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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06

이별을 피하기 위해






  린신은 몇 번이고 십리도림을 다시 찾았으나, 매장소는 제 처소 주변에 결계를 치고 그를 만나주지 않았다. 매장소의 머리털 하나 보지도 못한 채 거절당하기를 수십 번, 린신은 방법을 조금 바꾸어 절안의 처소로 향했다. 그 때 절안은 도화주 담그는 일을 마치고 막 오수에 들려고 하던 참이었다.


  “이리 한가로이 늘어져 있다니, 자네, 제정신인가? 정말로 장소를 포기하기라도 하겠다는 거야?”


  갑작스레 들이닥친 린신 때문에 절안은 뉘였던 몸을 다시 일으켜야 했다.


  “장소가 처소 주변에 나를 막기 위해 결계를 친 것이 벌써 한 달째야! 저리 신력을 쓰다가는 크게 탈이 나고 말 걸세!”


  린신이 절안의 면전에 대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절안의 낯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문제라면 걱정 말게. 결계는 내가 친 거거든. 장소의 부탁으로.”
  “뭐?!”


  절안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기지개를 켰다. 아무래도 오수는 포기해야 할 것 같았다.


  “장소가 숙고하여 결단한 일이야.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 아무 준비 없이 혼돈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보다는 일찌감치 현실을 받아들이고 주변을 정리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 하더군.”


  절안이 말을 마치자마자 린신이 그의 멱살을 잡았다.


  “그렇다고 이리 쉽게 포기해? 자네가 어찌 이럴 수 있어……!”


  절안은 심기가 불편한 듯 미간을 좁혔다. 그리고는 곧 순간적으로 신력을 방출하여 린신을 맞은편 벽까지 날려버렸다. 린신의 등과 벽이 부딪치며 일으킨 진동으로 의서가 잔뜩 꽂힌 책장이 흔들렸고, 몇 권의 서책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린신은 망연히 그것들을 바라보았다. 자신보다 수천, 수만 번은 더 저 책들을 살폈을 절안조차 매장소를 포기하기로 했다면 정말로 더 이상 아무런 방법이 없다는 것을, 그는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어찌 이러냐고?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이라는 칭송을 받으면서도 아끼는 아우 하나를 살리지 못하고 저를 포기해달라는 그 아이의 청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던 내 심정을 진정 이해하지 못하겠나? 결국 이것이 하늘이 장소에게 준 운명인 게지. 우리는 과거의 실수에 대해 아우를, 혹은 정인을 잃는 슬픔으로 벌을 받는 것이고.”


  절안의 목소리는 울분에 차 있었다. 두 사내 사이에 긴 침묵이 이어졌다. 바람 부는 소리 외에는 그 무엇도 들리지 않았다. 사시사철 지지 않는 도화의 향이 바람결에 실려와 코끝을 간지럽혔다. 그 달콤한 향이 지금의 상황과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점은 두 사람의 슬픔을 더욱 짙어지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질 듯한 고요를 깨뜨린 것은 린신이었다.


  “나는 포기 못 해.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걸세.”


  린신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절안의 처소를 나섰다.




***




  그 이후로 십리도림에 발길을 끊은 린신은 날마다 부려산으로 향했다. 농질을 향해 별 생각 없이 내던졌던 술병이 결계를 넘어갔다는 사실을 기억해낸 까닭이었다. 절안은 결계 안을 드나들 수 있는 것은 부신뿐이라 하였으나, 무언가 다른 규칙이 있는 듯했다. 한낱 술병 따위가 부신과 같은 능력을 가졌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혹 들어가는 것에는 제약이 없고 다시 나오는 것만 불가능한 것은 아닐까. 자세히 살펴보니 농질의 발치에는 동물의 사체도 여럿 있었다. 어떤 것은 백골이었고, 어떤 것은 아직 털가죽은 남아있으나 부패가 심해 본래 어떤 짐승이었는지 알 수 없었으며, 또 다른 어떤 것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살아있는 것과 거의 같은 형상을 하고 있기도 했다. 결계 안쪽에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짐승의 사체가 있다는 것은 그 짐승들이 결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린신이 내던진 술병이 결계를 넘어가, 농질의 얼굴에 상처를 입혔던 것처럼.


  ‘왜 진작 이 결계를 연구해볼 생각을 못 했을까.’


