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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02

악연은 인연이 되어





  매장소와의 첫 만남 바로 다음 날, 린신은 다시 매장소를 만나기 위해 일찍부터 십리도림으로 향했다.


  “또 오랬다고 정말로 하루 만에 다시 온 걸 보니 우리 장소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지?”


  그러나 그 날, 린신은 매장소 대신 원망 섞인 눈빛을 하고 있는 절안을 마주해야 했다. 이번에는 매장소가 곁에 없어서인지, 절안은 더 이상 원망을 장난으로 가리려 하지 않았다.


  “내 알고도 눈감아 주었건만, 참으로 염치가 없구나.”


  팔짱을 낀 채 저를 내려다보는 절안의 차가운 얼굴에 린신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몇 번을 생각해 보아도 어린 봉황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고,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음이 확실했다. 그렇다면 사죄는 물론이고, 벌을 내린다 하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며, 잘못을 바로잡을 때까지 사력을 다해야 함이 옳았다. 린신은 얼른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비록 고의는 아니었으나, 봉황족의 귀한 아이의 목숨에 위협이 될 만한 행동을 하였고, 처벌이 두려워 이를 즉시 고하지 않고 숨겼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상신께서 어떠한 벌을 내리신다 해도 달게 받을 것입니다.”


  그런 린신을 바라보는 절안의 입술 사이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벌을 할 것이었으면 삼백 년 전에 했겠지. 여전히 너를 벌할 생각은 없다. 따지고 보면 그 귀한 알을 결계 하나 없이 방치한 내 부주의이기도 하니까. 허나, 그렇다 해도 장소가 저런 몸으로 태어난 것에는 네 탓도 분명히 있으니, 내 너를 웃는 낯으로 대하기가 힘들구나.”


  린신은 꿇어앉은 채로 고개를 들어 절안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가르쳐주소서.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러나 절안은 또다시 한숨을 쉬었다.


  “내가 알을 그 곳에 놓아둔 탓에, 그리고 네가 그 알에 흠집을 낸 탓에 장소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느냐. 천도복숭아의 과즙으로 상처를 봉한 덕에 목숨은 건졌으나, 그 과즙이 만든 길로 너무 많은 정기가 흘러들러가 버렸다. 장소의 몸이 제 기운을 감당하기 버거워할 정도로 말이다. 넘치는 신력을 견뎌내는 것만으로도 모든 기력을 소모해버리니, 조금만 움직여도 금세 지치는 것이고, 지친 몸에 쉬이 병이 깃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느냐. 헌데, 이런 장소에게 네가 무엇을 해줄 수 있단 말이더냐.”


  린신은 시선을 내리깔고 잠시 생각에 잠기는가 싶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때, 이 어린 여우의 눈동자에는 결연한 의지가 비치고 있었다.


  “의술을 가르쳐 주십시오. 상신께서는 상고신이며 봉황족의 큰 어른이시니 그 아이에게만 오롯이 마음을 쏟으실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의술을 배워 보탬이 되겠습니다. 그 아이가 혼돈으로 돌아가는 그 날까지 제가 의원으로서 그 곁을 지키겠습니다.”


***



  의원으로서 평생 매장소의 곁을 지키겠다는 말이 허언은 아니었는지, 린신은 절안에게 의술을 배우는 것에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러한 모습에 린신을 향한 절안의 원망도 점점 옅어져갔고, 1만년 정도가 흘렀을 즈음, 절안과 린신은 도화주에 취한 채로 마주 앉아 시답잖은 소리나 하며 웃어댈 수 있을 정도로 편한 사이가 되어 있었다. 마찬가지로 린신과 매장소 사이의 우정 역시 날로 몸집을 키워, 두 사람은 언젠가부터 서로를 평생을 함께할 둘도 없는 벗으로, 혹은 그 이상으로 여겼다.

