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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야방/린매] 상애겁(相愛劫) 01

모든 것의 시작







  자그마한 창을 통해 아침 햇살이 쏟아져 들어와 곤히 잠든 사내의 눈가를 어루만졌다. 사내는 저를 깨우려는 햇살에게 저항하듯 몸을 뒤척였다. 일각 정도가 더 지나자 햇살은 이제 달콤한 도화 향을 싣고 사내의 코끝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이쯤 되면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저항은 무의미했다. 기실 매일 아침이 조금도 다르지 않았지만 사내는 매번 힘껏 저항해보고는 했던 것이다. 그러나 부드럽고 따스한 햇살도, 누구든 한 번 들이쉬면 행복이 솟아날 정도로 기분 좋은 향도 사내의 눈꺼풀을 깃털처럼 가볍게 만들 정도는 못 되는 모양이었다. 사내는 천천히 무거운 몸을 일으키더니 고작 그 정도의 움직임만으로도 지쳤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몸이 좋지 않은 듯 사내의 낯빛은 밝지 않았지만, 그 용모만은 남녀를 불문하고 그 누구와 견주어도 모자람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내리깐 눈은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반쯤 열린 매화 꽃봉오리의 수줍은 모습과 같았고, 병자임은 분명하였으나 그 새하얀 얼굴 역시 병색보다는 백매의 빛깔에 가까웠다. 그와 선명히 대조되는 선홍빛 입술은 홍매의 빛이었으니, 그 자체로 매화와 같은 이였다. 이 사내는 그 용모에 걸맞게도 매장소라는 이름을 가진 자로, 이제 막 5만 살을 넘긴, 선계에서 가장 어린 봉황이었다.


  “일어났느냐.”


  매장소는 제게 질문을 던지는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탕약 그릇을 들고 침상 곁에 앉은 이는 다름 아닌 절안이었다. 그는 천지가 개벽할 때에 태어난 최초의 봉황으로, 매장소는 최근 5만년 사이 그의 가장 큰 걱정거리이기도 했다. 어린 봉황은 강한 신력을 지니고 태어났으나 그 힘을 감당할만한 신체를 갖추지 못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골골대기 일쑤였다.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인 절안의 하루 첫 일과가 탕약을 달이는 일일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절안은 미소로 답을 대신하며 매장소에게 탕약을 건넸다. 한 가족처럼 가까이 지내는 청구의 여우들에게 종종 ‘늙은 봉황’이라고 놀림을 받아서 그런 것인지, 절안은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했고, 이에 제 나이에 비하면 신생아 수준인 어린 봉황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도록 했다. 그리하면 매일 먹는 탕약을 최대한 쓰지 않게 만들어 주겠노라는 말에 매장소는 그 양심 없는 요구를 받아들였으나, 탕약 맛은 여전히 매우 쓴 편이었다. 매장소가 잔뜩 얼굴을 찡그린 채 탕약을 들이키는 동안 절안은 신력을 사용하여 그의 몸을 살폈다. 근래에 호제의 처조카와 어울려 다니다가 기력이 쇠하여 크게 앓았던지라 절안의 걱정은 평소보다 조금 더한 상태였다. 빈 탕약 그릇을 내려놓다가 그 근심 가득한 낯을 본 매장소는 죄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심려를 끼쳐 송구합니다.”


  절안은 심성 고운 어린 봉황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가 사죄할 것 없다. 사죄는 그 꼬마 여우가 할 일이지.”


  절안의 눈동자가 매장소의 발치로 향했다. 그곳에서 아홉 개의 꼬리를 지닌 붉은 여우 한 마리가 튀어나와 대뜸 절안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이빨을 세운 꼴이 제법 위협적이었으나, 매장소는 가벼운 한숨과 함께 손쉽게 여우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비승상선 한다 하여 철이 드는 것은 아닌가보군.”


