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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07

새로운 시작






  ‘랑야각주의 아들로 태어나 ‘린신’이라는 이름을 갖다.’


  앞의 이야기들과 이 죽간이 연관이 있다면 오금환을 훔쳐, 그것을 먹고 신력을 봉인한 채로 부려산의 결계를 넘은 이는 죽간에 적힌 문장에 언급된 사람, 즉, ‘린신’일 터였다. 이 린신이 매장소의 정인이 맞다면, 그가 그런 위험한 일을 감행한 이유는 빙속초 때문임이 자명했다. 그렇다면 죽간에 나타난 문장은 린신의 행동이 불러온 결과이리라. 동화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컨대, 이 죽간은 본래 사명이 인간의 운명을 적어 넣는 운명부였을 것이다. 매장소는 인간의 운명부가 멋대로 바뀌며 나타난, 린신의 이름이 들어있는 그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좋지 못한 결과라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제군. 이 자가 호제의 처조카인 그 여우가 맞습니까?”


  매장소는 자신의 무릎 위로 떨어진 운명부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동화 쪽은 보지도 않은 채로 물었다. 평소의 그라면 예를 갖추어 정중히 질문을 하였을 것이나, 지금의 그는 린신의 안위 이외의 다른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어째서인지 동화에게서 답이 돌아오지 않았가.


  “그가 맞다면 린신은 그저 겁을 겪는 것입니까, 아니면 진정 범계의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입니까. 대체 그 부려산이라는 곳에서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입니까!”


  다급한 매장소의 목소리와는 달리, 동화는 느긋하게 찻잔을 다시 채우며 입을 열었다.


  “나는 네게 답을 해줄 의무가 없다. 답은 스스로 찾거라. 내가 알려줄 수 있는 것은 부려산이 익계의 남쪽 끄트머리에서 조금 더 멀리 벗어난 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뿐이다. 몸이 감당치 못할 정도로 강한 신력을 지녔으니 그 힘을 이용한다면 쉬이 찾을 수 있을 것이야.”


  동화가 말을 마치자마자 매장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편전을 뛰쳐나가더니 이내 연기처럼 모습을 감추었다. 이 역시 예의라고는 눈곱만큼도 갖추지 않은 행동이었으나 동화는 아랑곳 않고 그저 조용히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절안은 매장소가 앉아있던 자리를 바라보며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동화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자네와의 정을 생각해서 자네가 아끼는 아우에게 도움을 준 것이거늘 어찌 그러는가?”


  절안은 이미 한 방울도 남지 않은 도화주를 아쉬워하며 술잔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손을 거두었다. 시비들이 들어와 빈 그릇과 반상을 치우기 시작했다.


  “모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과연 장소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절안은 괜스레 시비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쫓으며 말했다. 동화는 잠시간 매장소가 사라진 편전의 안뜰을 바라보다가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좋은 일인지 아닌지는 그 아이들이 하기 나름이겠지. 그들은 삼생석에 나란히 이름이 적힌 천생인연일세. 그러나 동시에 악연이기도 해. 그렇기에 운명의 실타래가 복잡하게 엉켜 풀어내기 어렵게 보이나, 결코 답이 없는 것은 아니네. 허나, 지금은 답을 찾을 의지조차 보이지 않기에 조금 변화를 준 것이지.”


  절안은 술잔 대신 찻잔을 채워, 그것을 마치 술처럼 단숨에 들이켰다. 뜨거운 찻물이 목구멍을 지나는 느낌은 독한 술을 마실 때의 타오르는 듯한 느낌과는 상이하였으나 그럭저럭 비슷한 기분은 낼 수 있었다. 그 사이 동화는 사명에게 눈짓을 하여 단 한 문장만 적힌 운명부를 도로 가져가게 하였다.


  “헌데, 정말로 저것이 그 아이의 운명부가 맞습니까? 같은 이름이기는 하나, 겁을 겪는 것이든, 정말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든 범계로 떨어진 신선이 선계에서 불리던 이름과 반드시 같은 이름을 갖게 되리라는 보장은 없지 않습니까.”