  몇 날 며칠 결계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이런저런 가능성을 떠올려보던 린신은 마침내 농질이 잠든 사이, 그 가능성들을 시험해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그저 결계에 자신의 손을 넣어보는 것이었다. 만일 손이 결계를 넘어갈 수 있다면 전신이 넘어가는 것도 가능하리라. 하지만 린신의 손끝은 결계의 표면에서 조금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지 못했다. 다음은 여우의 모습을 한 채로 앞발을 넣어보는 것이었다. 이것 역시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세 번째는 풀숲을 돌아다니던 들쥐를 잡아 결계 안쪽으로 던져 넣는 것이었다. 린신은 제 손 안에서 버둥거리는 들쥐를 결계를 향해 던졌다. 앞서 두 가지가 모두 실패했던 터라, 그는 막연히 이것도 실패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들쥐는 결계를 통과하여 농질이 자고 있는 구덩이 안쪽으로 떨어졌다. 린신은 화들짝 놀라, 결계 안쪽을 살폈다. 가지런히 놓인 농질의 아홉 개의 꼬리 근처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는 들쥐의 모습이 분명히 보였다.


  ‘부신은 특별한 경우이니 논외로 하면, 혹 신선이 아닌 것들만 결계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인가?’


  린신은 황급히 청구의 제 처소로 돌아가, 하얀 비둘기가 든 다섯 개의 새장 중 하나를 들고 다시 부려산으로 향했다. 그 비둘기들은 린신이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있는 것으로, 주로 자신 혹은 미곡과 같은 시종들에게 시키기에는 다소 자잘하고 번거로운 일들을 했다. 예를 들면, 해안 절벽의 바위틈에서만 자라는 약초를 가져오는 일이 이에 속했다. 다만, 이 비둘기들은 범계의 것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짐승이었기에, 스스로의 힘으로는 린신이 원하는 약초를 구분해낼 수 없었다. 이에 린신은 신력을 불어넣어 그것들에게 약간의 지능을 주었던 것이다. 지금 데려온 비둘기는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놈이었다.


  “이제까지 했던 것과 마찬가지야. 저 여우 요괴 녀석 옆에 자라고 있는 풀이 보이지? 저걸 가져오면 된단다.”


  린신은 비둘기 하나를 제 손목에 올린 채 빙속초를 가리키며 말했다. 비둘기는 날개를 펼쳐 하늘로 날아오르더니 곧장 빙속초를 향해 활강을 시작했다. 비둘기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린신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숨을 죽였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린신의 비둘기는 결계를 넘어가지 못했다.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는 비둘기는 아무런 장애물도 보이지 않는데 지나갈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몇 번이나 다시 결계를 향해 날아들었다. 물론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린신은 비둘기를 다시 불러들여 새장에 넣었다.


  ‘산에서 잡은 들쥐는 들어갈 수 있는데, 내 비둘기는 안 된다고? 혹 이 산의 기운을 가진 것이어야 하는 건가? 아니, 그런 것은 아니다. 절안의 도화주 병은 이 부려산과 아무런 관계도 없으니. 그렇다면 내 비둘기와 아까 그 들쥐의 차이는…….’


  린신은 여전히 한쪽 구석에서 떨고 있는 들쥐와 비둘기가 든 새장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 각 정도가 흘렀을까. 린신은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꽤 기다란 나뭇가지 하나를 주워들고는 결계 안쪽으로 그 끄트머리를 집어넣었다. 나뭇가지는 무리 없이 결계를 뚫었다. 나뭇가지가 절반 정도 결계를 넘자, 린신은 아주 천천히 그것에 자신의 신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신력은 그의 손끝에서부터 빠져나와 나뭇가지를 타고 조금씩 결계를 향해 흘러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이 결계의 표면에 이르렀을 때, 나뭇가지가 갑자기 툭 부러져버렸다. 다시 말해, 린신의 신력이 흘러들어간 부분은 결계 바깥에, 신력이 깃들지 못한 부분은 결계 안쪽에 남게 된 것이었다.