  다만, 절안은 린신에게 매장소가 아직 알 속에 잠든 채였을 때 그가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철저히 함구할 것을 요구했다. 봉황은 본래 호전적인 성정을 지녔고, 실제로 몸으로 하는 것이든 신력을 사용하는 것이든 싸움에 아주 능했다. 하지만 매장소는 봉황다운 호전적인 성정을 지녔음에도 타고난 병약함 탓에 몸을 움직여 하는 일은 무엇이 되었든 제대로 해낼 수 없었고, 강한 신력을 사용할 수는 있으나, 이 역시 체력이 받쳐주지 않아 오래 유지할 수는 없었다. 이러한 현실은 매장소로 하여금 스스로가 전혀 봉황답지 못하다는 생각을 거듭하게 했고, 약해 빠진 몸뚱이를 원망하고, 때때로 잠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움에 몸부림치도록 만들었다. 절안의 함구령은 매장소가 늘 품고 있는 그 부정적인 감정들로부터 린신을, 다시 말해, 매장소의 유일한 벗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러나 영원한 비밀이란 있을 수 없었다. 린신과 매장소가 4만 살 즈음 되었을 때, 매장소는 비로소 제가 왜 그러한 꼴로 태어나야 했는지 알게 되었다.

  겨울의 한가운데, 며칠째 굵은 눈발이 날리고 있었고, 매장소는 침상에 누워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찬바람이 부는 시기가 되면 늘 앓아눕기는 했지만 그 해에는 유독 그 정도가 심하여, 절안과 린신이 번갈아가며 밤낮없이 곁을 지켜야 할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의 새벽, 린신은 매장소가 침상 위에 무릎을 세운 채로 앉아, 그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자네, 이제 좀 괜찮은 겐가? 절안에게서 별다른 말이 없기에 차도가 없는 줄 알았네만.”


  밤새 매장소의 곁을 지킨 절안과 막 교대한 린신이 매장소를 향해 물었다. 매장소는 잠시간 린신 쪽을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고개를 떨궜다.


  “장소……?”


  심상치 않은 느낌에 린신은 얼른 매장소의 곁에 다가가 앉았다. 매장소의 몸은 여전히 불덩이였다.


  “아무래도 자네, 누워 있는 것이 좋겠어. 아직 열이…….”
  “린신.”


  매장소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나지막한 목소리만으로 린신의 말을 끊었다. 그리고는 한쪽 팔을 들어 올리더니 손을 활짝 펼쳤다. 매장소의 하얗고 작은 손 위로 뜨거운 불꽃이 피어났다.


  “나는 봉황일세. 봉황은 이처럼 꺼지지 않는 불을 피울 수 있어. 이 불은 오로지 그 주인의 의지로 타오르기도 하고 사그라지기도 하지. 신력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큰 불을 피워낼 수 있고. 아마 나 정도의 신력을 가진 이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모든 힘을 쏟아 부어 불을 낸다면 팔황 중 하나 정도는 전부 잿더미가 되어버릴 걸세. 나는 그만큼이나 강한 봉황이야. 헌데…….”


  매장소는 펼쳤던 손가락을 접어 주먹을 쥐었다. 동시에 불꽃도 사라졌다. 힘껏 말아 쥔 주먹이 가늘게 떨렸다. 아니, 매장소의 몸 전체가 떨리고 있었다.


  “이 나약한 몸뚱이가 나를 옭아매……. 그만한 신력을 지녔음에도, 그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체력이 없고, 몸을 단련하고자 해도 이 몸을 짓누르고 있는 신력을 감당해내는 것만으로도 벅차서 금세 지쳐버리니 도무지 방법이 없어. 어찌하여 하늘은 내게 이런 저주를 내렸단 말인가. 강한 힘을 줄 것이라면 그에 걸맞은 신체도 주었어야지……! 건강한 육체를 줄 수 없다면 강한 힘을 주지 말았어야지…….”


