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 왼편에 있는 랑주라는 곳에는 강좌 지역을 세력 기반으로 하는 강호의 방파, 강좌맹의 본원이 위치해 있었다. 강좌맹은 명실상부 천하제일 방파였으나 그 수장은 무공을 전혀 하지 못하는 필부였으며, 심지어 아주 병약한 이였다. 그 필부, 공자방 으뜸 강좌매랑 매장소는 최근 몇 년을 금릉에서 지내다가 강호로 돌아와 다시 랑주에 자리를 잡았다.

  매장소의 정인은 린신이라는 사내로, 그는 랑야각의 소각주였는데, 두 사람이 연정을 나눈 지 어느새 4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그 사실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다. 매장소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터라 애초에 그에 관해 알려진 것이 많지 않은데다가 그 4년 중 2년을 강호가 아닌 금릉에 머물렀고, 다시 나머지 2년 중 1년 동안은 환자로서 랑야각에서 요양을 하느라 다른 이들에게 모습을 보일 일이 더욱 없었던 탓이었다. 린신 역시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아랫것들에게 시시콜콜 털어놓는 이는 아니어서, 비밀 아닌 비밀이 계속 유지되는 중이었다. 그 관계에 대해 아는 이들은 오로지 그들의 몇몇 측근들뿐이었다. 남들이 알아주든 말든 린신은 매장소가 제 것임을 과시라도 하듯 하루가 멀다 하고 랑야산과 랑주를 오갔는데, 그 반대의 경우는 좀처럼 없었기에 그들이 연인 사이임을 아는 그 소수의 사람들은 소각주가 종주를 가진 것이 아니라 종주가 소각주를 가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린신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매장소는 작고 어린 것들을 유독 아꼈는데, 첫째로는 그의 호위인 비류에게 그러하였고, 둘째로는 강좌맹의 막내 소녀에게 그러하였다. 기실 소녀의 나이는 비류보다 몇 살 더 많았으나, 비류는 매장소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아 보통의 강좌맹원과는 입장이 달랐고, 소녀의 체구가 어린 비류보다도 작았으며, 강좌 사람이 된 시기 또한 누구보다도 늦었기에, 강좌맹의 실질적인 막내는 그녀가 되어버렸다. 매장소는 소녀를 제 수하보다는 어린 동생 내지는 조카 즈음으로 여기며 예를 다하였으며 가까이 두고 손수 살폈다. 그러한 탓에 소녀는 매장소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가 많았고, 그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도 있었다.

  매장소의 가까이에 머문 덕에 소녀는 그의 정인인 린신과도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린신은 언젠가부터 랑주에 방문할 적에 제 시중을 들어줄 이를 대동하기 시작했는데, 소녀는 자연히 그와도 친해져서 린신과 매장소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들 역시 차를 나누며 담소를 즐기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 되었다.


  "헌데, 낭자는 어찌 소각주와 그리도 친밀한 것이오? 랑주에 자주 걸음하신다고는 하나, 나는 그분을 어릴 적부터 매일 뵈었는데, 가끔은 그런 나보다 낭자가 소각주와 더 가까운 것 같소."


  그 말을 듣고 소녀는 제가 소각주와 처음 대화를 나누었던 날을 상기하며 한숨부터 쉬었다.










***










  양 사형, 이제부터 내가 하는 이야기는 린 공자께서 모르도록 해주세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많으니 별로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물론 전혀 신경 쓰지 않으실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으니까요.

  어디보자, 그러니까 내가 린 공자와 가까워질 수 있었던 이유 말이지요……. 그건 아마 내가 그분과 처음 말을 섞었던 날 있었던 일에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린 공자께서 랑주에 와 계실 때에는 항상 종주의 기력을 보해줄 탕약을 손수 달이셨고, 그러면 종주께선 쓴 것을 싫어 하시면서도 군말 없이 드시곤 하셨지요. 아마 안 대부께서 그것을 보셨으면 괘씸하다며 역정을 내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 날은 종주께서 전에 없이 약 투정이 심하셨습니다. 물론 그 약은 린 공자께서 달인 것이 맞아요. 다만 종주께서 탕약을 드실 때에 그분은 어디론가 출타를 하신 상황이었지요.


  "종주, 어찌 그러십니까?"
  "종주!!"


