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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08

새로운 이름






  임수는 어둠뿐인 공간에 홀로 서 있었다. 곁에서 저를 지키던 벗, 랑야산의 절경, 분주히 움직이던 랑야각원들. 모든 것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 한 줄기 빛조차 없는 그곳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의 몸뿐이었다. 임수는 적염군의 붉은 갑주를 둘러 입은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여기저기 굳은살이 박인 투박한 손이 보였다. 평생 단련을 해온, 너무나 익숙한 손이었다. 그러나 이제 더 이상 그 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옳았다. 화한독을 해독하고 얻은 용모는 백면서생의 것이며 단련할 수도 없는 몸이니 굳은살도, 근육도 없어야 할 터였다.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옛 모습을 그리워하여 꾸는 꿈인 것일까. 그리운 것은 비단 용모 뿐만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다른 것들은 보이지 않는 것일까. 혹 이 어둠이 그들을 볼 수 없도록 씌워진 장막인 것일까. 그렇다면 무엇을 어찌 하여야 이 장막을 걷어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애초에 이 칠흑같은 어둠이 정말로 그러한 역할을 하는지조차 알 수가 없지 않은가. 임수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어둠 뿐인 공간을 바라보았다.


  “이곳은 무(無)의 공간일세.”


  임수의 생각에 답을 하듯 어디선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임수는 목소리의 주인을 찾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목소리는 공간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어느 곳에서부터 들려온 것인지 쉬이 알 수 없었다.


  “누구십니까! 무의 공간이라니,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임수가 허공을 향해 외쳤다. 그 순간, 새까만 어둠이 일시에 사라지더니 밝은 빛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너무나 눈이 부셔서 앞을 보기 힘들 정도로 밝은 빛이었다.


  “부디 나와의 약조를 잊지 말게.”


  앞서 들었던 것과 같은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다만, 이번에는 소리가 시작된 방향이 명확했다. 임수는 소리의 진원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새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아직은 눈이 빛에 적응하지 못한데다가 마치 안개가 낀 듯 시야가 흐릿하여 그가 누구인지까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나마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입고 있는 푸른 도포의 끝자락 정도였다.


  “제가 무슨 약조를 했습니까?”


  임수가 목소리의 주인에게 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차 빛에 익숙해져 사내의 윤곽 역시 점점 더 명확하게 보였다. 다만, 흐린 시야는 여전해서, 눈을 제대로 뜨게 된 것만으로는 그의 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흐리게 번진 사내의 얼굴 윤곽에서 유일하게 붉은 빛을 띠는 것, 아마도 입술일 그것이 움직였다. 임수의 질문에 답을 하는 듯했다.


  “……를 ……해주게. …… ……도록.”


  그러나 조금 전과는 달리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임수는 사내에게 다가갔다. 자신이 중요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오히려 사내와의 거리는 더욱 벌어졌다. 눈에 보이는 벽은 없었으나 무언가에 의해 가로막힌 느낌이었다. 오기가 생긴 임수는 보다 발을 재게 놀려 사내를 향해 달렸다. 그럴수록 사내는 더욱 빠르게 멀어져갔다.




***




  잠들어 있던 임수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일으켜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디로 보나 랑야각이 분명했다. 방 안 가득한 탕약 냄새에, 임수는 자신이 꿈에서 깨어나 현실로 돌아왔음을 실감하였다.


  ‘꿈……? 무슨 꿈이었지?’


  다만, 그 꿈이 어떠한 내용이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어렴풋이 머릿속에 남아있는 것은 자신이 랑야각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다는 것과 그곳에서 누군가와 마주쳤다는 것 정도였다. 그곳이 정확히 어디이고, 만난 이는 누구인지와 같은 구체적인 것은 전혀 떠올릴 수 없었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주 기묘한 느낌을 남긴 꿈이라는 점이었다. 본래 꿈이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도 있고, 이처럼 금세 아득해져버리는 것도 있는 법이었으니, 간밤에 꾼 꿈을 잊었다 하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수는 직감적으로 자신이 잊어버린 꿈이 무언가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려 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먼저 떠난 이들이 내게 무언가 이야기 해주고픈 것이 있었던 걸까.’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심상치 않은 꿈이었던 만큼 예사롭게 넘기면 안 될 일이었으나, 사실상 기억나는 것이 전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지라 별다른 조치를 취할 수도 없는 까닭이었다.