  흐느낌이 섞인 목소리였다. 린신의 가슴 속에 무거운 바위덩어리가 쿵, 내려앉았다. 기실 매장소는 자신의 나약한 몸뚱이를 인지할 때마다 하늘을 원망하며 괴로워하였으나, 단 한 번도 그것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마치 제 처지를 온전히 받아들인 양 침상에 누운 채로도 언제나 어여쁜 미소를 지어보였던 것이다. 그 미소는 천지와 함께 태어난 늙은 봉황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으나, 제 또래의 어린 여우의 눈을 가릴 수는 있었다. 그렇기에 린신은 매장소가 살아오는 내내 품고 있었던 부정적인 감정들을, 4만 년 만에야 처음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었다.


  “이걸 보게!”


  매장소는 고개를 들어 눈물로 얼룩진 낯으로 린신을 바라보며 팔을 더욱 높이 들었다. 팔뚝 위로 영롱한 빛깔의 깃털이 자라나는가 싶더니 이내 팔 전체가 새의 날개 모양으로 변하였다.


  “나는 봉황이야! 화염 속에서 태어나는 봉황이라고!”


  절규하듯 고함을 지른 뒤, 그것만으로도 기력이 다한 듯 매장소의 몸이 휘청거렸다. 날개로 변했던 팔은 어느새 인간의 팔 모양으로 돌아와 있었다. 린신은 힘없이 흔들리는 매장소의 몸을 받쳐 안았다.


  “나는 화염 속에서 태어나, 화염을 품고 살아가는 봉황이거늘……. 그런 내가 고작 추위와 눈을 이기지 못해 몇날며칠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한다는 것이, 자네는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가?”


  자조 섞인 목소리가 린신의 귓가를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매장소가 평소의 그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구는 것은 역시 몇날며칠 지겹게 흩날리는 눈 때문인 듯했다. 본래 봉황이라면 하루 종일 눈보라 한가운데에 있어도 추위를 느끼지 못해야 하는 것이었으니. 자신의 품에 기대어 조용히 눈물짓는 매장소를 보며, 린신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계속 이대로 이 이의 곁에 있어도 되는 걸까. 이 이가 이토록 괴로워하게 된 것이 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로, 계속 이렇게 지내도 되는 걸까.


  ‘절안은 절대 이야기하지 말라고 했지만…….’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린신은 매장소를 침상 위에 살며시 눕히고는 그 아래로 내려가 무릎을 꿇었다. 하나뿐인 벗이 이렇게나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실을 숨기며 그를 기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네, 지금 뭐 하나?”


  매장소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내가 지은 죄를 고백하려는 걸세. 자네에게는 자네를 고통스럽게 만든 이를 원망하고 저주할 권리가 있으니까.”


  린신은 매장소가 알에서 깨어나기 전, 제가 그 알에 저지른 일부터 그 때의 일이 강한 신력과 허약한 신체라는 불균형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 그리고 절안에게 의술을 배우며 매장소의 곁을 지키는 것으로 제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음을 모두 털어놓았다.


  “용서는 구하지 않겠네. 말했듯 자네에게는 나를 원망하고 저주할 권리가 있고, 내게는 그것을 전부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으니까. 허나, 자네가 나를 용서하지 않더라도 내가 몇 번이고 사죄를 해야 함은 알아. 진심으로 미안하네. 경거망동하여 자네의 목숨을 앗아갈 뻔 했던 것도, 자네를 이렇게 태어나게 한 것도, 이제까지 그것을 숨겨왔던 것도, 전부 다 미안해.”


  매장소는 무표정한 낯으로 린신을 바라보다가 이내 그에게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그리고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지금은 자네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아.”


  이각 정도 지났을 때, 매장소는 그 한 마디만 뱉은 뒤 다시 입을 다물어버렸다. 린신은 한참 동안 꿇어앉은 채로 미동도 않고 있다가 기력을 소진한 매장소가 잠에 빠져들었을 즈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대 나를 용서하지 말게.”