  종주의 침전 안에서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두 타주의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종주의 목소리는 크지 않아서 바깥까지 전달되지는 않았으나, 곧 두 타주께서 어깨를 늘어뜨리고 침전을 나선 것으로 보아 오수에 들겠다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것 정도는 짐작할 수 있었지요. 나는 다만 방 문 너머로 들려온 그 작은 소란이 궁금하여 견 타주에게 어찌된 일인지 여쭈었어요.


  "무슨 일이 있습니까?"


  견 타주는 한숨부터 쉬었고요.


  "종주께서 탕약을 다 쏟아버리셨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말이야."


  나는 두 타주가 마주보며 한숨을 한 번 더 내쉬고 발걸음을 돌리는 것을 지켜보다가 종주의 침전 앞으로 가 조심스럽게 탕약을 쏟으신 연유에 대해 여쭈었어요. 드시다 남기신 적은 있었어도 아예 쏟아버리신 것은 처음이었기에 염려가 되었거든요. 물론 타주들께서 순순히 방을 나선 것으로 미루어 종주의 건강에 이상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요.


  "종주. 일부러 탕약을 쏟아버리시다니,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종주께서는 답하는 데에 잠시 뜸을 들이셨는데, 마치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은데 망설이고 계신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소생이 손에 힘이 없어 그렇지요."


  비록 병약한 몸이라고는 하나 종주의 손힘이 탕약 그릇 하나 정도를 제대로 들지 못하여 떨어뜨릴 정도는 아니에요. 게다가 견 타주의 신중한 성정으로 미루어 종주께서 탕약을 일부러 쏟았다는 이야기를 섣불리 뱉었을 리도 없고요.


  "오늘따라 거짓말에 서투르십니다."


  그렇게 말했더니 또 얼마간 말씀을 아니 하시지 않겠습니까.


  "소저. 괜찮으시다면 잠시 들어와 소생의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나는 곧장 그러겠노라 답하고 침전으로 들었지요. 종주께서는 올려 묶은 머리도 풀지 않고, 도포도 그대로 입은 채로 침상에 걸터앉아 계셨어요. 나는 그 앞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앉았습니다. 어째서인지 종주께선 쓸쓸한 얼굴이었어요. 어쩌면 슬픈 얼굴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도 이제 꽤 한참 전의 일인지라 소상히 기억나지는 않네요.


  "조금 전 일을 린 공자께서 알면 평소보다 몇 배로는 잔소리를 들으실 텐데요."


  종주께서 탕약을 남기실 때마다 린 공자께서는 내원을 산책하던 내게도 다 들릴 정도로 목소리를 높여 일장 연설을 했거든요. 몇 번 그러고 나면 한동안은 그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종주께선 탕약 그릇을 깨끗이 비워내셨지요. 그래서 부러 그리 이야기하였는데,


  "린 공자 이야기는 하지 마세요. 그저 제 말동무나 해 주시지요."


  이 때부터 종주의 낯빛이 눈에 띄게 언짢은 빛으로 변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소 무례하지만 종주의 말에 반하는 질문을 하고 말았습니다.


  "혹 린 공자와 다투셨습니까?"


  종주께서 친우와 다투시는 모습은……, 아, 이 때에는 내가 아직 두 분의 관계를 모를 때입니다. 아무튼 그런 모습은 쉬이 상상이 되지 않았으나 정황상 그것 말고는 짐작 가는 것이 없었지요. 내 물음에 종주께서 낮게 웃었는데, 그 웃음소리에 옅은 분노가 묻어 있었기에 나는 내 짐작이 어느 정도는 타당하였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투다니요. 그럴 리가 있습니까?"
  "아까도 말씀 드렸지만 오늘따라 전부 티가 나십니다만."


  결국 종주께선 거짓 웃음을 거두셨습니다. 애초에 그리 오래갈 속임수도 아니었어요. 그 분은 내 상전이기는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 감사하게도 나를 친누이처럼 대하셨고, 누이동생에게 끝까지 거짓말을 하실 분은 아니니까요.


  "완연한 봄이 아닙니까. 린 공자는 꽃구경을 하러 갔지요."
  "……그러니까, 종주를 홀로 둔 채 말이지요?"


  종주께서 그렇게 한숨을 지으시는 것은 처음 보았습니다.


  "어쩌겠습니까. 소생의 몸이 이러하여 따라 나설 수가 없을 것이 자명한데, 린 공자라도 봄을 즐겨야지요."