  ‘혹 그날의 일에 대해 반드시 알아야 함에도 여전히 알지 못하는 일이 남아 있는 것일까.’


  임수는 저도 모르게 옷소매를 만지작거렸다. 생각에 잠기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러고 있기를 약 일각, 린신이 임수의 아침 식사와 탕약을 갖고 방으로 들어왔다. 임수는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대뜸 지난밤 꿈에 대한 이야기부터 늘어놓았다. 그리고는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일과 관련하여 알려주지 않은 정보가 있는지 따지듯 물었다.


  “자네가 필요하다고 이야기 한 정보 외에도 자네가 필요로 할 법한 것들과 대량 안팎의 의미 있는 변화에 대해 자네에게 전해주지 않은 것은 단 한 가지도 없네. 이 랑야각에 누락된 정보가 있을 리도 없고.”


  린신은 언제나처럼 임수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어보면서 평온한 말투로 답하였다. 아무리 보아도 그 답에 거짓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쩐지 불안하네. 아무래도 내가 무언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겠…….”


  임수는 갑작스레 제 입술에 바짝 다가온 무언가 때문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어느새 진맥을 마친 린신이 반상에 놓인 음식 중 하나를 젓가락으로 집어 임수의 입 앞에 갖다 댄 것이었다. 임수가 입을 벌릴 생각은 않고 어이없다는 듯한 낯으로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을 본 린신은 젓가락을 든 손을 좀 더 앞으로 내밀었다. 그 기세에 마지못해 젓가락 끝에 걸린 것을 받아먹자, 린신의 만면에 흡족한 미소가 떠올랐다.


  “자네는 그저 자네 뜻대로 하게. 만약 자네가 정말로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이라면 먼저 간 7만여 명 중 누군가가 다시 찾아와 알려주지 않겠나. 그 때에는 절대 잊을 수 없도록 보다 확실하게 말해주겠지.”


  린신이 임수에게 젓가락을 넘겨주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임수는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아무 걱정 말게.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는 랑야각은 훗날, 자네가 성공하리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네. 내 랑야각주로서 하는 말이니 믿어도 좋아.”


  논리가 결여된 호언장담이었으나, 린신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에 임수는 저도 모르게 안도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절세가인이 저를 향해 짓는 미소를 마주하자, 린신은 제 심장을 제어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심장은 그야말로 미친 듯 뛰었다. 원래부터 린신은 임수와 함께 있을 때면 그를 향한 연정으로 심장 박동이 빨라지곤 하였으나, 근래 들어 간혹 숨이 찰 정도로 요동치는 일이 생기는 것은, 천상의 미모라 해도 과언이 아닌 임수의 새 얼굴 때문이었다.


  “그……, 각의 일이 바빠서 말일세. 이만 가 보아야겠는데……. 식사를 마치면 탕약도 남김없이 다 먹어야 하네.”


  린신은 피가 끓어올라 터질 듯 붉어진 얼굴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제 당부에 대한 임수의 답도 기다리지 않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재빨리 방에서 나가버렸다. 그 탓에 린신은 자신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임수의 양 볼이 다소 상기되어 있었던 것과 그의 심장 역시 자신의 것만큼이나 세차게 뛰고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




  “흠…….”


  린신에게 손목을 맡긴 임수는 잔뜩 긴장한 채 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병자에게 표정을 숨기는 것에 익숙한 의원에게서는 그 무엇도 읽어낼 수 없었다. 린신은 눈동자만 굴려서 안절부절 못하는 임수를 쳐다보았다. 무표정한 낯으로 그리 쳐다보니 임수는 더욱 긴장을 했다. 그는 린신이 단지 그런 저의 모습이 귀여워 부러 시간을 끌고 있음을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나쁘진 않네.”


  한참 뜸을 들이며 내어놓은 결론에 임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 해도 지금의 자네는 혼자서 랑야산을 내려갈 수 없어.”


  하지만 따라붙은 한 마디에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랑야산의 산세가 험하기는 하나, 천천히 내려가면…….”