  동화는 매장소에게 보였던 모습과는 달리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 저 운명부에 적혀 있던 이름은 다른 것이었네. 부려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 역시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그곳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그 아이의 영혼이 범계로 떨어져,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한 인간의 운명을 바꾸게 된 모양이야. 같은 이름을 갖게 한 것은 하늘의 뜻일 터인데, 자네 생각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 같나?”


  절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설마 하는 낯으로 동화를 쳐다보았다. 동화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삼생석이 정한 인연만큼이나 악연 역시 끊어낼 수 없는 질긴 운명이지요. 과연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운명 두 가지를 함께 지닌 아이들답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정겁이라니…….”


  순간 태신궁 내원에 큰 바람이 일었다. 흐드러진 매화 꽃잎은 그 바람을 타고 흩날리며 아름다운 꽃비가 되었다. 바람은 금세 멈추었고, 꽃비도 소나기에 그쳤으나, 매화는 곳곳에 피어 있으니 누군가는 그 아름다운 광경을 목격하는 행운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한 송이 꽃에게는, 불행하게도 짧은 생을 마감하는 순간이었다. 행복과 불행. 매화의 이름을 가진 봉황의 운명은 어느 쪽일까.

  그 사이, 매장소는 동화가 일러준 대로 어렵지 않게 부려산을 찾아냈다. 바깥에서 산이 보이지 않도록 감추는 역할을 하는 약한 결계를 넘어가자, 곧바로 산꼭대기에서 익숙한 신력이 느껴졌다. 10만 여 년간 곁을 지켜주었던 이의 것이 분명했다. 매장소는 봉황의 모습을 하고 정상을 향해 날았다. 신력을 많이 쓰면 몸이 버티지 못하기에, 진신으로 돌아가 직접 날갯짓을 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었다. 산꼭대기에 이르러 깊게 파인 구멍과, 그 위쪽과 안쪽 벽면을 감싼 결계를 발견한 매장소는 순간 날갯짓 하는 것을 잊을 정도로 깜짝 놀랐다. 결계 안쪽에서 린신의 신력이 폭풍처럼 휘몰아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한 번 몰아칠 때마다 농질에게 상처를 입혔고, 대체 이 상태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된 것인지 농질은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저것은……!’


  매장소는 상처투성이가 되어 쓰러져 있는 요괴의 아홉 개의 머리 부근에서 무언가 발견하고 결계 위로 조심스레 내려섰다. 그리고는 얼굴을 결계에 바짝 갖다 대고 그 무언가를 조금 더 유심히 살폈다. 그것은 린신이 검술을 연마할 때에 사용하던 검이었는데, 검날이 부러진 채였다. 린신에게는 제 신력을 담은 검 형태의 법기가 있었으나, 결계를 통과하기 위해 신력이 담기지 않은 연습용 검을 가지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저 안에 그의 신력이 갇혀 있고, 그의 검이 부러져 있으나, 정작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구나. 그렇다면 역시 그 운명부에 적힌 이름이…….’


  매장소는 다시 날개를 펼쳤다. 봉황의 온 몸이 뜨거운 화염에 휩싸이더니 엄청난 속도로 범계를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운명부에 적혀있던 그 곳, 랑야산이었다.