  나는 웃음이 새려는 것을 참아야 했어요. 강호를 호령하는 강좌맹 종주에게 그리 아이 같은 면이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탕약을 쏟아버리신 것은 일종의 시위였던 거에요. 나는 부러 과장된 몸짓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습니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종주께서 손에 힘이 없어 탕약을 쏟았다고 소문을 내야겠어요! 린 공자께서 그 소식을 들으면 곧장 이리로 오실 것이 아닙니까."


  종주께서는 픽 소리를 내며 웃고는 손을 뻗어 내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어 주셨습니다. 그러고서 보니 종주의 표정이 조금 풀린 듯 하였기에 나는 조금 안도하였지요.


  "되었습니다. 꽃들의 춤에 취해 있을 진데, 그런 시정잡배는 그냥 두세요. 소생이 이리 보여도 강좌맹의 수장이 아닙니까. 계속 시정잡배와 어울려서는 면이 서질 않지요."


  하지만 여전히 린 공자에 관해서는 단단히 토라진 말투여서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어요.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우물쭈물 하고 있으니 종주께서는 예의 그 온화한 얼굴로 돌아와서는 내 손을 한 번 꼭 잡았다가 놓아주시며 다시 미소를 보이셨습니다.


  "이리 몇 마디 나누고 나니 기분이 한결 나아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저. 이제 소생은 오수에 들까 합니다."


  그렇게 안녕히 주무시라는 인사를 남기고 종주의 침전을 빠져나온 것이 그 날 점심께의 일이었어요.







  "장소! 어디 있나! 장소!!"


  노을이 질 무렵, 종주를 찾는 린 공자의 목소리가 들리기에, 나는 읽던 서책을 놓고 나가보았지요. 양 사형도 알겠지만 내 처소가 종주의 처소와 가깝지 않습니까.


  "거기 귀여운 낭자, 혹시 장소를 못 보았는가?"


  린 공자께서 나를 보며 물었어요. 그것이 나와 린 공자의 첫 대화였습니다. 린 공자의 관심은 언제나 종주께로만 향하기 때문에 그간 꽤 가까이 있었는데도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이지요.


  "제가 점심 즈음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에 오수에 든다 하시었습니다만……."
  "침전에는 없던데……. 거 참, 어딜 간 게야?"


  말은 그렇게 해도 목소리에 다급한 기색은 전혀 없었기에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랑주에는 종주를 모시는 이들만 있을 뿐 벗이라 할 이는 하나도 없었으나. 린 공자께서 자주 걸음하시니 다행이라 여겼는데, 그 벗이 종주님을 두고 홀로 봄을 즐기다 온 것이 아닙니까. 물론 동시에 종주의 정인인 분이기도 하시지만, 말했듯 그 때에는 내가 아직 그 사실을 몰랐으니까요. 만약 그 때 이미 두 분의 관계를 알고 있었다면 한숨 정도로 그치지 않았을 겁니다. 아무튼 곁에서 지켜보는 입장에서도 린 공자께서 배려가 부족하셨음은 자명한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모르는 듯 하니 내가 한숨을 쉬는 것도 당연하지 않습니까.


  "모르긴 해도 종주께서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린 공자이시지요."
  "뭐? 내가 뭘 어쨌다고?"


  린 공자께서 내게 가까이 다가오며 따지듯 물었는데, 농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보였습니다.


  "홀로 꽃구경을 다녀오셨다 들었습니다. 날이 이리 따뜻해졌으니 겨우내 방 안에서만 지내신 종주께서도 나들이를 다녀오고 싶지 않으셨겠습니까."


  내 말을 들은 린 공자께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했어요.


  "무슨 소린가? 미인방 만드는 일 때문에 랑주의 소문난 미인들을 살피러 기루에 다녀오는 길인데."
  "그렇다면 종주께서 말씀하시던 꽃이라는 것이 해어화였나 보네요."


  산과 들판에 핀 꽃들 사이를 뒹굴다 돌아왔다 해도 하루 종일 홀로 방에만 앉아있던 정인을 생각지 않은 것이니 문제가 될 텐데, 기루라면 이야기가 더 심각해지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그 분은 그저 어깨를 으쓱 하고는 툇마루에 걸터앉는 것이 아니겠어요?


  "뭐, 나들이라도 다녀오는 모양이군. 여긴 랑주이니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것이고."