  “이 결계는 신력을 지닌 것들을 막는 것이었나……. 아니지, 저 여우 놈처럼 요괴가 되어버리면 몸 안에 마력이 차오르게 되니, 마력을 지닌 것들도 결계를 지날 수는 없겠군. 예외는 오로지 이 결계를 만든 부신뿐이고. 확실히 이런 식으로 결계를 만들면 요괴가 되어버린 여우 놈을 저 안에 가두는 동시에 녀석을 해하려는 이들에게서 보호할 수도 있겠어. 힘을 지닌 것은 결계를 넘지 못하고, 아무런 힘도 깃들지 않은 평범한 무기는 결계를 넘을 수는 있지만 놈을 공격하기엔 역부족일 테니까. 이렇게까지 해놓은 것으로도 모자라 산 전체에 결계를 씌우기까지 했으니, 부신께서 저 여우를 정말 많이 아끼셨던 모양이야. 그렇지?”


  린신은 그렇게 말하며 시커먼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을 쳐다보았다. 이내 옷자락이 풀잎을 스치는 소리가 나더니 그 어둠속에서 절안이 모습을 드러냈다.


  “절안 상신께선 이 결계가 어떤 것인지 이미 알고 계셨겠지? 왜 진작 이야기 해 주지 않았나?”


  이전에 절안을 대할 때와는 달리, 린신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저를 포기해달라는 매장소의 청을 너무나 쉽게 수락해버린 절안에게, 그는 여전히 화를 내고 있는 것이었다.


  “미리 이야기해 주었어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을 걸세. 결계를 넘어갈 수 있는 것은 그 무엇도 농질을 피해서 빙속초를 가지고 나올 수 없어. 그 정도는 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잖나. 헛수고는 그만 하게.”


  절안의 차분한 대답이 린신의 화를 더욱 돋우었다. 린신의 낯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갑게 식었다.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부러 절안의 어깨를 거세게 밀치고 지나쳐가며 모습을 감췄다. 절안은 린신이 사라진 자리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한동안 응시하였다.




***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겨우내 얼어붙은 땅을 녹여줄 따뜻한 봄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늘을 얇게 덮은 구름은 태양빛을 완전히 가리지 못해, 며칠째 종일 비가 내리고 있음에도 낮 동안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게다가 내리는 양은 상당해도 빗줄기는 가는 편이어서 이제 막 땅 위로 고개를 내민 새싹을 포함하여 모든 생명들이 상쾌하게 맞을 수 있는 기분 좋은 비였다.

  매장소는 십리도림 깊숙한 곳에 자리한 정자 아래에 앉아 봄비를 감상하고 있었다. 어깨에는 두꺼운 털옷이 둘러진 채였다. 남들은 시원하다고 말하는 비였지만, 몸이 약한 매장소에게는 춥게만 느껴졌다. 그럼에도 비를 가까이서 보고픈 마음이 들어 이 정자까지 나온 것은, 언젠가 보았던 서책에 쓰여 있던 이야기가 자꾸만 생각나는 탓이었다. 그 서책은 범계의 것으로, 그곳에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이야기들을 엮어놓은 것이었다.


  “언제까지 있을 작정이야?”


  빗길을 걸어온 절안이 등립을 접으며 정자 아래로 들어왔다.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 이 비를 구경하고 싶습니다.”


  매장소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답했다. 절안은 소매에 넣어 온 향난로에 불을 붙여 매장소의 손에 쥐어주었다. 매장소는 조용히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감사의 뜻을 전했다.


  “형님. 혹 ‘여우비’라는 말을 아십니까?”
  “여우비?”


  절안은 전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하기사, 형님께선 범계에 그다지 관심이 없으시니 범계의 서책은 읽어보지 않으셨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범계 사람들은 구미호가 울면 비가 내린다고 믿는다 합니다. 구미호가 울어서 내리는 비가 여우비이지요.”


  매장소의 설명에 절안이 나지막이 웃음 지었다.


  “재미있구나. 정말로 그러하다면 청구에서 새끼 여우가 태어날 때마다 몇 년간 하루가 멀다 하고 비가 내리겠어.”


  매장소도 그를 따라 자그마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소리는 어딘가 구슬프게 들렸다. 그 탓에 절안은 금세 웃음을 거두며 한숨을 삼켰다. 잠시간 대화가 끊어지고 오직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일각 즈음 지나, 떨어지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던 매장소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 비는 그가 흘리는 눈물이려나요.”


  조심스러운 주제가 화두에 오르자, 절안은 주변 공기가 일순간에 갑갑해지는 것을 느꼈다.


  “장소야…….”