  린신이 고개를 가로젓는 바람에 임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새벽같이 출발해도 자네 체력에 맞춰 쉬엄쉬엄 내려가면 중턱 즈음에서 해가 지고 말 걸세. 산짐승의 먹잇감이 되기에 딱 좋지.”
  “아랫것들 몇을 붙여주면 되지 않나.”
  “각원들 모두가 어느 정도 무공을 쌓기는 하였으나, 그들에게는 그들의 일이 있네. 노비들은 무공을 하지 못하니 데려가도 소용없을 테고.”


  임수가 대안을 제시하고, 린신이 적당한 핑계를 대며 거절하는 것이 두어 번 정도 더 반복되었다. 그러는 사이 임수의 눈동자는 흔들림을 멈추었고 대신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그럼 어쩌라는 겐가!!”


  임수는 제 앞에 놓인 찻상을 세게 내리쳤다. 예전의 그였다면 나무로 된 찻상은 부서지고도 남았을 것이나, 지금은 그렇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손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노기의 원인은 이처럼 형편없는 약골로 변해버린 몸뚱이였다. 몸이 이렇지 않았다면. 하지만 이는 후일을 도모하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니 애초에 기왕과 적염군을 제거하려는 음모가 없었더라면……. 결국 분노의 끝에는 그 탐욕스러운 자들이 있었다.


  “나를 도와줄 것이라 하지 않았어? 랑야산에 갇힌 채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천자의 눈과 귀를 가린 그들을 처단하고, 잘못된 판단으로 충신과 제 혈육의 목숨을 빼앗은 천자로 하여금 모든 일을 바로잡게 해야 하는데, 시작부터 발목이 잡혀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루빨리 사람을 모아야 했다. 여기서부터 시간을 끌면 금릉으로는 대체 언제 돌아간다는 말인가. 임수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누가 랑야산에 가둬두겠대?”


  린신은 임수의 자그마한 주먹을 제 큰 손으로 감싸 쥐었다.


  “내가 함께 가겠네. 아버지께서 아직 각에 계시기도 하고, 근래 들어 내 일은 자네를 돌보는 것이었으니, 내가 자네를 따라나서는 것에는 문제가 전혀 없어.”


  임수의 심장박동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이내 얼굴에 붉은 빛이 돌기 시작했다. 린신은 그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자네, 어디 안 좋은가? 열이 오르는 것 같은데…….”


  린신이 임수의 이마로 손을 뻗자, 임수는 상체를 뒤로 살짝 젖히며 그 손길을 피했다.


  “서…… 성을 냈으니 그런가 보지!”


  린신은 여전히 단단하게 쥐어진 임수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임수는 그 손도 재빨리 거두어들였다.


  “자네가 함께 간다면 산을 내려가는 것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제 다음 문제로 넘어가 보자고. 내 이름 말이야.”
  “이름?”


  다소 급하게 화제를 전환하긴 하였으나 린신은 순순히 그에 응해주었다.


  “진실이야 어떠하든 ‘임수’는 역적의 이름일세. 이 이름으로는 금릉에 들 수 없네. 얼굴이 전혀 다르니 동명이인이라 생각할지 모르나, 쓸데없이 이목을 끌 필요는 없지. 게다가 당장 산을 내려가서도 문제야. 자네, 저 밖에서도 나를 임수라 부를 텐가? 그러다가 누군가가 듣고 임수가 살아있다는 소문이라도 나면?”


  금릉 사람들 모두가 효기장군 임수를 알고 있었다. 단지 생김이나 이름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그의 성품까지도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그는 경성에서 제일가는 유명인이었다. 그리고 이는 금릉에 거주하는 사람뿐 아니라 경성을 드나들며 장사를 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어디선가 들려온 ‘임수’라는 이름을 쉬이 지나칠 리 없었다. 그러한 장사치들은 정보통으로 여겨지기도 하니, 그들이 금릉에 들어가서 임수의 이름을 들었다고 이야기한다면…….


  “과연. 그 이름은 위험하겠군. 가명이 필요하겠어. 혹 생각해둔 것이 있는가?”


  임수는 종이를 꺼내어 세 개의 글자를 적어, 린신에게 건넸다.


  “매장소(梅長蘇).”


  린신이 그 글자들을 순서대로 읽었다.


  “가명을 지어야겠다 생각한 순간 떠오른 이름일세. ‘매’는 아버지께서 강호에서 쓰시던 이름인 ‘매석남’에서 따온 것이지만, 다른 두 글자는 그 뜻을 생각해보기도 전에 떠오른 것인데, 다른 것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야. 자네에게 의견을 묻고 싶네.”


