 그 영특함은 랑야각주의 것을 고스란히 이어받아 지성과 미모를 모두 지녔으니 모두가 그만한 복도 없을 것이라며 입을 모았다. 나면서부터 랑야각이 집이자 놀이터였던 이 영특한 소년은 걸음마를 떼자마자 자연스럽게 서책에 파묻혀 글을 익혔고, 곧 제 또래보다 몇 해는 앞서기 시작했다. 십대에 접어들 즈음에는 랑야각주도 아들의 재능을 인정하여 기꺼이 랑야각의 일들을 맡기기 시작하였으며, 그 때부터 린신은 ‘소각주’로 불리게 되었다.

  소각주는 매일 같이 세상의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온갖 아름답거나, 더럽거나, 슬픈 일들을 접했고, 한두 해 지난 뒤에는 그 모든 것에 관심을 거두고 그저 의무적으로만 그것들을 살펴보게 되었다. 구태여 관심을 둘 필요가 없다 여겼기 때문이었다.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세상사를 전부 들여다보고 있자니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옳은 것이든, 그른 것이든, 혹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다 부질없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삶이란 그저 무료한 것이라 여기게 되었다. 십대 초반의 소년의 생각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이른 감이 있었으나 랑야각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린신은 삶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많은 것을 시도했으나 대부분 실패로 돌아갔다. 서책은 어느 것 하나 어려운 것이 없었고, 검술 역시 연습하면 하는 대로 쉬이 실력이 늘었다. 랑야각 문사들과 말을 섞어 보기도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랑야각은 지재를 다루는 곳이기에 이곳에서 일하는 문사들은 가장 급이 낮은 이라 할지라도 랑야산 아래에서는 수재라 불리기 충분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랑야각의 문사들조차 이미 린신의 대화 상대가 되기에는 모자랐던 것이다. 대를 이어 익혀온 의술도 마찬가지였다. 생명을 다루는 일인지라 아무리 총명하다 한들 짧은 시간에 정복할 수는 없는 영역이었으나, 범인들과 비교하면 몇 배는 빠르게 익혀나가고 있었으니 린신의 텅 빈 삶을 채워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제 아비의 성정을 닮아 아름다운 것으로 오감을 채우는 것에는 흥미가 있어, 사시사철 랑야산을 뛰어다니며 봄에는 꽃향기를 쫓고, 여름에는 녹음을 보며 감탄하고, 가을에는 떨어지는 낙엽 비를 맞고, 겨울에는 설경을 감상하며 즐기는 것이 첫 번째 낙이요, 아름다운 풍광이나 미인을 그리거나, 그러한 그림을 모으는 것이 두 번째 낙이요, 음률을 듣고 즐기며 드물게는 직접 금을 타기도 하는 것이 세 번째 낙이었다.

  이런 소각주를 어린 신선이라 칭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저 건방진 꼬마라는 박한 평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린신은 자신이 남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뛰어나다는 것을 제 스스로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늘 상대를 내려다보는 눈빛을 하며 오만하게 굴었다. 그가 오만함을 거두고 존경을 표하는 대상은 오로지 제 아비뿐이었다. 그것은 린신이 만나본 이들 중 그 자신보다 뛰어나며, 그렇기에 제 수준을 맞춰줄 수 있는 이가 그의 아비인 랑야각주밖에 없음을 의미했다.