  매장소는 쓰게 웃으며 빗줄기를 향해 손을 뻗었다. 너른 처마가 비를 막아주고 있어, 바람을 타고 날아든 약간의 빗방울만이 간신히 손끝에 닿았다. 매장소는 그마저도 서글픈 듯 입술을 깨물며 손끝에 맺힌 빗방울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참으로 이기적이지요. 후일 제 죽음으로 인해 고통 받을 그를 염려하여 스스로 밀어낸 것인데, 동시에 그가 저와의 이별을 슬퍼하길 바라고 있다니 말입니다.”


  절안은 아우의 곁으로 다가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고, 그의 어깨를 당겨 감싸 안았다. 매장소는 몸을 움츠리며 절안의 품에 기대었다. 총기를 타고난 데다 심성이 착해 어릴 적부터 저를 돌봐주는 이들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일찍 어른이 되었던 아이였다. 그런 아우가 답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는 모습에 절안의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형님, 린신이 십리도림에 걸음하지 않은 것이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갑니다. 벌써 저를 잊은 걸까요?”


  묻는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절안은 십리도림에 발길을 끊은 린신이 한동안 부려산을 떠날 줄 몰랐던 것을 알고 있었다. 부려산에서 그에게 포기하라고 이야기했던 날을 마지막으로 슬픔에 잠긴 아우를 돌보느라 십리도림을 떠나지 않았던 탓에, 그 이후에는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아는 바가 없었으나, 그가 제 아우를 잊었을 리 없다는 것을, 절안은 확신했다. 하지만 어차피 이별하기로 하였다면 괜한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만 들어가자. 이러다 정말로 앓아눕겠구나. 다소 이르지만 잠자리에 드는 것이 좋겠어.”


  그래서 절안은 아무런 위로도 건네지 않았다. 매장소는 보일 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제 처소로 향했다.

  과연 절안의 염려대로 매장소는 바로 다음날부터 닷새를 꼬박 앓았다. 그러나 어떠한 명확한 병증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린신과의 이별은 제 몸의 일부를 떼어내는 것과 같았기에, 오히려 한 달이나 멀쩡히 버틴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열이 가장 심하게 올랐던 둘째 날 밤, 매장소는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도 못한 채로 연신 린신의 이름을 불러대며 눈물을 흘렸다. 그 날, 절안은 밤새 잠시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내내 아우를 돌봐야 했다. 아침이 되어 매장소의 상태가 안정되자, 그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린신을 데려올 생각이었다. 매장소도, 린신도 모두 절안이 아끼는 아이들었지만, 누군가 그에게 두 사람중 반드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아우 쪽일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 그에게는 후일 매장소가 혼돈으로 돌아간 뒤 린신이 겪을 괴로움보다 지금 이 순간, 정인과의 이별로 고통스러워하는 매장소가 더 중했다.


  “안됩니다, 형님. 그러지 마세요…….”


  하지만 매장소는 절안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곁에 있든, 떨어져 있든 그 녀석은 널 못 잊는다. 본래 청구의 여우들은 그래. 평생 한 사람만을 사랑하지.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린신은 오로지 너만을 연모해왔으니 후일 찾아올 슬픔조차 그 녀석의 운명이란다. 그 운명은 결코 바뀌지 않을 터. 그렇다면 네가 지금 이렇게 힘들게 이별을 해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


  매장소는 절안의 옷자락을 더욱 단단히 붙잡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싫습니다. 제가 싫어요. 이제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제 손으로 보냈으니 저부터 그를 잊겠습니다. 그래야 그가 저를 잊을 수 있겠지요. 그러니 제발…….”


  사랑하는 아우의 간곡한 청을, 절안은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그저 한 마디, 당부를 얹는 것이 전부였다.


  “네가 싫다고 하니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겠지만, 한번만 더 이번과 같은 이유로 앓아눕는 일이 생긴다면 그 때에는 네 뜻과 상관없이 청구에 네 소식을 알릴 것이야.”




***




  놀랍게도 그 날 이후, 매장소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는 따뜻한 낮 동안에는 십리도림을 거닐거나 흐드러지는 도화가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차를 즐겼다.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즈음에는 제 처소로 돌아와 서책을 읽거나 금을 타기도 하였다. 절안이 지어주는 보약도 곧잘 먹었고, 이야기를 나눌 때면 편안한 낯으로 웃어 보이기도 했다.


  “망각수라도 마신 게야?”