  린신은 임수가 적은 ‘매장소’라는 글자를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어보았다. 읽으면 읽을수록 지금의 임수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성으로 쓰일 ‘매(梅)’ 자는 단지 임섭이 강호에서 쓰던 이름에서 따온 것이라 하나, 겨울의 추위를 뚫고 봄을 불러오는 꽃이니 매령의 피로 물든 눈밭에서 돌아와 봄을 준비하는 이의 이름에 쓰이기에 좋았다. ‘장(長)’ 자는 임수의 생이 가능한 한 길게 이어지기를 바라는 린신의 바람에 딱 들어맞았다. 당사자에게 있어서도 대업을 성공시키기까지 얼마의 시일이 걸릴지 모르니, 명줄은 최대한 길게 이어가는 편이 좋을 터였다. ‘소(蘇)’ 자 역시 죽음의 문턱에서 소생한 임수의 현 상황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었다. 과연 이보다 잘 어울리는 이름이 있을까.


  “이대로도 괜찮은 것 같네. 더 좋은 글자가 떠오른다면 모를까, 굳이 다른 것을 생각해보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의미를 떠올리기도 전에 글자가 먼저 떠올랐다 하였으니, 어쩌면 자네 어깨에 얹혀있는 7만의 영혼이 준 이름인지도 모르지.”


  린신은 글자가 적힌 종이를 다시 임수에게 건넸다. 린신의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세 글자가 마치 처음부터 제 이름이었던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앞으로 내 이름은 매장소일세. 익숙해져야 하니, 지금 이 순간부터 그리 불러주게. 임수라는 이름은…….”


  새 이름을 갖게 된 사내가 손목에 걸린 팔찌에 새겨진 옛 이름을 어루만졌다.


  “정말 필요할 때가 아니라면 꺼내지 않을 걸세.”


  임수의 이름이 새겨진 적염군 팔찌는 작은 나무함 안으로 사라졌다. 이제 그는 매장소가 되었다. 화염 속에서 태어나는 봉황처럼 온통 불바다가 되어버렸던 지옥과도 같은 그 날의 매령에서 돌아와, 정말로 선계의 어느 봉황과 같은 이름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




  랑야각은 매년 고수, 방파, 부호, 공자, 미인의 다섯 가지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나 조직을 각각 열씩 정하여 랑야방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평가 방법이나 기준은 밝혀진 바 없었으나, 대체로 순위가 잘 맞는 편이어서, 새로운 순위가 발표되면 온 천하가 들썩였다.

  약왕곡은 소천추가 이끄는 중원 최대의 약재상으로, 랑야부호방 가장 높은 곳에 이름을 올린 상단이자 강호의 한 방파였다. 이 약왕곡이 랑야각에 약재를 대고 있으니, 그간 매장소에게 쓰인 약재들은 모두 약왕곡을 거친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임수일 적에는 고뿔 한 번 걸려본 적 없을 정도로 강건하였으니, 매장소와 약왕곡의 인연은 화한독 치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라 여기기 쉬웠으나, 사실 매장소는 임수일 적부터 이 약재상단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단지 강호를 돌아다니다가 들었다거나, 만일을 위해 상식으로 알아두었다거나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우영의 사령관이었을 때, 임수는 소천추 밑에서 수학했던 위쟁이라는 자를 부관으로 데리고 있었다. 어린 나이임에도 월등히 뛰어난 능력으로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소년장수를, 위쟁은 진심으로 존경하여 충성을 다하였다. 그만큼 임수 역시 그를 신뢰하였고, 두 사람 사이에는 군신관계 이상의 우정이 쌓였다. 매장소가 약왕곡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은 위쟁에게서 전해들은 것들이었다. 랑야각의 정보에 따르면, 매령에서 사망이 확인된 자들 중 위쟁의 이름은 없었다. 물론, 당시 불에 탄 시체가 많아, 신원 확인이 불가한 경우가 대다수였으나, 하필이면 그 즈음에 소천추가 갑작스레 위쟁과 비슷한 연령의 사내를 양자로 들인 것이 과연 우연일까. 심지어 소천추의 양아들로서 소현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그 사내는 어릴 적 약왕곡에서 수학하던 소천추의 제자라고 했다. 매장소가 린신으로부터 출타해도 괜찮다는 진단을 받자마자 약왕곡부터 가 보기로 한 연유가 바로 이것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마차로 갈 수 없네.”