  아비를 제외하고, 린신이 처음으로 말을 섞어볼 만하다 생각한 이는 매석남이라는 이름의 무사였다. 매석남은 강호에서만 통하는 이름으로, 그 정체는 대량의 정예군대인 적염군을 지휘하는 대장군이자 임수의 아버지인 임섭이었다. 임정이를 구해주고 그녀와 의남매를 맺었던 그 유람길의 마지막에 임섭은 랑야각에 대한 호기심을 참지 못하여 홀로 귀경을 늦추고 랑야산에 올랐는데, 이 때 젊은 시절의 랑야각주와 만나 친분을 쌓았다. 한 사람은 대량의 수도인 금릉에서 나고 자란 귀공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평생 유유자적 하며 살아온 강호인이었으나, 의외로 마음이 잘 통하였기에 두 사람은 의형제를 맺어 서로를 가족처럼 가까이 하였다. 이후 임섭이 랑야각에 다시 걸음 한 것은 린신이 막 소각주로 불리기 시작했을 무렵이었다. 각주는 오랜만에 만나는 친우를 반가이 맞이하며 제 아들을 불러 인사를 올리라 한 뒤, 곁에 두고 차 시중을 들게 하였다. 덕분에 린신은 아비와 임섭의 대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들을 수 있었고, 임섭이 비범한 인물임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대량과 주변국 사이의 정세 혹은 대량 내부의 상황을 두고 복잡한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성현에 글에 대해 논하기도 하였으며, 때때로 음률이나 술에 관한 실없는 말들을 주고받기도 하였는데, 나누는 이야기의 경중과는 관계없이 한마디, 한마디 그 수준이 매우 높았다. 심지어 그 즈음의 린신은 이미 랑야각 문사들 중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수준에 이르러 있었음에도 제 아비와 임섭의 대화 중 그가 이해하지 못한 부분이 있을 정도였다.

  그로부터 몇 해가 지나 임섭이 신년을 맞아 국정이 휴무인 틈을 타서 다시금 랑야각을 방문했을 때, 그는 린신 또래의 소년과 함께였다. 이번에도 린신은 아비의 부름을 받고 다기를 챙겨 사랑채로 향했다.


  “매석남 어르신을 뵙습니다.”


  공수를 하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올린 그는 임섭의 동행인이 저를 향해 마찬가지로 공수를 하며 예를 갖추는 것을 보았다. 아직 아무도 그 소년이 누구인지 이야기 해 주지 않았지만 굳이 들어볼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소년의 생김이 임섭을 그대로 빼닮았기 때문이었다. 랑야각주는 아들의 시선이 처음 보는 또래의 소년에게 닿아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미소를 지었다.


  “이 공자는 석남의 아들인 임수다. 수야, 이 녀석은 내 아들인 린신이란다.”


  린신은 제 아비를 한 번 쳐다보고는 다시 임수에게 시선을 돌리며 다소 머뭇거리기는 하였으나 이번에는 그를 향해 손을 모으고 예를 갖추었다.


  “린신이라 합니다.”


  또래를 만나는 것은 처음이기 때문인지 그저 제 이름을 이야기하는 것뿐인데도 어색함이 뚝뚝 묻어났다.


  “처음 뵙겠습니다. 임수라 합니다.”


  그에 비해 마주 보며 공수를 하는 임수는 내뱉는 문장이 망설임 없이 당당하고 자연스러웠다. 이전까지의 린신의 삶에서 랑야각주와 임섭을 제외하면 그의 앞에서 그리 당당한 태도를 취할 수 있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즉, 린신은 그 두 사람 외에는 저보다 뛰어나거나, 최소한 저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임수의 당당함은 린신에게는 낯설고 불편한 것이었다. 린신은 그 불편한 기분을 떨쳐내고자 탕관을 들어 미리 찻잎을 넣어둔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붓고, 우러난 찻물을 잔에 나누어 담으며 시중드는 것에 열중하였다. 곧 랑야각주와 임섭은 그 차가 얼마나 상등품인지, 어째서 그러한지 등을 논하기 시작했다. 그 틈에서 임수는 조용히 제 몫의 찻잔을 들어 잠시 향을 음미하다가 한 모금 입에 머금더니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리고는 바로 한 모금 더 제 입술 사이로 흘려 넣고 만족스럽게 미소 지었다. 그는 저와 제 아비가 대접 받은 차가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아보는 듯 했다. 임수의 귓가에 두 어른이 차에 대해 논하는 이야기가 들리기는 하였겠으나, 그의 얼굴에 떠오른 표정과 일련의 행동은 그 이야기를 들어서 차의 가치를 알아본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알아차린 것임을 증명하고 있었다. 린신은 그런 임수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임수는 어린 나이임에도 남다른 기운을 품고 있었고, 린신 역시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비범한 소년이었다. 정작 린신의 시선을 받고 있는 이는 차를 즐기며 어느새 금릉의 정세에 관한 것으로 주제를 옮긴 두 어른의 대화를 경청하느라 그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듯 했다.


  “신아.”


  임섭이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린신은 비로소 임수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너는 모르는 것이 없다는 랑야각의 소각주가 아니더냐. 네가 보기에 내 아들놈은 어떤 인물인 것 같으냐.”