  이때의 린신은 매장소의 눈앞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릴 생각이었다. 본래는 의원으로서 그를 돌보는 것으로 제 잘못에 대해 책임을 질 생각이었으나, 이제는 매장소에게 미움 받고, 원망을 듣고, 저주를 받는 것으로 그 책임을 다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다만, 자신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괴로울 터이니 일단은 모습을 감추는 것이 옳다고 판단한 것이었다.

  린신이 청구로 돌아가 십리도림에 걸음하지 않게 되자, 매장소는 묘한 분노에 휩싸였다. 처음에는 단지 그가 저를 이 꼴로 태어나도록 만든 자이기에, 그저 그에 대한 분노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분노의 원인이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곧 자신이 린신이 떠난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다시 마주하기 싫은 얼굴이어야 하는데, 어찌하여 그를 보지 못하는 것에 이리도 화가 나는 것일까. 매장소의 머릿속에는 내내 그러한 고민이 가득 차 있었다.

  그렇게 한 달 가량이 지나 매화가 피어나는 겨울의 끝자락에 다다랐을 무렵, 결국 매장소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아무래도 린신을 만나야 할 것 같았다.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아야 할 얼굴이 어째서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것인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를 만나면 답을 찾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린신이 십리도림에 찾아오지 않으니, 직접 청구로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가 먼저 몇 번이고 사죄를 하겠다고 이야기한 바 있으니, 지난 한 달간 밀린 사과를 받아야 한다는 그럴싸한 핑계도 있었다. 결심이 확고해짐과 동시에 연기가 피어올라 매장소의 몸을 감쌌고, 연기가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다.

  연기 속으로 사라진 매장소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역시나 청구였다. 이전에 몇 번인가 절안과 함께 걸음 했던 적이 있었던 터라, 어렵지 않게 린신의 처소를 찾을 수 있었다. 호제 백가(家)의 거처와 멀지 않은 곳에 그보다 조금 작은 굴이 하나 더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린가(家)의 거처였다. 가족이 함께 기거하는 곳이라고는 하나, 린신의 어미는 몸이 약해 린신을 낳고 얼마 지나지 않아 혼돈으로 돌아갔고, 린신의 아비는 젊은 시절부터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범계를 유람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들에게 자식이라고는 린신 하나뿐이었으니, 사실상 그곳은 린신 혼자 사용하는 공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였다.


  “으아아!!”


  매장소가 막 여우굴 앞에 다다랐을 때, 굴 안에서 작은 아이 하나가 울먹이며 뛰쳐나왔다. 미곡 나무가 변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이유로 미곡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청구에서 이런저런 심부름을 도맡아 하고 있는 아이였다.


  “심심하시면 저한테 이러지 마시고 십리도림에 가시면 되잖아요!!”


  미곡이 굴을 향해 소리를 지르자, 굴 안쪽에서 나뭇가지를 깎아 만든 비녀 하나가 날아와 아이의 머리카락을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엮어버렸다.


  “린 신군! 정말 계속 이러실 거예요?”


  미곡의 머리카락에는 비슷하게 생긴 비녀가 이미 여러 개 달려 있었다. 매장소는 울음을 터뜨리기 직전인 아이를 보며 한숨을 짓고는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아이의 머리카락에 엉겨있는 비녀들을 모두 제거해 주었다.


  “매 신군!”


  그제야 매장소를 발견한 미곡이 공손하게 허리를 숙이며 예를 갖추었다.


  “린신이 안에 있긴 한가 보구나. 가서 내가 왔다고 알려다오. 저가 밖으로 나오든, 나를 안으로 들이든 얼굴 좀 보자고 말이다.”


  조금 전에 짓궂은 장난을 당한지라, 미곡은 다소 머뭇거리며 굴 안으로 들어갔다.


  “읏…….”