  린신이 마차의 장막을 걷으며 안에 앉은 이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매장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린신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 앞에 놓인 것은 아주 좁고 구불구불한 산길이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말이 지나갈 수 없을 정도로 비좁고 험한 길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린신은 먼저 말에 올라, 다시금 매장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자마자 몸이 붕 뜨더니 어느새 그는 린신의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마차에 매어져 있는 말은 마부의 것이었고, 따로 빌린 말은 린신이 타고 온 것 하나뿐이기에 부득이하게 두 사람이 말 한 필을 함께 타야 했다.


  “마차만큼 편치는 않겠지만 내게 등을 기대면 조금 나을 걸세.”


  린신이 매장소를 제게로 가까이 끌어당기며 말했다. 매장소의 하얀 얼굴이 순식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심장이 미친 듯 뛰었다. 그 이유를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매장소는 이 순간, 린신이 제 얼굴을 볼 수 없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겼다.


  “이곳은 랑야산만큼 산세가 험하지는 않아. 게다가 약왕곡은, 이름만 보아도 알 수 있겠지만, 랑야각처럼 산마루에 있는 것이 아니니 한 시진이 채 못 되어 도착할 게야. 그러니 이대로 조금만 참게.”


  매장소는 목소리를 내는 대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심장의 떨림이 목소리를 타고 전해질 것만 같아서였다. 린신이 양 손으로 고삐를 잡자, 겉으로 보기에는 마치 매장소가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약왕곡으로 향하는 내내 매장소는 린신과의 대화를 피하기 위해 눈을 감은 채 가만히 그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다. 린신은 매장소가 여정에서 쌓인 피로 때문에 졸고 있는 것이라 여기고 혹여나 그가 몸을 가누지 못하여 말에서 떨어질까 팔을 조금 더 안으로 모아 단단히 붙잡았다.

  약왕곡의 입구가 보이기 한참 전부터 그 안에서부터 흘러나오는 온갖 약재 향이 린신과 매장소를 반겼다. 매장소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깎아지른 절벽과 절벽 사이 깊은 골짜기로 들어서자, 수도 없이 늘어선 전각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랑야부호방 1위에 이름을 올린 상단다운 규모였다. 문지기들은 이전에도 여러 번 약왕곡을 방문한 적 있는 린신을 알아보고 예를 갖춘 뒤 대문을 열었다. 린신은 문지기 중 한 사람에게 저와 매장소 몫의 명함을 건넸다. 그리고는 먼저 말에서 내린 뒤, 매장소의 허리를 잡고 그가 말에서 내려오는 것을 도왔다. 린신의 커다란 두 손이 가느다란 허리를 감싸왔을 때, 조금 진정되는가 싶었던 매장소의 심장이 다시금 큰 소리를 내며 뛰기 시작했다. 매장소는 발이 땅에 닿자마자 고개를 숙여, 열이 오른 제 얼굴을 감추었다. 린신은 자존심 강한 매장소가 또다시 약해빠진 제 몸뚱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리라 생각하고 그것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일단은 소 곡주를 만나야 하네만, 편전까지 가는 길이 자네에게는 그다지 순탄치 않을 게야. 약왕곡의 이 수많은 전각들 중 대부분은 약재를 보관하는 창고일세. 다량의 약재가 쌓여있으니 향도 짙게 나는데다가 여러 약재 향이 뒤섞여 있어, 익숙지 않은 이들은 현기증을 느끼다가 혼절하거나, 정신이 혼미해져 길을 잃거나 하지. 나는 익숙하니 괜찮으나, 자네는 이곳을 지나는 내내 소매로 코와 입을 가리고 있어야만 하네. 되도록 말도 하지 말고. 그리고…….”


  린신은 매장소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절대 내 손을 놓지 말게.”


  매장소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린신이 일러준 대로 소매로 코와 입 주변을 가리는 동시에 상기된 뺨도 그 뒤로 감추었다.


  “자네의 명함에는 매장소라는 이름과 함께 ‘위쟁의 벗’이라고만 적어두었네. 이전에 쓰던 이름은 적지 않았어. 소 곡주를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지 않겠나.”