  방금 전까지 린신의 시선 끝에 있던 이가 누구인지 아는 까닭에 묻는 것이었다. 린신은 질문을 받고 다시금 임수를 쳐다보았다. 임수는 긴장한 듯하였으나 동시에 기대를 하고 있는 것도 같았다. 린신은 천천히 임수의 외양을 살피고, 그의 지위와 나고 자란 곳의 환경에 대해 충분히 생각한 뒤 입을 열었다.


  “대량의 정예군을 이끄는 임가의 후계이니 훌륭한 무인일 것으로 사료됩니다. 귀공자이나 소매 폭이 좁은 의복을 입었고, 그나마도 가죽으로 동여맸으니 이는 분명 무사의 차림새이지요. 유람을 함에 있어 편의를 위해 평소 입지 않는 의복을 입었을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으나, 만약 그러하였다면 조금 전, 찻잔을 들 때에 습관적으로 소매를 붙잡으려 허공에 손을 휘저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복장이 곧 평소의 모습인 것이겠지요. 그러나 또래인 제게도 깍듯이 예를 갖추고, 또한 좋은 차를 알아볼 줄도 아는 것으로 보아 무식하거나 무례한 이는 아닐 것입니다. 애초에 그러한 것들은 임가의 후계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만……. 사령관의 자리는 무공만 뛰어나다 하여 감당해낼 수 없고, 문무를 고루 갖추어야 제 몫을 해낼 수 있는 지위입니다. 임 공자는 장차 어르신의 뒤를 이어 적염의 사령관이 될 이이니 학문에도 힘을 쓰고 있을 것이라 쉬이 짐작할 수 있고, 그만큼 나이에 비해 식견이 높지 않겠습니까.”


  린신이 말을 마치자 각주는 흐뭇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아들이 누군가에게 이리도 관심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 관심은 나고 자라면서 단 한 번도 벗을 사귀어 본 적이 없는 아들에게 친우라 할 만한 이가 생길 지도 모른다는 신호였고, 각주는 그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임섭이 린신에게 했던 질문을 그대로 임수에게 돌려주었다.


  “수야, 이번에는 네가 말해 보아라. 네가 보기에 신이는 어떤 아이 같더냐.”


  임수 역시 잠시간 린신을 살펴보았다. 린신이 내내 임수를 바라보고 있던 것이나 임섭의 질문을 받고 나서 한 번 더 숙고하던 것에 비하면 짧은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답을 하기 시작했다. 시선은 린신에게 고정된 채였다.


  “린 공자는 아직 십대임에도 랑야각에서 많은 일을 맡아서 하는 소각주라고 들었습니다. 각주께서 믿고 일을 맡기셨으니 그 재능이 뛰어나다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습니다. 천하의 모든 지재가 드나드는 랑야각의 소각주이니 단지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견문이 넓은 것은 당연지사겠지요. 조금 전, 찻잔을 건넬 때 손가락 안쪽과 손바닥에 박인 굳은살을 보았는데, 붓을 쥐는 필부의 것만은 아니었으며 검을 쓰는 이의 것도 있었으니 무공 또한 가볍지는 않을 것입니다. 조금 전, 린 공자가 의복에 관한 이야기를 하였으니 저 역시 이에 관해 말씀드리자면, 린 공자는 저와 마찬가지로 무예를 닦고 있으면서도 너른 소매의 장포를 입고 있는데, 이는 실제로 적과 마주하여 검을 휘두르는 것보다는 상대적으로 랑야각 일을 돌보는 것이 더 일상적이며, 갑작스러운 상황을 대비해야 하는 입장 역시 아니기에 구태여 항시 소맷자락을 동여매고 있을 필요가 없는 탓이겠지요. 그리고 제 생각에 린 공자는 나름의 미학을 갖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저는 강호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으나, 번잡스러운 금릉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곳임은 알고 있습니다. 헌데, 린 공자는 한쪽 귓바퀴에 금속 장신구를 달았고, 눈에 띄는 색채의 소매가 넓은 옷을 입었으며, 머리카락을 얇게 땋기까지 하였으니, 강호에서 이만큼 멋을 내는 이가 또 있을까 싶습니다. 다만, 말씀드렸듯 제가 강호에 대해 아는 것이 적어, 틀린 추측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린신은 그 때, 답을 내어 놓는 임수를 향해 있던 제 아비의 눈이 크게 뜨이는 것을 보았다. 각주는 아들에 대해서는 그가 랑야각의 소각주라는 것 외에는 임수에게 이야기해준 것이 없었고, 임섭 역시 단 한 마디 귀띔해 주지 않았다. 그럼에도 임수가 잠시 살펴본 것만으로 린신에 대해 꽤 많은 것들을 상세하고 정확하게 읊었으니 놀라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지재를 다루며 대강이나마 임수에 대해 알고 있었던 린신보다 임수가 더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는 점 역시 감탄을 자아내는 데에 한몫 하고 있었다. 곧 두 어른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두 소년은 그 웃음이 곧 자신들이 내어 놓은 답이 정답이라는 뜻임을 알고 있었다. 임수는 뿌듯한 기분으로 린신을 향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지만 린신은 왜인지 모를 패배감에 불쾌해져서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고, 이에 임수는 다소 당황한 듯하였다.