***




  랑야각주의 외아들에게는 오랫동안 사랑해온 벗이 있었다. 벗의 이름은 임수라 하는데, 대량제국 귀족 중 가장 지위가 높은 가문의 세자였다. 임부는 본래 대량의 정예부대인 적염군을 이끄는 무인 가문이기에, 임씨 사내들은 관직을 받기 전, 드물게는 관직을 받은 후에도 자주 강호를 왕래하며 자신의 무공을 시험하고, 스스로를 단련하곤 했다. 임수의 부친인 임섭 역시 십대 때부터 강호를 드나들었는데, 그러던 중 당시에는 아직 각을 물려받기 전이었던 랑야각주를 만나 서로 검을 겨루며 우정을 쌓았다. 랑야각의 주인을 벗으로 삼고 나서부터 임섭은 강호 유람을 마치고 나면 금릉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랑야각에 며칠간 머무르곤 했다. 그는 관직을 받은 뒤에도 종종 강호를 유람하였는데, 아들인 임수가 여덟 살이 되자, 그 유람길에 항상 데리고 다녔다. 린신과 임수 사이의 인연은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한 사람은 천생 강호인이고, 다른 한 사람은 대량의 군후와 공주 사이에서 태어난 귀족이었음에도 그 아비들처럼 이들 역시 서로 마음이 잘 맞았기에 우정은 쉬이 쌓였다. 열 살이 되자, 임수는 홀로 강호를 왕래하기 시작했고, 린신과 임수는 더 자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게 되었다. 열세 살에 적염군의 부사령관이 되고, 적염군 내에 자신만의 부대인 적우영을 창설하며 소년장수로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에도 임수는 결코 린신과의 인연을 잊지 않았다. 이렇듯 겉보기에는 그저 좋은 벗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관계에 있어 유일하게 안타까운 점은, 임수가 린신에게 갖는 감정은 우정뿐이나 린신에게 임수는 그 이상의 존재라는 사실이었다. 임수와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린신은 저도 모르게 서서히 그를 연모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열아홉의 임수는 전신에 붕대를 감은 채로 앓는 소리만 간신히 내며 린신의 앞에 누워있었다.


  “아버지, 수는 강한 아이니까 괜찮겠지요? 깨어날 수 있겠지요?”


  아들의 물음에 노각주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아비의 침묵에 린신은 입술을 깨물었다. 적염군이 끊임없이 군공을 쌓아 날로 명성이 높아지자, 적염군을 이끄는 임부, 그리고 특히 적염군에서도 최정예 부대인 적우영의 사령관인 임수를 시기하는 이들 또한 생겨났다. 임섭의 누이인 신비가 낳은 총명하고 올곧은 성정의 황장자가 태자에 책봉되자, 황제의 눈과 귀를 가리며 이득을 취해오던 간신배들의 두려움 역시 커졌다. 이들은 서로 공모하여 황장자 기왕과 적염군을 동시에 축출하고자 계략을 세웠고, 그것이 성공을 거두며 기왕과 임섭은 물론 매령에서 대유군에 맞서 목숨을 걸고 용맹하게 싸웠던 7만 적염군 대부분이 아군에 의해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임수는 몇 안 되는 생존자 중 하나였으나 매령의 눈밭에서 설개충에 물려 화한독에 중독되는 바람에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알다시피 화한독의 완전 해독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중독된 채로 사람이나 동물의 피를 마시며 살거나 인간다운 외모와 목소리를 포기하고 미량의 독을 남겨두는 쪽이 목숨을 부지하기에는 더 쉬울 것이야.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한다, 신아. 수가 이 고비를 넘기면 새 얼굴을 얻어 살아날 것이요, 넘기지 못하면 이대로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노각주가 힘겹게 답을 하자, 린신은 눈을 부릅뜨고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오지 않도록 잔뜩 힘을 주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잔뜩 고인 눈물이 흘러넘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들릴 듯 말 듯 신음하는 임수의 손을 제 두 손으로 감싸 쥐었다.


  “반드시 살아남아주게. 자네가 수명보다 온전한 외모와 굳지 않은 혀를 원한 이유를 내 모르는 바 아니야. 나는 내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네. 허나,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부질없게 느껴져. 그저 자네가 살아주었으면 하네. 살아만 준다면 내 자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해 줄 터이니…….”


  결국 린신의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져 내렸다. 한 번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은 그칠 줄 모르고 계속 흘러내렸다. 노각주는 임수의 손을 꼭 쥐고 엎드려 흐느끼는 아들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매장소는 린신의 뒤에서 모습을 감춘 채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무작정 린신이 있다는 랑야산까지 오기는 하였으나 오자마자 마주한 것이 이러한 광경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린신은 평소에는 존재조차 믿지 않았던 신들을 향해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고 있었다. 임수의 숨을 거두어 가지 말아달라고, 그는 빌고 또 빌었다. 그 간절한 외침은 매장소에게까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대로라면 저 임수라는 아이는 죽고 말 것이다.’