  미곡이 굴 안으로 사라지고 얼마 후, 매장소는 시야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며 제 이마를 짚었다. 정상보다 높은 체온이 느껴지는 이마에서 조금씩 식은땀이 비어져 나오고 있었다. 한겨울보다는 나아졌다고는 하나, 그는 아직 병상을 벗어날만한 수준은 못 되었던 것이다. 그런 상태로 십리도림에서 청구까지 신력을 사용해서 이동하고, 조금 전, 미곡의 머리카락에서 비녀를 빼 주는 데에도 한 번 더 신력을 사용하였으니 그 결과가 곧장 몸으로 나타났다. 현기증은 점점 심해졌고, 린신에게 말을 전하러 들어간 미곡은 다시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매장소는 굴 입구의 돌계단에 주저앉았다. 돌의 표면에 묻어 있는 찬 기운 탓에 몸이 흠칫 떨렸다.


  ‘이건 정말이지 나답지 않군. 겉옷 한 벌 걸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니.’


  금세 지치고, 쉬이 병드는 몸을 지녔다는 것은 단 한 번의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최대의 효율을 낼 수 있어야 함을 의미했다. 그렇지 않으면 행하고자 하는 것의 반의반도 제대로 해낼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매장소는 언제나 행동에 앞서 수십 번, 수백 번 생각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4만년을 그렇게 살아왔거늘, 이번에는 린신을 만나야겠다는 것 이외의 다른 것들은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으니, 평소 매장소의 성격에 비추어 보면 좀처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이 작자는 왜 이리 답이 늦는단 말인가.’


  매장소는 몸을 한껏 웅크리며 마음속으로 린신을 향해 한바탕 욕지거리를 퍼부었다.

  한편, 미곡에게 매장소가 와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린신은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고민을 거듭하고 있었다. 절안과 함께였다면 별다른 목적 없는 방문일 수 있었으나, 홀로 왔다는 것은 무언가 분명한 방문 목적이 있다는 뜻이었다.


  “왜 왔는지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 말 없었고?”


  벌써 같은 질문만 세 번째였다. 미곡은 짜증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꼬리 한두 개 정도 태워 없애버리겠다 해도, 아니, 그냥 내 몸 전체에 불을 질러버리겠다 해도 할 말 없는 입장이긴 하지만…….’


  린신은 제 머리를 쥐어뜯으며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매장소가 저에게 어떤 짓을 한다 해도 전부 다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매장소의 얼굴을 다시 마주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더 이상 자신에게 웃어주지 않는 매장소와 만나는 것이 두려웠다. 매장소를 만나지 않고 지냈던, 그리고 아마도 매장소에게 미움 받고 있었을 지난 한 달, 린신이 깨달은 한 가지는 바로 매장소를 향한 그 자신의 마음이었다. 호제의 넷째 아들인 백진이 아주 어릴 때부터 상고의 봉황에게 반해서 미혼술을 익히자마자 당장 십리도림으로 달려갔다가, 제대로 실패하고는 민망함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돌아왔을 때, 린신은 사해팔황에서 가장 아름답다 일컫는 구미백호가 고작 봉황 하나를 유혹하지 못했느냐며 그를 놀려댔었다. 백진이 분에 못 이겨 눈물을 보일 때까지 깔깔거리며 웃었던 그 일이 그다지 오래 지나지 않았건만, 린신은 저에게 저주를 퍼붓고 있을지도 모를 봉황을 사랑하게 된 것이었다.


  ‘그나마 절안은 백진에게 나쁜 감정은 없는데, 나는……. 아아, 장소, 저주를 하려면 십리도림에서 하지, 어찌 꼴도 보기 싫은 내 낯을 보러 청구까지 찾아온 것이야…….’


  미곡은 무어라 답을 하실 거냐며 거듭 물었으나, 린신은 저만의 생각에 빠져 그 소리를 전혀 듣지 못했다. 기다리다 지친 미곡의 입에서 하품이 새어나왔을 무렵,


  “린신! 안에 있으면 빨리 이리 나와!!”