  “수야.”


  각주의 부름에, 임수는 잠시 떠올랐던 당황스러운 낯빛을 갈무리하고 예를 갖추었다.


  “이 랑야각이 어떤 곳인지 궁금하여 아비를 따라 나선 것이라 하지 않았느냐. 오래 머물 여유도 없을 터인데 이리 방 안에만 발을 묶어 놓았으니, 내가 생각이 짧았구나.”
  “아닙니다. 두 분의 대화를 귀동냥하는 것도 제겐 즐거움입니다.”


  각주는 기특하다는 듯 임수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은 뒤, 린신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나는 석남과 풀어야 할 회포가 남았으니, 네가 수에게 랑야각 구경을 시켜주어라. 믿어도 되는 아이이니 네가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면 전부 보여주어도 괜찮다.”


  린신은 썩 내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아비를 거역할 수는 없었기에 그러겠노라 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임수는 들뜬 표정을 애써 감추며 린신의 뒤를 따랐다.

  임수는 린신의 안내를 받아 랑야각 곳곳을 돌아다니며 연신 눈을 빛내고 탄성을 질렀다. 특히 전서구가 가져온 지재들이 한데 모여 있는 지하 서고와 이 서고를 보호하기 위해 마련된 장치들을 보았을 때에는 아예 입을 다물지 못했다. 린신은 그런 임수를 보며 조금은 우쭐한 기분이 들었으나, 곧 고작 이러한 것에서 우쭐해지는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덕분에 두 번 다시 할 수 없는 경험을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린 공자.”


  노을이 질 즈음, 랑야각을 전부 다 돌아본 임수가 린신에게 공수를 하며 정중하게 인사했다. 린신은 그가 저를 높여주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제가 낮아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공자가 다 무어야. 나는 금릉 귀공자도 아니고, 유유자적 살아가는 강호인인 것을. 동년배 같으니 자질구레한 예는 버리고 편히 대할 테니 너도 그리 하도록 해.”


  팔짱을 지르고 시선을 멀리 둔 채 그리 말하는 린신을 보며 임수는 소리 죽여 웃었다.


  “왜 웃어?”
  “기분 나빴다면 미안. 나랑은 정 반대라고 생각했는데, 이리 보니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도 같아서 말이야.”


  임수의 말에 린신이 미간을 좁혔다.


  “너, 자존심이 강해서 굽히는 걸 싫어하지? 내가 먼저 예를 갖추었으니 응당 그에 맞는 예로 답해야 할 터인데, 이곳에서는 각주 다음으로 지위가 높은데다 스스로의 재능도 뛰어나 이제껏 타인을 향해 고개를 숙여본 일이 거의 없으니, 처음 보는 동년배에게 예를 다하는 것이 불편한 것 아니야?”


  린신은 답을 하는 대신 불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 봐. 딴청 피우는 걸 보니 내가 바로 맞힌 것이지? 나도 그렇다. 그래서 바로 알아봤어.”
  “구경 다 시켜줬으니 내 일은 끝났어.”