  심지어 옆 자리를 손으로 툭툭 치며 곁에 서 있던 내게 앉으라고 하더이다. 평소에는 누구보다 총명하신 분이 어찌하여 연정을 나누는 데에는 그리 아둔하게 구는 것인지……. 아, 미안합니다, 양 사형. 내가 린 공자를 모시는 분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네요. 하지만 나도 그 때를 생각하면 어이가 없고 황당하여 그러니 이해해주세요. 어디까지 이야기 했지요? 아아, 그래, 린 공자께서 나더러 옆에 앉으라고 하기에, 얼굴이야 자주 보았지만 사실상 초면이나 다름없는지라 나는 다소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았습니다.


  "최근 장소가 누이 삼은 것이 낭자였지?"
  "누이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낭자가 비류하고는 달리 어엿한 성인이니 장소가 예를 갖추는 것이지, 그것만 빼면 비류에게 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걸, 무얼."


  내가 종주께서 주시는 과분한 애정을 떠올리며 얼굴을 붉히자, 린 공자께서는 재미있다는 듯 웃으셨습니다. 그 탓에 나도 조금 더 골이 났고요.


  "장소가 누이처럼 아끼는 낭자이니 내 특별히 한 가지 질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내 이래봬도 랑야각을 책임지고 있지 않은가? 보통의 경우라면 랑야각의 지재는 값을 지불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한 번만 특별히 값을 받지 않고 답을 내어 주지."


  하지만 나도 참 철이 없는 것이, 그 말에 홀랑 넘어가서 골이 난 것도 잊고 말았습니다. 기실 그다지 궁금한 것은 없었으나 다시없을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기는 싫어서 머리를 쥐어짰어요.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질문할 것은 쉬이 떠오르지 않았고, 결국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나를 기다리던 린 공자께 아주 형편없는 질문을 해버렸지요.


  "종주께도 연정을 나누는 이가 있습니까?"


  뜬금없는 질문에 린 공자께선 조금 당황한 것 같았지만 이내 입이 찢어져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 때의 나는 종주와 린 공자의 관계는 물론이고, 종주의 과거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었기에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최소한 종주께서 과거에 적우영을 이끌던 임수 장군이라는 것만이라도 알았다면, 임수 장군은 운남의 예황 군주와 혼약을 한 사이이니 그런 질문은 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질문 덕에 나는 나보다 먼저 강좌의 사람이 된 이들도 모르는 것 한 가지를 알게 된 거에요.


  "장소에게도 정인은 있지. 혹 그것이 누구인지 궁금하진 않고?"


  이쯤 되면 양 사형께서도 다음 상황을 예측할 수 있겠지요? 나는 종주와 가까이 지냈지만 그 분의 거처에 정인이라 할 만한 여인이 드나드는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린 공자께선 종주께 정인이 있다 하시니, 아무래도 의아하여 그 여인이 누구인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 때 린 공자께서는 굉장히 들뜬 낯을 하고 계셨지요


  "나일세."
  "예?"
  "내가 장소의 정인이라 했네.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고고하고 우아한 강좌맹 종주와 소문난 한량인 랑야각 소각주가 연인 사이라는 이야기를 쉬이 믿기는 힘들었습니다. 이런, 제가 또 말실수를 한 것은 아닌지요. 아, 그래요, 한량이라는 말에는 양 사형도 동의하신다니 다행입니다. 린 공자께 그것이 참말이냐고 재차 물었으나 대답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불현듯 낮에 종주께서 토라졌던 일과 린 공자가 종일 기루에 있었다는 사실이 동시에 떠오르는 것이 아닙니까.


  "린 공자께서 진정 종주의 정인이시라면, 혹 종주께 오늘 기루에 가신다는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기루라고 하지는 않았네만 일 때문에 한나절 정도 출타를 할 것이라고는 이야기 했지. 장소는 랑주 내의 일에 소식이 빠르니 구태여 소상히 밝히지 않아도 전부 알게 될 터이니."


  ……양 사형. 슬슬 문제가 보이지요?


  "제대로 이야기를 하셨어야 하지 않습니까? 다른 곳도 아니고 기루인 것을요. 정인이 따로 있는 분이 걸음하시면 오해를 받기 좋은 곳이 아닙니까. 종주께선 정인이 그런 곳에 갔다는 사실을 다른 이들을 통해 알게 된 셈인데요."


  린 공자께서는 또다시 내 말을 영 이해하지 못 하겠다는 낯빛을 하였습니다.


  "그게 뭐 어때서?"