  린신은 매장소와 보폭을 맞춰 느리게 걸으며 말했다.


  “여러 정황들이 소현이 곧 위쟁임을 이야기하고는 있으나, 소 곡주가 소현에 관한 것들은 워낙 꽁꽁 숨겨두었기에 확증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네. 물론, 그 정도로 감춘다는 것 자체가 또한 증좌가 되기는 하네만. 아무튼, 우리가 추측한대로 그가 위쟁이 맞다면, 명함을 받아본 소 곡주와 소현이 분명 반응을 보일 걸세.”


  매장소는 소매로 얼굴 절반을 가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린신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답하는 것은 아니었다. 린신에게 붙잡힌 손에 심장이 달린 듯 그곳에서부터 맥박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어, 도무지 이야기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이에 더해 조금씩 심해지는 현기증도 문제였다. 숨이 들고 나는 곳을 소맷자락으로 가렸음에도 채 걸러지지 않은 향이 매장소의 정신을 뒤흔들었다. 결국 채 열 걸음을 더 걷지 못하고 다리가 휘청거리며 몸이 기울었다.


  “장소!”


  린신은 재빠르게 매장소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덕분에 꼴사납게 쓰러지지는 않았으나, 린신의 얼굴과 너무 가까워진 탓에, 매장소는 저도 모르게 흡, 하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주변 공기를 가득 채우고 있던 약재 향이 한꺼번에 기도로 파고들었다. 순간, 하늘이 빙글빙글 돌며 린신이 둘로, 셋으로 보이다가 다시 하나로 보이다가 하였다. 린신은 매장소를 더욱 단단히 붙잡았다.


  ‘이런. 어서 약재창고 사이를 벗어나 맑은 공기가 드는 곳에 눕혀야 할 터인데…….’


  매장소의 몸뚱이는 점점 더 심하게 휘청거렸다. 린신은 그의 무릎과 어깨 아래를 받쳐 안아들었다. 매장소는 흐려진 눈동자로 린신을 바라보며 두어 번 눈을 깜빡이다가 이내 혼절하고 말았다. 린신의 입에서 한숨이 새었다. 독초를 보관하는 창고는 따로 있으니 이곳에서 나는 향에 몸이 상하는 일은 없을 터였으나, 한때는 무패의 소년장수였던 이가 이 정도도 견뎌내지 못하게 된 것이, 또한 그가 이리 된 제 처지를 끊임없이 비관하리라는 것이 슬프고 안타까웠다.


  “혹 랑야각 소각주이십니까?”


  그 때, 한 사내가 다가와 린신을 향해 물었다. 그는 뒤에 두 명의 수하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세 사람 모두 꽤 오랜 시간 수련을 해온 듯 보였으며, 지난 세월, 린신은 약왕곡을 수없이 왕래하면서도 이들을 전혀 본 적이 없었다.


  “자네가 소현……, 위쟁이군.”


  뒤에 선 두 명의 수하들은 긴장한 낯으로 서로 시선을 주고받았으나, 선두에서 린신과 마주하고 있는 이의 낯빛에는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우선은 품에 안고 계신 분을 편히 뉘일 곳이 필요할 듯합니다. 따라오십시오.”


  사내가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자, 린신은 매장소를 안고 그를 따랐다. 사내의 수하들은 마치 린신을 감시하듯 그보다 뒤에서 걸었다. 그 경계심만 보아도 이들의 정체는 뻔한 것이었다.


  ‘이래서야 원……. 이들에게 장소가 곧 효기장군 임수라는 것을 어찌 납득시켜야 하나…….’


  화한독 환자는 흔히 볼 수 있는 병자가 아니었다. 병과 약재에 대해 해박한 이들이 가득한 약왕곡이라 해도 화한독에 대해 아는 이는 전혀 없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이런 상황에 위쟁으로 보이는 사내와 그 수하들의 경계심은 상상 이상이었으니, 임수가 환골탈태하여 매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을 쉬이 믿어주지 않을 것 같았다. 오십 네 개의 계단을 밟고 골짜기 끄트머리의 높은 지대로 올라서면 비로소 닿을 수 있는 약왕곡 식구들의 생활공간에 이를 때까지, 린신은 그러한 고민을 거듭하였으나 적절한 답을 찾아내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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