  말을 마치자마자 린신은 경공술로 랑야각의 담장을 뛰어넘어 바깥에 서 있는 키 큰 나무 꼭대기에 올라앉았다. 그는 늘 이 시각 즈음에는 높은 곳에 올라 노을빛을 감상하였다. 임수는 그런 린신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저도 똑같이 경공술을 하여 그가 있는 곳까지 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임수가 나무에 올라선 탓에 가지가 한 번 크게 흔들렸고, 혼자만의 휴식을 방해받은 린신이 짜증을 냈다.


  “아버지께선 간만에 벗과 즐거이 보내고 계실 터인데, 나 혼자서 무얼 한단 말이야? 나 역시 손님이고, 넌 랑야각의 소주(少主)이니 내 무료함은 네가 맡는 것이 옳지.”


  린신은 세상사에 무관심하고 오만하였으나, 그렇다고 타고난 성정 자체가 고약한 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다정한 편에 속했다. 다만 이때껏 그것은 마치 연약한 소동물을 어르는 손길처럼 저보다 약하고 모자란 것들에게 보이는 상위자로서의 다정함이었다. 그는 저와 비슷한, 혹은 어쩌면 저를 앞서 있는 지도 모를 이에게는 어떻게 다정함을 베풀어야 할지 알지 못했다. 임수는 린신의 복잡한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적당한 나뭇가지를 골라 아예 제대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여기서 보니 랑야산의 절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군.”


  임수가 제 발 아래 펼쳐진 풍광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린신은 그 말이 들리지 않는 것처럼 소매 안쪽으로 팔을 넣고 표정 없는 얼굴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치밀어 오르는 부정적인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금릉은 번잡한 곳이라 내 주변에도 항상 사람이 많이 있는데, 너와 같은 이는 이제껏 본 적이 없다. 물론 내가 아직 어려 만나본 사람보다 만나보지 못한 사람이 더 많기야 하겠지만……. 실례되는 말인 줄은 아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나는 네가 참 재미있다. 나와 비슷한 연배인데, 눈빛은 세상의 희노애락을 모두 경험한 노인의 것을 하고 있으니 말이야. 하기사, 모르는 것이 없다는 랑야각이 네 집이니 경험해 보지는 못 했더라도 알고는 있겠구나. 그래, 그리 생각하니 세상일에 영 흥미가 없는 것이 납득이 가네.”


  다시 한 번 저를 꿰뚫어 보는 임수의 말에, 린신은 놀랍고도 불쾌하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임수는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소각주께서 이 임수를 얼마나 아는지는 모르겠으나 내게는 소경염이라는 절친한 벗이 있다. 엄청 재미없는 녀석이야. 매사 진중하고, 장난도 칠 줄 모르고, 늘 옳고 그름이 명확하지. 고집도 세고. 이제까지도 그래왔지만 아마 앞으로도 그 녀석은 명확하게 옳은 길 외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을 거다. 난 녀석의 그런 점이 좋아.”


  랑야각에는 대량의 정세와 관련된 지재들이 있었고, 금릉의 황족과 귀족들 사이의 친분 관계 역시 그 사이에 기록되어 있었다. 다만 아무리 린신이라 해도 랑야각으로 모여드는 모든 정보를 다 머릿속에 담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고, 임수와 소경염의 친분에 대한 내용도 그저 어렴풋하게 기억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염은 황장자이신 기왕 전하……, 경우 형님 밑에서 지내고 있는데, 그래서 나는 기왕부에 걸음 할 때가 가장 즐겁다. 경우 형님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분이고, 앞서 말했듯 경염은 내 가장 소중한 벗이니. 경염의 올곧은 성정은 경우 형님을 닮은 것이다. 네가 아무리 세상사에 관심이 없다 해도 기왕 소경우를 칭송하는 대량 백성들의 목소리를 모르진 않을 테지. 훗날 내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적염군을 이끌고 이 나라를 지켜야 할 때 즈음이면 형님께선 천자가 되어 있으실 게다. 아마 역사에 길이 남을 성군이 되실 거야. 나와 경염은 그런 형님께 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을 바치겠노라 다짐했어.”