  이마를 짚는 행동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온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린 공자. 혹 종주 이전에 다른 이와 연정을 나눈 적이 있으십니까?"
  "이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내게는 장소뿐이네."


  세상 모든 것을 아는 랑야각의 소각주께선 마치 신선마냥 세상사 그 자체에는 무심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미인을 좋아하신다 하여 동정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해봤습니다. 아니, 동정이기 이전에 잠시라도 연정을 나눈 이가 단 하나도 없을 줄은……. 아, 이건 양 사형도 몰랐던 건가요? ……그렇다면 우리 이야기는 더더욱 린 공자께는 비밀이어야 합니다. 아시겠지요? 약속한 겁니다. 감사합니다, 사형. 아무튼 나는 강좌맹의 일원으로서 내가 모시는 종주께서 마음이 다치시는 일이 있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 사내들이 기루에 가는 것은 기녀들의 치마폭에 싸여 술과 음율에 취하기 위함이지요. 린 공자처럼 일을 하기 위해 가는 이는 드뭅니다. 그러니 일 때문에 출타를 한다는 것과 기루에 드는 것은 보편적으로는 어울리지 않지요. 일을 처리하러 간다던 정인이 기루로 향하였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종주께서 어떠한 생각을 하셨겠습니까. 린 공자께서 달여 놓고 가신 탕약을 엎어버리고 입도 대지 않으셨다니까요?"


  그제야 린 공자의 얼굴이 굳어지더니 곧 그 낯빛이 잿빛으로 변하였습니다.


  "내 평소에도 여인의 치마폭을 즐기지는 않는데다가 장소와는 워낙 마음이 잘 통하였기에 오해가 생길 수 있음을 간과했어! 이런 실수를 하다니……. 이 린신이 그 정도로 매장소에게 빠져서 영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게지. 내가 어찌하면 좋겠는가?"


  답지 않게 당황한 듯한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는데, 린 공자께선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치 공황 상태 같았달까요.


  "어쩌긴요. 얼른 종주를 찾아서 사죄를 하고 오해를 푸셔야지요."


  네, 맞아요. 린 공자께선 그 간단한 것조차 생각 못 할 정도였어요. 믿기지 않지요? 저도 그렇답니다. 그 정도로 종주를 연모하는 마음이 크다고 생각해야겠지요. 그 때부터 린 공자께선 종주를 찾는 데에 매우 적극적으로 돌변했어요. 경공술로 지붕 사이를 날아다니며 종주의 이름을 외치는 린 공자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나는 방으로 들어갔습니다. 어차피 종주의 체력으로는 급작스럽게 먼 곳까지 움직이기는 힘들 터이니, 린 공자께서 그 정도로 열심이시라면 금방 재회하게 될 것이고, 비록 실수를 했으나 그 분이 결코 아둔한 분은 아니니 금세 일이 해결될 것은 자명했으니까요.










***










  견평은 벌써 몇 시진 동안이나 제 처소에 머물고 있는 매장소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저가 필요하여 찾은 것이 아니라 단지 몸을 숨기기 위해 찾은 것임을 아는 탓이었다.


  "이리 찾아와 폐를 끼쳐 미안하네."


  매장소가 견평의 심경을 헤아리며 사죄의 말을 건넸다. 그러나 그는 당장은 그 방을 나설 생각이 없는 듯 하였다.


  "대체 린 공자와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피하는 것입니까?"


  견평이 조심스레 물었다. 매장소의 낯빛이 슬프게 변하였다. 강좌맹 막내 소녀는 알지 못했으나, 이 날의 작은 소동은 아직 불안정하게 떠돌고 있던 매장소의 마음에 큰 파란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 치에게 어쩌면 더는 내가 필요치 않을 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얼굴을 마주할 수가 없지 않은가."
  "어찌 그리 생각하십니까? 제가 보기에 린 공자께선 결코―"


  그 순간, 큰 소리를 내며 방 문이 열렸다. 문 앞에는 굳은 표정을 한 린신이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은 곧장 매장소를 향해 있었다. 매장소는 그 시선을 피해 고개를 숙였다. 린신은 매장소의 팔을 붙잡아 일으켜 세우고는 그대로 잡아끌어 밖으로 데리고 나갔다. 매장소는 린신의 힘을 당해낼 수 없어 마지못해 그를 따르는 꼴이었다.


  "……아파. 놔 주게."