  화한독을 만들어내는 설개충은 범계에서는 그저 독충으로 여겨졌으나, 사실 아주 자그마한 요괴였다. 반드시 신선이 아니더라도 신력을 지닌 것들에게는 설개충과 같은 작은 요괴의 독기 따위야 신경 쓸 만한 것이 되지 못했지만, 신력을 조금도 지니지 않은 평범한 인간이라면 그의 내공이 아무리 높다 한들 화한독을 이겨낼 수는 없었다. 전신의 뼈를 조각내어 독기를 제거할 수는 있으나, 그 과정에서 죽거나, 치료를 무사히 마친다 해도 극도로 쇠약해져 오래 지나지 않아 죽음에 이르기 때문이었다.

  죽어가는 임수와 그 곁에서 눈물 짓는 린신의 모습이, 매장소에게는 마치 훗날의 일을 미리 보는 것처럼 여겨졌다. 아마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을 그 날, 매장소는 온 몸이 불타올라 잿더미가 되어버릴 것이다. 만약 랑야산에서 인간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린신이 단지 겁을 겪고 있는 것이라면, 매장소가 재로 돌아가는 날, 그의 곁에서 괴로워할 린신의 모습이 지금의 모습과 같으리라. 혹 린신이 완전히 평범한 인간이 되어버린 것이라 해도, 연모하는 이를 잃는 슬픔을 겪어야 하는 운명임은 그대로였다.

  매장소는 자신이 혼돈으로 돌아간 뒤, 남겨진 린신이 겪을 괴로움 때문에 그를 밀어내기까지 했던 이였다. 그렇기에 연모하는 이의 죽음을 목전에 둔 인간 린신을 모른 척 하기 힘들었다. 린신이 마음을 다치지 않도록 하려면 임수를 소생시키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임수를 소생시키는 것은 하늘을 거스르는 일이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 사명이 운명부에 적어 넣은 운명대로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었고, 그렇게 이미 정해진 운명에는 최고 신선인 동화제군이라 해도 함부로 간여하면 안 되었다.

  매장소가 신선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규칙과 린신을 안쓰러워하는 마음 사이에서 고민을 거듭하는 사이, 해가 기울어 사방에 어둠이 내려앉았다. 노각주는 임수를 린신에게 맡기고 자신의 처소로 돌아간 지 오래였고, 린신은 거뭇해진 눈가를 꾹꾹 누르며 졸음을 쫓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 매장소로 하여금 결단을 내리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아……, 안 돼! 정신 차려! 숨을 쉬라고!!”


  갑작스런 짧은 발작과 함께 임수의 숨이 끊어지고 만 것이었다. 린신은 임수의 코와 입으로 제 숨을 불어넣었으나 모두 부질없는 짓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다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매장소는 조금씩 식어가는 몸에서 빠져나오려 하는 임수의 혼을 보고 즉시 망설임을 거두었다. 그는 재빨리 제 혼으로 임수의 혼을 감싸며 생기를 잃은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




  감은 눈 위로 따가운 햇살이 내려앉았다. 임수는 미간을 꿈틀거리다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지난 1년, 지겹게 보았던 랑야각 내 린신의 처소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지막으로 기억나는 것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의 극심한 고통이었다. 아마도 그러다가 정신을 잃은 듯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 그러한 고통을 겪었냐는 듯 몸이 너무나 가벼웠다.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붕대가 칭칭 감긴 팔을 들어 올려보았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 얼마나 지난 것인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바들바들 떨리기는 하였으나, 기력을 보하고 나면 전혀 무리 없이 움직일 수 있을 듯했다. 임수는 누운 채로 팔, 다리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제 상태를 확인했다. 의원의 정확한 진단이 있어야 하겠으나, 스스로 판단하기에는 이제 더 이상 붕대는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아, 아. 말도…… 가능하군.”