  임수의 말처럼, 랑야각이 대량 내에 위치한 이상, 린신이 아무리 무관심하다 한들 기왕 소경우에 관한 이야기를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단지 알고만 있을 뿐이었다. 이쯤 되니 슬슬 린신의 무표정한 낯 위로 속에 담고 있던 감정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혼자만의 취미를 방해 받은 것도 모자라 조금도 흥미롭지 않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는데, 임수가 스스로를 ‘손님’이라고 강조한 것이 마음에 걸려 랑야각의 소주로서 그를 두고 자리를 피할 수도 없는 탓이었다.

  “아, 그리고 운남왕의 여식인 예황도 알아?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웬만한 사내들보다 무공이 뛰어난데, 그런 예황과 내가 혼약을 맺게 생겼어. 태황태후께서 바라시니 마땅히 따르겠지만……, 예황도 나도 서로에 대해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서, 만약 예황에게 진정으로 연모하는 이가 생긴다면 태황태후께 간곡히 청하여 혼사를 무를 생각이야. 다정한 분이시니 예황의 마음을 헤아려주시겠지.”


  린신은 듣고 싶지 않다는 말 대신 나뭇가지에 길게 드러누워 버렸다. 임수는 그런 린신에게 힐끔 시선을 주었을 뿐 이야기를 멈추진 않았다.


  “그러고 보니 소경예는 좀 더 잘 알 수도 있겠다. 그 아이는 내 사촌 아우이지만 동시에 강호 방파 중 하나인 천천산장의 아들이기도 하니까. 하도 내 뒤꽁무니만 쫓아다녀서 좀 성가시긴 하지만, 그래도 아직 어린 나이에 그 아이처럼 문무를 고루 갖춘 아이는 드물 거야.”


  뒤이어서 임수는 소경예와 항상 함께인 언예진이라든가, 목예황의 동생인 목청이나 소경예의 동생인 사필, 사기와 같은 아직 한참 어린 아이들에 대한 이야기도 줄줄이 늘어놓았다. 린신은 임수가 저에게 대체 왜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짐작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곧 임수 스스로 그 이유를 밝혔다.


  “너도 같이 어울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금릉에 한 번 와 보는 것이 어때? 만약 온다면 경염에게 부탁해서 정빈마마의 맛난 간식을 얻어다 줄게. 우리 어머니께선 출신이 공주인 탓에 그런 것에 영 서투르셔서 말이다.”


  랑야각을 둘러보면서 임수는 그 안에 린신의 또래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것이 못내 안타까웠다. 누군가 벗을 삼고 싶어도 그럴 만한 마땅한 대상이 없는 것이었으니. 늘 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임수에게 그러한 환경은 너무나도 낯설었다. 같이 어울릴 수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임수의 말은, 바꿔 말하면 저와 벗이 되어 동시에 금릉에 있는 수많은 이들과도 벗이 되면 어떻겠냐는 제안이었다. 린신은 임수의 의중을 바로 알아들었고, 보란 듯이 얼굴을 크게 찌푸렸다. 그는 자신에게는 없고, 임수에게는 있는 그 모든 것들이 조금도 부럽지 않았고, 임수가 그러한 것을 이유로 저를 안쓰럽게 여기는 것이 싫었다.


  “어림없는 소리. 어울리는 것도 수준이 맞아야 하는 것이지.”


  린신이 제 오만함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말했다. 그 태도에 임수라고 기분이 상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저의 제안을 린신이 무례한 것으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금릉에서 뒤엉켜 놀던 이들 중 하나였다면 그러한 인내심은 발휘하지 않았을 것이나, 어찌 되었든 임수에게 있어 린신은 아비가 오랜만에 간신히 시간을 내어 방문한 친우의 아들이었고, 만난 지 고작 몇 시진 지났을 뿐인 낯선 이였으므로 최소한의 예는 지켜야 했다.


  “그래, 맞는 말이야. 경예나 예진, 혹은 그보다 어린 아이들은 랑야각 소각주 수준에 미치지 못하지. 어쩌면 나나 경염, 예황도 그럴지 모르겠다. 허나, 다른 사람은 몰라도 경우 형님은 그렇지 않아. 너만 괜찮다면 만나 뵙게 해 줄게. 랑야각 소각주라 하면 황장형께서도 기꺼이 만나주실 게다.”


  린신은 몸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그는 매우 못마땅한 낯빛을 하고 있었다.