  매장소가 그리 말했을 때에야 린신은 그를 놓아주고 걸음을 멈추었다. 매장소를 향해 돌아선 린신은 불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평소의 그라면 결코 짓지 않을 표정이었다.


  "장소. 내가 잘못했네."


  매장소는 고개를 들어 대뜸 저에게 사죄부터 하는 린신을 쳐다보았다.


  "자네가 생각하는 그런 것이 아니야."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는 알고?"


  매장소는 제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 자네에게 그간 얼마나 모질게 대했는지, 나 스스로도 모르지 않아. 그러니 언제고 자네가 나를 버린다 해도―"
  "장소…!"


  린신이 매장소의 말을 끊으며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매장소는 몸을 비틀어 린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뒤로 조금 물러났다. 힘으로 붙잡으려면 얼마든지 그리 할 수 있었지만 린신의 손은 그저 허공에 멈추어 있을 뿐이었다. 매장소는 그 손끝에도 닿고 싶지 않다는 듯 몸을 움츠렸다.


  "내게 거짓말을 하고 간 곳이 기루였는데, 그런 뜻이 아니면 무엇인가? 게다가 그 기루가 어떤 곳인지 자네도 잘 알지 않아?"


  린신이 찾아간 기루는 랑주에서 그 규모가 가장 큰 곳으로, 천하에서 가장 고고한 아름다움을 지닌 기녀들이 모이는 곳이면서 동시에 강좌맹이 운영에 관여하고 있는 곳이기도 하였다. 그처럼 규모가 큰 기루는 또 다른 큰 기루와 연락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강좌맹이 정보를 모으는 수단 중 하나였다. 물론 강좌맹과의 연관은 대외적으로는 비밀이었으나, 매장소의 정인이자 랑야각의 소각주인 이가 그것을 모를 리는 없었다. 린신은 두 손으로 얼굴을 비비며 마른세수를 하는가 싶더니 그대로 고개를 푹 숙였다.


  "금세 내 귀에 들어올 것을 알면서도 굳이 그 곳을 찾은 것부터가 이미 나와는 끝이라는 의미가 아닌가? 그것이 아니라면 애초에 나를 기생 중에서도 천하디 천한 창기처럼 여긴 것인가? 이러려고 나를 그리 필사적으로 살렸는가?"


  린신은 다급히 매장소의 양 손을 붙잡았다. 매장소는 또다시 이를 뿌리치려 하였으나, 이번에는 린신이 쉬이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 것이 아니야! ……미인방 때문이었네. 봄은 여인들이 꽃처럼 피어나는 계절이 아닌가. 그러니 지금 보는 것이 가장 확실하지 않겠어? 정 내 말을 못 믿겠다면, 내가 기루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 행수에게 물어보면 될 것 아닌가? 나는 정말로 그 곳에 일 때문에 간 것이었네, 장소. 내가 서툴러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것을 간과했네. 나는 자네가 처음이니까. 허나 두 번째는 없네. 내게는 자네뿐이야."


  린신은 숨도 쉬지 않고 절박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매장소가 더는 잡힌 손을 빼내려 하지 않자, 린신은 다소 안심하며 그에게 바짝 다가섰다. 조심스레 손을 놓았으나 다행히 매장소는 물러서지 않았다. 린신은 한 팔을 살며시 매장소의 허리에 두르고 다른 쪽 손으로는 뒤통수를 받쳐 제 품에 안았다. 매장소는 순순히 린신에게 제 몸을 맡겼다.


  "……매장소는 임수의 부호였네. 모든 것이 끝나고 내게 매장소로서의 시간이 남았음을 알았을 때, 그 시간을 살아갈 가치가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은 자네뿐이었어. 나를 매장소인 채로 아껴준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그런데 자네가 더는 곁에 머물러 주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니……."


  린신은 매장소를 좀 더 단단히 안았다. 그리고는 이내 그를 두 팔로 받쳐 들었다.


  "린, 린신…?"


  매장소가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린신을 불렀다. 그새 눈물로 얼룩진 얼굴이 이제는 한껏 붉게 물들었다. 린신은 그저 웃으며 매장소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어느덧 해가 거의 다 넘어가지 않았나. 봄이라고는 하나 해가 지면 아직 자네에게는 추운 날씨야. 고뿔이 들기 전에 들어 가세나. 내 금세 따뜻하게 해줄 터이니."


  린신은 매장소를 소중히 품에 안고 침전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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