  그렇게 다시 닷새가 지나자, 절안은 매장소를 향해 의심 가득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그때 두 사람은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곳에 마주앉아 차를 나누고 있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매장소의 미소에 씁쓸한 맛이 녹아들었다. 이미 그것이 답을 대신하고 있었다.


  “마시지 않았습니다. 마시고 싶지도 않고요. 기실 저는 아무 것도 잊지 못했습니다. 아마 평생 잊지 못하겠지요. 하지만 잊은 듯 살려 합니다. 그래야 지난번처럼 앓는 일이 없을 것이고, 형님께 걱정을 끼치지 않을 것이고, 형님께서 그를 제게 데려오려 하시지 않을 테니까요.”


  이야기를 들은 절안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매장소는 다시 찻잔을 들어 입가로 가져갔다. 어느새 낯빛에 섞여들었던 쓴맛은 사라져 있었다. 웬만하면 매장소에게 음주를 허락하지 않는 절안이 오늘만큼은 술 한 병을 내어줄까 하는 생각을 했을 정도로 그 순간의 매장소는 너무나 처연하게 보였다. 그 때,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절안 상신을 뵙습니다.”


  인간의 운명을 관장하는 신선으로, 동화제군을 곁에서 모시고 있는 사명이었다. 동화제군은 한때 율법을 만들고 6계의 생사를 관장하던 천지의 주인이며, 부신이 혼돈으로 돌아간 지금, 선계에서 가장 높은 신선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 그도 오래 전에는 부신의 가르침을 받았는데, 부신의 친자인 묵연과 양자인 절안도 이때 함께 가르침을 받았으니 세 상고신은 동문이었다. 형제로 자란 절안과 묵연에 비하면 그들과 동화 사이의 교류는 뜸한 편이었으나, 끊이지 않고 꾸준히 서로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그러나 동화가 자신을 가장 가까이서 보필하는 사명을 직접 십리도림에 보내는 것은 매우 드문 일로, 이제까지 사명이 그의 명을 받아 찾아온 것은 전부 절안을 태신궁으로 초청할 때뿐이었다. 태신궁은 제군의 거처인데, 천궁 안에 있기는 하나 태신궁의 주인이 그 누구보다 지위가 높은 까닭에 천군조차도 감히 함부로 드나들지 못하는 곳이었다.


  “제군께서 내 도화주가 그리우신 모양이군?”


  사명이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절안이 선수를 쳤다. 사명은 빙그레 웃어 보이며 공수를 하였다.


  “예. 곁들일 음식을 준비해놓을 테니 이틀 뒤에 도화주만 가지고 오시랍니다. 아, 오랜만에 매 상선도 함께 보자고 하셨습니다.”


  매장소는 의아한 낯으로 사명과 절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군께서 저까지 초대하셨다고요?”


  매장소의 물음에 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이전에도 종종 절안 상신과 함께 오시곤 하셨잖습니까.”


  사명의 말처럼 매장소는 이전에 몇 번, 절안을 따라 천궁에 갔다가 동화를 만난 적이 있었다. 몸이 성치 않아 웬만하면 십리도림을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아우의 답답함을 풀어주기 위해, 절안이 구중천에 갈 일이 있을 때 종종 데리고 다녀준 덕이었다. 그러나 이번처럼 동화가 매장소를 직접 초청한 것은 처음이었다.


  “마침 잘 되었군. 마침 장소도 기분전환이 필요한 시기였으니까. 제군께 산해진미를 준비해 놓으시라전하게.”


  매장소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절안은 그 초청을 수락해버렸다. 다소 갑작스러우나 딱히 거절할 이유도 없었고, 무엇보다 절안이 그것을 수락한 데에는 이별을 겪은 저에 대한 위로가 담겨있었기에, 매장소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감사의 뜻을 전했다. 절안은 그런 아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사명을 쳐다보았다. 눈치 빠른 사명은 절안의 눈빛이 무엇을 묻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보고 매장소가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긍정의 답을 전하고 물러갔다. 절안은 동화가 매장소까지 초청한 데에는 무언가 분명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 여겼고, 사명이 그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해 준 것이었다. 삶과 죽음은 살아있는 모든 것들에게는 가장 큰 운명의 축이며, 동화는 한때 6계의 생사를 관장했던 이이니, 꼬일 대로 꼬여버린 린신과 매장소의 운명을 풀 실마리를 내어줄 수 있지 않을까. 절안은 곧바로 그것부터 떠올렸으나, 매장소에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동화가 매장소를 초청한 이유를 말해주기 전까지는 그것은 그저 추측에 지나지 않는 까닭이었다.