  “글쎄, 관심 없다고! 대체 여기까지 따라 올라와서는 시끄럽게 종알대는 이유가 뭐야? 내가 세상일에 흥미가 없으리라 짐작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맞아. 이 세상 것이라면 그 무엇도 흥미롭지 않아. 그러니까 쓸데없는 소리 좀 그만해. 그리고 기왕 소경우가 제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내 수준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아?”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린신 때문에 임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린신 역시 이처럼 성을 내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이제껏 그가 생각하기에 쓸데없고, 관심이 가지 않는 주제에 대해 떠드는 이들의 이야기를 수없이 들어왔다. 이야기를 하는 이들의 입장에서는 흥미롭거나 말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었지만 린신의 눈높이에는 맞지 않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것들을 한 귀로 듣고 다시 한 귀로 흘려보내는 것에는 이미 익숙해진지 오래였다. 린신 스스로도 제가 왜 이렇게 흥분하였는지 그 연유를 알지 못했다. 잠시간 정적이 흘렀고,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맑게 한 임수는 린신이 쏟아낸 말들을 되짚어보다가 얼굴을 굳혔다.


  “경우 형님이 겨우 네 수준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임수는 제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린신의 목덜미에 가까이 대었다.


  “네가 감히 황장자를 모욕해?”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내뱉는 것이 십대 중반을 지나는 소년의 것이라기에는 매우 위협적이었으나 린신은 눈 하나 까딱 하지 않고 오히려 콧방귀를 뀌었다.


  “흥분하면 검부터 뽑아드니, 이 얼마나 야만적인가. 진정한 고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행실이군. 이런 자가 적염의 후계라니 실망이다.”


  뿌득, 하고 이를 가는 소리가 났다.


  “네 검을 가지고 와. 내가 고수인지 아닌지 직접 보면 알 것 아니야? 너야말로 입만 살아서 떠드는 하수인지도 모르지.”


  임수의 도발에 린신의 낯빛이 굳어졌다. 그는 제게 겨누어진 검날을 손등으로 밀어내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나무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따라와. 제대로 겨루어 보려면 넓은 장소가 필요하지 않겠어?”


  임수는 일단 뽑았던 검을 다시 집어넣고 나무에서 내려와 린신의 뒤를 따랐다. 린신은 랑야각 뒤편 크고 넓은 바위 위로 임수를 안내하고는 제 방에서 검을 가지고 나왔다.


  “소각주께선 실전 경험이 얼마나 있으신가? 근방의 소국들과 크고 작은 분쟁이 끊이지 않는 탓에 이 몸은 이미 수차례 전장을 겪었는데.”


  임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공적을 스스로 떠벌리는 것만큼이나 천박한 일은 없지.”


  린신은 임수에게 맞서 제가 상대해 본 살수들이 얼마나 강한 자들이었는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꾹 눌러 참았다. 그렇게 해야 임수의 낯빛이 일그러지는 꼴을 볼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연 린신의 예상대로 임수는 눈에 띄게 얼굴을 구겼다. 그리고 곧 두 개의 검날이 허공에서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맞붙었다. 두 사람 모두 내공이 만만치 않았기에 처음부터 쉬이 결판이 날 대결은 아니었다. 수차례 검날이 부딪치는 동안 노을이 지던 하늘에는 붉은 빛이 사라졌고, 그나마 남은 빛마저 점차 자취를 감추며 어둠이 짙어지고 있었다. 등불을 밝히러 올라온 랑야각 시종 하나가 두 사람을 목격한 것을 시작으로 구경꾼도 하나 둘 늘어갔다. 어느덧 바위 주변에 빈틈없이 사람이 모여들었고, 이쯤부터 린신은 임수에게 조금씩 밀리고 있었다. 곁에 서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웬만큼 내공이 상당한 이가 아니라면 알아차리지 못할 근소한 차이였으나, 대결에 임하고 있는 두 사람이 확연하게 알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린신은 이를 악물었고, 임수는 입 꼬리를 위로 당겼다. 임수가 한껏 힘을 주어 검을 휘둘러 일격을 가했을 때, 이를 가까스로 막아낸 린신은 제 손목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 순간,


  “둘 다 그만 하거라!”
  “예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이냐!”


  위엄 있는 두 목소리가 연달아 들려온 탓에 소년들의 동작이 멈추었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들의 아비들이었다.









융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