  화한독의 영향으로 굳었던 혀도 완전히 정상으로 돌아와 있었다. 이만하면 후일을 도모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은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쨍그랑―


  그 때, 갑작스레 날카로운 파열음이 들려왔다. 임수는 움직임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소음이 들려온 쪽을 쳐다보았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문간에 서 있는 린신의 얼굴과 엎질러진 탕약, 그리고 그 탕약을 담고 있었을 약사발이 산산조각 난 채 바닥을 뒹굴고 있는 모습이 차례로 시야에 비쳤다.


  “린신, 내가―”


  임수는 그간 있었던 일을 물어보려 하였으나, 린신이 달려와 그를 끌어안는 바람에 말이 끊어졌다. 그 순간, 임수의 심장이 빠르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얼굴에서 열기가 느껴지는 것으로 보아, 붕대에 가려진 피부가 붉게 물들었을 터였다. 동시에 가슴 속 어딘가, 아주 깊은 곳이 저려왔다. 전부 이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감각들이었다. 이 역시 화한독의 중독 증상 중 하나일까.


  “해독이 거의 끝났는데, 자네가 혼절해 버려서 어찌나 걱정했는 줄 아나? 심지어 잠시간 숨을 멈추기까지 하였네! 다행히 호흡은 금세 다시 돌아왔으나, 그 뒤로 무려 엿새 동안이나 의식을 찾지 못하여 내 잠시도 마음을 놓지 못했어. 깨어나 주어서 고맙네. 정말 고마워…….”


  린신은 임수를 품에 안은 채 울먹였다. 임수는 힘이 들어가지 않아 가늘게 떨리는 손을 들어 린신의 등을 감싸고 천천히 토닥였다. 자존심이 센 랑야각 소각주는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눈물이 멎을 때까지 친우이자 연모하는 이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소년장수는 불평 한 마디 없이 가만히 안겨 있는 것으로 저를 위하는 린신의 마음에 감사를 표했다.

  임수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이내 노각주에게도 전달되었다. 노각주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달려와 진맥을 하고 붕대를 들추어 보며 환자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는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미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일단 치료는 완전히 끝났으니 붕대를 풀어도 될 게다. 다만……, 완전한 해독을 시도하였으나 그 결과가 썩 만족스럽지 않구나. 인간다운 외형과 말을 되찾기는 하였으나, 아주 미량의 독이 네 몸에 잠들어 있는 상태란다. 미량이라고는 하나 그 역시 화한독이다. 언제든 재발하여 너를 집어삼킬 수 있어. 그러니 앞으로는 몸을 보하는 것이 네 일상이 되어야 한다.”


  임수는 노각주를 향해 두 손을 모으며 고개를 숙였으나 그의 당부대로 하겠노라고 답하지는 못했다. 그의 뒤에는 권력에 눈먼 자들에 의해 반역자의 오명을 쓰고 죽어간 기왕 소경우와 아버지, 그리고 7만의 적염군의 원혼이 있었다. 그들의 잃어버린 명예를 되찾아 주어야만 했다. 그것이 살아남은 자에게 주어진 사명이라고, 임수는 생각했다. 지난 한 해, 그는 병상을 벗어날 수 없는 몸이었으나, 머물고 있는 곳이 천하에 모르는 것이 없는 랑야각이었던 덕에 매령을 휩쓴 피바람의 내막과 소경우의 죽음 이후 대량 조정의 변화를 훤히 파악하고 있었다. 처단해야 할 적과 바로잡아야 할 일이 무엇인지 너무나 명확했다. 이를 기반으로 앞으로 할 일에 대한 윤곽을 잡은 것이 벌써 석 달 전이었다. 물론, 구체적인 계획은 보다 빈틈없이, 완벽하게 세워야할 것이며, 본격적으로 대업을 수행하기에 앞서 준비해 두어야 할 것 역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터였다. 그러니 임수에게는 이제 조금도 쉴 틈이 없었다. 제 몸 하나 돌볼 여유조차도.


  “새겨 듣게.”


  린신이 임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다시 한 번, 임수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버지나 나나 자네를 막을 생각은 없어. 오히려 자네가 원하는 만큼 지원도 해줄 작정이네. 허나, 랑야각의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돕는다 한들 자네가 쓰러지면 다 소용 없는 일 아닌가.”