  굴 밖에서 천둥 같은 목소리가 울렸다. 미곡은 분명 매장소가 홀로 왔노라 이야기했건만, 그 목소리는 절안의 것이었다. 귓전을 때리는 커다란 목소리에 담긴 다급함에, 린신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굴 밖으로 향했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안에 있었으면서 이 아이를 차가운 돌계단 위에 방치한 건가?”


  불길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절안은 식은땀을 흘리며 밭은 숨을 내뱉는 매장소를 안아들고 있었다. 이마를 짚어보지 않아도 온 몸이 불덩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얼빠진 표정으로 매장소를 바라보기만 하는 린신을 향해 절안이 한 번 더 소리쳤다.


  “뭘 꾸물대는 게야? 장소를 눕힐 자리를 준비해야 할 것이 아니더냐!”


  그답지 않게 고압적인 말투였다. 절안은 상고신으로서 뭇 신선들의 존경을 받는 위치에 있는 이였으나, 호제 부부와 한 가족이나 다름없이 지냈기에, 아주 어린 아이가 아닌 이상, 그가 호제 부부와 그 일가를 하대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여우가 아닌 봉황이었고, 청구와의 의보다는 어린 봉황의 안위가 더 우선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평소와 다른 말투는 그가 매장소를 얼마나 아끼는지를 나타냄과 동시에, 매장소의 상태가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을 의미했다.


  “린신!!”


  다시 한 번 절안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을 때에야 정신을 차린 린신은 그를 제 침소로 안내하고, 제 침상 위에 매장소를 눕힐 수 있도록 했다. 눈치 빠른 미곡은 재빨리 차가운 물과 깨끗한 수건을 준비했다. 기실 매장소를 괴롭히는 병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심한 고뿔 정도였다. 보통의 경우, 신선들은 고뿔 정도는 신력을 이용한 치유술로 눈 깜짝할 새에 고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매장소의 경우에는 이미 너무나 강한 신력이 그의 몸속에서 소용돌이 치고 있기에, 병을 다스림에 있어서 섣불리 신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러니 한 번 병을 얻으면 오랜 기간 앓아야 했고, 병을 다스리는 일 역시 쉽지 않았기에 절안은 되도록 매장소가 앓는 일이 없도록 하려 애써왔다. 하지만 매장소는 린신과 어울리다가 앓아눕는 일이 잦았고, 이번에는 거의 다 나아가던 병이 린신 때문에 악화된 꼴이니, 절안의 안에서 잊고 있던 원망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장소의 침상이 비어있기에 설마 해서 와 봤더니만, 대체 이게 다 무어야!!”


  분노를 감추지 않는 절안의 곁에서 린신은 그저 죄인의 낯으로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절안은 린신에게 필요한 약재를 일러주며 탕약 달이는 일을 지시한 뒤, 매장소의 이마 위에 찬 수건을 올리고, 자신의 힘이 그 수건을 거쳐 매장소의 몸에 닿도록 하는 방식으로 조심스럽게 치유술을 펼쳤다. 린신이 약재를 손질하고 탕약을 달이는 동안 절안의 치유술은 쉼 없이 계속되었다. 그 결과, 한 시진 가량이 흐른 뒤 린신이 탕약을 들고 돌아왔을 때, 매장소의 호흡은 한결 편안해져 있었다.


  “장소는……, 괜찮은 거야?”


  절안에게 매장소의 상태를 확인하는 린신의 목소리는 매우 조심스러웠다.


  “겨우내 앓던 것이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신력을 사용한 탓에 잠시 열이 올랐던 것뿐이야.”


  절안은 언제 분노를 내비쳤냐는 듯 평온한 표정과 가벼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래된 원망은 다시 가슴 깊은 곳으로 가라앉은 뒤였다. 그 자신의 말처럼 매장소에게 그다지 큰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낯으로 답지 않게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를 내는 어린 여우가 안쓰러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으…….”