***




  천궁 곳곳에는 봄이 왔음을 알리려는 듯 희거나 붉은 매화가 만개하여 고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십리도림이나 청구와는 달리 웅장하고 화려한 천궁의 전각들 사이로 뻗은 매화나무 가지는 보다 우아하고 당찬 느낌이 들었다. 10만여 년 전, 절안은 갓 태어난 새끼 봉황이 겨울의 찬바람을 이겨내고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하는 이 꽃처럼 강해지기를 염원하며 그에게 ‘매(梅)’ 자를 성으로 주었다. 그러한 제 이름의 의미를 떠올리자, 매장소는 문득 천궁의 매화들이 부러워지며 동시에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같은 이름을 지녔는데 어찌하여 저들은 저리 강인하고, 이 몸은 이리 나약한 것인가.’


  절안은 몇 걸음 앞에 멈춰서서 꽃을 바라보느라 걸음이 느려진 매장소를 말없이 기다렸다. 언뜻 담담해 보이는 얼굴이 감추고 있는 서글픈 감정을 아는 까닭이었다. 곧 절안이 저를 기다리고 있음을 깨달은 매장소가 걸음을 재촉하였고, 절안은 위로를 담은 미소와 함께 아우의 마른 볼을 어루만졌다.

  태신궁은 입구에서부터 맛있는 냄새로 절안과 매장소를 반겼다. 시비들의 안내를 받아 편전에 들어서자, 상석에 앉은 제군의 모습과 아직은 찻잔만 하나씩 올려져 있을 뿐인 반상 세 개가 보였다. 두 객은 태신궁의 주인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한 뒤, 절안은 동화와 마주보는 위치에, 매장소는 측면에 놓인 반상 앞에 각각 앉았다. 시비들은 빈 찻잔을 채워 두 사람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도왔다. 절안은 가져온 도화주를 상 위에 올려놓았고, 곧이어 기다렸다는 듯 산해진미가 반상을 가득 채우기 시작했다. 찻잔 대신 술잔이 채워졌고, 두 상고신은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 번 만남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내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매장소는 절안이 따로 챙겨준 약용주를 여러 번에 나누어 마시면서 지체높은 두 신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가 가끔씩 저에게로 향하는 가벼운 질문에 답하며 그 자리를 즐겼다.


  “사명.”


  준비한 도화주가 거의 다 동이 났을 즈음, 동화가 나지막이 사명을 불렀다. 미리 지시를 받은 것인지 사명은 제 이름이 불리자마자 공수를 하며 허리를 숙이더니 바쁘게 발을 놀려 편전을 나섰다. 절안는 들고 있던 마지막 술잔을 단숨에 비우고 내려놓았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매장소도 자세를 바로하였다.


  “자네, 부신께서 아끼던 여우를 기억하지? 농질이라는 이름의…….”


  동화는 조금의 표정 변화도 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절안은 저도 모르게 매장소의 눈치를 살폈다. 정작 매장소는 이전에 농질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별생각 없이 동화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예……. 기억합니다.”


  동화는 상체를 뒤로 젖혀 보다 편안한 자세로 고쳐 앉으며 소매를 갈무리했다.


  “평범한 여우가 부신의 총애를 받고는 괜한 욕심을 부리다가 요괴가 되는 바람에 부신께서 손수 부려산에 가두지 않았나. 그 탓에 그 귀한 약초도 결계 안에 갇히게 되었고. 내 의술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아, 이제 그 약초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군. 자네는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이니 잊지 않았겠지?”


  아무것도 모르는 매장소조차 동화가 정말로 기억을 하지 못해 묻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인 말투였다. 도대체 농질은 어떤 자이고, 그 약초는 무엇이기에. 잠깐 사이에 매장소의 호기심이 거대하게 몸집을 불렸다.


  “……빙속초입니다.”


  절안이 답을 내어놓자, 매장소는 놀란 토끼 눈을 하고 그를 쳐다보았다. 절안은 차마 매장소 쪽을 보지 못하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매장소의 시선에서 옅지만 분명한 배신감이 느껴지는 탓이었다.