  린신에게 잡힌 손이 마치 불에 댄 것처럼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어, 임수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는 이 상황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 무조건 고개를 끄덕였다. 린신은 그런 속내는 전혀 모른 채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손을 거두었다. 임수는 마음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럼 이제 붕대를 풀어볼까! 화한독을 해독하고 나면 외양이 이전과는 달라진다는데, 자네는 본래 그다지 미남자는 아니었으니 어떻게 바뀌든 이전보다는 나을 것이야.”


  린신이 농을 섞어가며 경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임수의 입술 사이로도 피식 웃음이 새었다. 린신은 임수의 등 뒤로 가 앉아, 뒤통수에 매어놓은 매듭을 풀었다. 피부와 빈틈없이 맞닿아있던 붕대가 느슨해졌다. 붕대 끝을 잡은 린신의 손이 임수의 정수리 위에서 몇 번 원을 그리자, 얼굴을 감싸고 있던 것들이 모두 사라졌다.


  “어디 보자.”


  린신은 임수의 변화된 외양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를 옮겨 앉았다.


  “아니, 자네…….”


  임수의 새로운 얼굴을 마주한 그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어찌 그러는가? 혹 못 봐줄 정도로 흉측한가?”


  임수가 걱정스레 물었다. 대업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사람이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나가는 데에 있어서 외양이 주는 인상이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이…….”
  “어서 말을 해 보게! 아니지, 명경을 주게. 내 직접 확인을 해 보아야겠어.”


  임수는 넋을 놓고 앉아있는 린신의 어깨를 붙잡았다. 노각주는 붉게 물든 아들의 얼굴을 보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린신은 임수를 뚫어져라 바라보느라, 임수는 그런 린신의 반응에 불안해져 노각주가 방에서 나가는 것도 알지 못했다.


  “린신!”


  임수가 남은 기력을 쥐어짜 큰 소리로 린신을 불렀다. 그 덕에 린신도 조금은 제정신을 찾은 듯했다.


  “그것이……, 자네가 너무 아름다워서…….”


  그 말을 들은 임수는 기가 찬다는 듯 허, 하고 숨을 뱉었다. 린신이 보기에 임수는 마치 백매화가 인간이 되어 나타난 듯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소년장수의 늠름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가느다란 선과 백옥 같은 피부를 지닌 미인이 앉아있었던 것이다.


  “아름다운 얼굴로 미혼술을 부린다는 여우신도 자네만은 못할 거야.”


  린신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임수는 답답함을 참을 수 없어, 린신의 어깨를 흔들어댔다. 마음 같아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명경을 가져오고 싶은데, 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은 두 다리도 마찬가지였다. 린신은 기어이 임수가 그 고운 얼굴로 욕지거리를 하는 것을 본 뒤에야 명경을 꺼내왔다.


  “이럴 수가…….”


  명경을 마주한 임수는 린신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외양이 변한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부모님께서 주신 얼굴이 조금도 남지 않았을 줄은…….”


  그는 괴로운 표정으로 제 얼굴을 어루만졌다. 린신은 그 어두운 낯빛을 읽고는 얼른 명경을 치웠다. 그러나 임수의 낯에 드리워진 어둠은 명경을 치운다 하여 걷힐 것이 아니었다. 린신은 한숨을 푹 쉬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이잖나. 자네 심정은 알겠지만, 그래도 긍정적으로 여기려고 노력해 보게. 이전의 모습과 닮은 구석이 전혀 없으니, 후일 금릉에 돌아가더라도 자네가 임수라는 것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할 게야. 그 점을 생각하면 오히려 잘 된 일일 수도 있어.”


  린신의 말에도 일리가 있어, 임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임수의 새로운 얼굴을 보며 한 송이 매화처럼 아름답다 생각하여 얼굴을 붉혔던 린신도, 같은 얼굴을 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 생각에 괴로워하던 임수도, 그 얼굴이 매화를 이름으로 가진 봉황의 것과 똑같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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