  린신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때, 자그마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절안과 린신의 시선이 곧장 침상에 누워 있는 매장소에게로 향했다. 매장소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곧 갈색 눈동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 눈동자는 절안 쪽으로 향했다가 이내 린신에게 닿았다. 그리고 그 순간, 매장소는 조금 전까지 앓던 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몸을 일으켜 린신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그 바람에 탕약 그릇이 린신의 손에서 떨어져 돌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장ㅅ……”
  “뭐 하는 거야, 대체!!”


  매장소가 날카롭게 외쳤다. 린신은 입을 다무는 것으로도 모자라, 입술을 안으로 말아 넣고 이로 꽉 물었다. 매장소의 눈에서 불꽃이 이는 듯하여,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조금이라도 실수를 한다면 뼈도 못 추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매장소의 손아귀에 조금 더 힘을 들어갔다. 린신의 몸이 휘청거릴 정도였다. 평소의 매장소라면 상상도 못할 힘이었으나, 봉황이 호전적인 성정을 지녔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순간적으로 끓어오른 분노가 일시적으로 그를 강하게 만들었다.


  “내가 용서하지 않더라도 몇 번이고 사죄해야 함은 안다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한 달이나 얼굴 한 번 비치지 않을 수가 있어? 얼굴도 보지 않고 어찌 사죄를 하겠단 건가?”


  매장소의 말에 틀린 점이 없어, 린신은 더더욱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리고, 내 이리 직접 사죄를 받고자 찾아왔으면 곧장 나와 보거나 나를 안으로 들이거나 했어야지, 감히 기다리게 해? 분노한 봉황의 화염이 무섭지 않은 게지? 대륙을 태워버릴 체력은 없어도 여우 한 마리 태울 힘은 있어!”


  매장소는 린신의 옷깃을 잡지 않은 손 위로 불꽃을 피워 올렸다. 린신의 낯빛은 체념 그 자체였다. 절안은 어느새 한 발 물러서서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내 손에 죽는 걸 억울하게 생각하는 표정은 아니로군. 그나마 다행이야. 자신의 처지를 알고 있다는 점은.”


  그렇게 말하는 매장소의 눈빛과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워, 린신은 정말로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온 몸의 털이 쭈뼛 섰다. 그러나 이내 매장소의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눈물이 비치기 시작했다.


  “장소……?”


  린신은 몇 번의 망설임 끝에 매장소의 이름을 불렀다. 그와 동시에 매장소의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흐윽…….”


  얼마 가지 않아 매장소는 소리 내어 흐느끼며 린신의 옷깃을 놓아주고 손바닥 위로 피워 올렸던 불꽃도 거두어들였다. 린신은 저도 모르게 그런 매장소의 뺨을 감싸고 엄지손가락을 그의 눈가에 문지르며 눈물을 닦아내었다. 그럴수록 흘러내리는 눈물의 양은 늘어가기만 했다.


  “나를 이 꼴로 태어나게 만든 작자인데……. 그 작자가 무에 그리 그리워서, 그 작자를 다시 만난 것이 무에 그리 반갑다고……. 그 망할 여우가 나를 바라보는 눈동자에 여전히 애정이 담겨 있다는 것에……, 겨우 그딴 것에 어찌 이리도 안도가 되는 것인지…….”


  울먹이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던 매장소가 흐느낌 사이로 기침을 뱉어내기 시작했다. 린신은 힘없이 흔들리는 매장소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러나 매장소는 그 손길을 매몰차게 뿌리치고 제 스스로 침상을 짚고 위태롭게 몸을 지탱했다.


  “……화가 나.”


  기침이 멎은 뒤, 매장소가 들릴락 말락 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자꾸만 보고 싶고, 어떻게든 만나야 하는 이유를 만들어내려 하는 나에게 화가 나. 이 감정이 무엇인지 도저히 모를 수가 없어서, 모른 척 외면할 수도 없어서……, 그래서 화가 난다고!!”