  “빙속초는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셈이지요. 부신께서 혼돈으로 돌아간 지금, 결계를 통과하여 빙속초를 가지고 올 수 있는 이가 없으니 말입니다. 저도, 묵연도, 그리고 제군께도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까. 부신을 제외하면 미약하나마 신력을 지닌 것은 그 무엇도 결계를 통과할 수 없고, 신력을 지니지 않아 결계를 넘어갈 수 있는 것들은 농질의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에 갈기갈기 찢겨나갈 테니.”


  이야기를 하는 절안의 시선은 동화를 향하고 있었으나, 그것은 명백히 매장소에게 전하는 변명이었다. 그리고 매장소는 그 정도만 듣고도 제 형님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 영특한 두뇌와 넓은 도량을 지닌 이였다. 그는 빙속초에 대해 막 알게 되었을 때의 린신을 떠올렸다. 오랜 세월을 거쳐 발견한 단 하나의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아 몇 날 며칠 빙속초의 흔적을 찾던 그 모습을. 그리고 그 끝에서 린신이 발견한 것이 절망이었음을, 매장소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아우를 끔찍이도 아끼는 형님은, 절망으로부터 그 어여쁜 아우를 보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매장소는 잠시나마 원망을 품었던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숙였다.


  “제군.”


  때마침 사명이 죽간 하나를 들고 돌아왔다. 동화는 사명에게서 죽간을 받아, 그것을 다시 절안에게 건넸다. 절안은 의아한 낯으로 죽간을 받아 펼쳤다. 죽간에는 단 한 문장의 글만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을 읽어내려간 절안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화를 쳐다보았다. 반면, 동화의 낯빛은 여전히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몇 가지 이야기를 해 주지. 각각의 이야기는 서로 관련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네. 판단은 자네들 몫이야. 얼마 전, 천궁 약재 창고에 있던 오금환과 그 해약이 각각 두 개씩 사라졌네. 그 뒤에는 무언가가 부려산의 결계를 넘어가는 일이 있었고. 산짐승들이 결계 안으로 들어가는 일은 자주 있었던 일이나, 이번에는 산짐승이 아닌 것 같더군. 그 다음은 자네가 들고 있는 그 죽간에 대한 것인데, 그것에는 본래 사명이 적은 한 인간의 운명이 쓰여져 있었네. 헌데, 갑작스레 모든 글이 사라지고 그 한 문장만 남았지. 그나마 그것도 사명이 적은 문장이 아닐세. 참으로 기묘한 일이 아닌가.”


  매장소는 동화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리 없다 여겨, 그것들 사이의 연결 고리에 대해 골똘히 생각했다. 먼저, 오금환은 일시적으로 신력을 빼앗는 독약이었다. 오래 전 언젠가 오금환에 대해 적힌 서책을 본 린신이 절안에게 그것을 매장소에게 쓸 수는 없는지 물었던 적이 있었다. 당시 절안은 매장소의 몸이 그 독성을 감당할 수 없어, 약으로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답을 내어놓았다. 만약 오금환의 독성을 이겨낼 수 있을 정도로 강건한 신체를 지닌 이라면 그것을 먹고 신력을 잃은 채로 부려산의 결계를 넘을 수 있을 터였다. 해약도 함께 가져갔다 하였으니 결계를 넘자마자 해약을 먹었다면 그 농질이라는 요괴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사라진 오금환과 그 해약은 두 개씩이었으니, 다른 한 쌍은 결계 밖으로 나오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을까. 이렇게 생각하면 동화가 해준 이야기 중 두 가지는 완벽하게 연결이 되는 셈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이고, 무엇 때문에 요괴를 봉해 놓은 결계를 넘어가려 했을까. 죽간을 본 절안의 반응으로 미루어, 그 답은 죽간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


  “형님. 제가 그 죽간을 좀 보아도 되겠습니까?”


  매장소의 청에 절안은 머뭇거리며 동화와 매장소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동화는 그저 지켜보기만 할 뿐, 절안에게 답을 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절안은 결국 죽간을 매장소의 손에 넘겨주었다. 매장소는 죽간에 쓰여진 그 단 하나의 문장을 천천히 읽어내려갔다. 그리고는 떨리는 손을 주체하지 못해 죽간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죽간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랑야각주의 아들로 태어나 ‘린신’이라는 이름을 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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