  매장소는 고개를 숙여 린신이 제 낯을 보지 못하도록 했다.


  “나를 무늬만 봉황으로 만들어 놓은 여우 놈, 미워하고 원망하기만 해도 모자란데 어째서……, 어째서 나는 그 망할 여우에게 연정을 품게 된 것일까…….”


  뜻밖의 고백에 린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조금 전에 들은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아, 제 귀나 머리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만 반복했다. 저도 모르게 제 속마음을 모두 털어놓은 매장소도, 그 말을 믿을 수 없는 린신도 무슨 말을 더 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풉.”


  그 적막을 깨뜨린 것은 참다 참다 터져 나온 절안의 웃음 소리였다. 린신의 시선이 절안에게로 향했고, 매장소도 고개를 들어 절안을 쳐다보았다. 가려져 있던 매장소의 얼굴은 온통 붉게 물든 채였다.


  “장소. 대체 누가 네게 무늬만 봉황이라고 그러더냐. 이렇게나 나를 쏙 빼닮은 것을.”


  절안이 매장소에게로 다가와 그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평소에는 그리도 행동 하나하나 신중하던 녀석이 미혼술도 쓰지 않은 구미호에게 홀랑 넘어가서는 앞뒤 재볼 생각도 않고 청구로 달려온 꼴이 꼭 이전에 나를 보는 것 같은걸. 내가 린신의 고모에게 반해 있을 때와 참으로 닮았어. 그리고 내 지금은 꽤 점잖게 행동하고 있지만, 어렸을 적에는 말이다, 네가 조금 전에 린신을 태워 죽이겠다 겁박했던 것처럼 성질이 아주 불 같았지. 오죽하면 부신께서 복희금을 봉하여 천족을 안심시키라 하셨을까. 나는 최초의 봉황이다. 이런 나를 닮은 네게 누가 감히 봉황답지 않다 할 수 있을까.”


  매장소의 낯빛이 아주 약간이나마 편안해졌다. 절안은 매장소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준 뒤, 린신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네 녀석은 내 아우의 고백에 어서 답을 해 주어야지? 오늘만 해도 찬바람이 부는 곳에서 꽤 기다리게 했는데, 더 기다리게 할 셈인가?”
  “형, 형님……!!”


  매장소는 당황한 듯 절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의 얼굴은 더욱 붉어져, 그 위로 화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평소와 달리 허둥대는 매장소와 달리, 린신은 절안의 말을 듣고 결심이 선 모양인지 매우 진지하고 차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소.”


  좀처럼 들을 수 없는 린신의 나지막한 목소리에, 매장소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리고 한 번 눈이 마주치자, 더 이상 그 눈빛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자네에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내가 감히 이런 마음을 품어도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린신의 커다란 두 손이 매장소의 자그마한 두 손을 따뜻하게 감싸 쥐었다. 이미 그 손끝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모든 이야기를 대신하고 있었다.


  “나 역시 자네를 연모하네.”


  린신은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에 힘을 주어서 분명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그가 말을 마친 뒤, 또다시 정적이 흐르는가 싶더니 이내,


  짝―!


  하는 마찰음이 여우굴을 울렸다. 매장소가 린신의 뺨을 때린 것이었다.


  “태워 죽이려다가 이걸로 끝내는 거야.”


  린신은 붉게 손자국이 남은 뺨을 감싸며 얼빠진 표정으로 매장소를 쳐다보았다.


  “……정인을 죽일 수는 없으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린신은 바보처럼 웃으며 매장소를 힘껏 끌어안았다. 이를 지켜보던 절안은 매장소에게,


  “너무 늦게 들어오진 말고. 너 아직 다 나은 거 아니야.”


  하는 당부를 남기고 십리도림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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