  비웃는 듯한 매장소의 말에 여우가 몸을 비틀어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침상 아래로 내려선 여우의 몸이 하얀 연기에 휩싸이더니 어느새 그 자리에는 여우 대신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매장소보다는 조금 더 선이 굵은 미남으로, 긴 옷자락을 정리하는 손길은 춤을 추듯 우아하였으나 귓불이 아닌 귓바퀴에 박아 넣은 은 장신구는 기품보다는 자유분방한 성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몸 약한 정인을 돌보러 온 것인데, 너무한 것 아닌가?”


  사내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절안이 말한 꼬마 여우란 바로 이 사내를 뜻하는 것이었다. 린신이라는 이름의 사내는 구미호족 수장인 호제 백지의 처조카인 구미적호로, 나이는 매장소보다 몇 백 살 많은데, 얼마 전 천겁을 견뎌내고 어엿한 상선이 된 몸이었다.


  “애초에 내가 이리 드러누운 게 누구 탓인데? 그리고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인 절안 형님이 내 곁에 계시는데, 자네 같은 엉터리 의원의 보살핌을 받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매장소는 부러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린신은 이를 뿌득 갈더니 절안을 향해 돌아섰다.


  “당신이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이든 아니든 상관없어! 장소는 무조건 내가 돌볼 거야!”


  그 외침에 매장소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고 절안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매장소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러한 세 사람의 모습은 십리도림에서 흔하게 목격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




  5만 년 전, 범계에서 정겁을 겪고 돌아온 봉황 하나가 시름시름 앓다가 혼돈으로 돌아갔다. 무사히 선계로 돌아와 비승상신 하였으나, 정겁의 일부로서 맺었던 범계에서의 인연을 잊지 못하여 비극을 맞이한 것이었다. 혼돈으로 돌아가던 순간, 그의 몸에서는 붉은 화염이 일어나 뜨겁게 타올랐고, 불이 사그라지고 남은 잿더미 위에는 알 하나가 놓여 있었다. 봉황의 죽음은 곧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기도 했다. 이처럼 다른 종족과는 탄생의 과정 자체가 달랐기에, 이 알은 봉황족으로서는 참으로 오랜만에 맞이하는 새 생명이었다. 알은 범상치 않은 기운을 내뿜고 있었고, 태어날 새끼 봉황 또한 보통 인물은 아닐 것이 자명했다. 그러한 연유로 알은 최초의 봉황인 절안의 손에 맡겨졌다. 절안은 십리도림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의 굵은 뿌리 사이에 알을 놓아두고 나무로부터 전해지는 맑은 정기를 한껏 받을 수 있도록 했다.

  그 당시 삼백 살 정도였던 어린 여우, 린신의 가장 큰 낙은 여우의 모습으로 청구와 십리도림을 뛰어다니며 노는 것이었다. 청구에서부터 물길을 따라 십리도림까지 가는 길의 풍광은 계절마다 빛깔이 다른 아름다움을 뽐내었고, 심지어 날씨가 굳은 날에도 한 폭의 그림과 같았다. 도착지인 십리도림 역시 사시사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도화나무가 가득하여 언제든 달콤한 꽃향기 속을 마음껏 헤엄칠 수 있었다.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어린 여우에게 그보다 좋은 놀이터는 없었다.

  도화의 빛깔이 가장 아름다워지는 봄의 어느 날, 린신은 십리도림의 크고 오래된 도화 나무 아래에서 돌 하나를 발견했다. 아직 아는 것이 많지 않은 어린 여우가 보기에도 그것은 보통 돌이 아니었다. 그 돌은 여우의 모습을 하고 있을 때의 린신과 비슷할 정도로 크기가 컸고, 무채색을 띠는 보통의 돌과는 달리 석양과 같은 붉은 색을 띠고 있었다. 호기심 많은 어린 여우는 조심스럽게 앞발로 그것을 툭 건드려 보았다. 그러자 돌은 잠시간 아주 밝은 빛을 발산했다. 빛이 사그라진 뒤, 린신은 다시 한 번 툭, 조금 더 힘을 주어서 알을 건드렸다. 돌은 다시금 빛을 내었는데, 처음보다 그 시간이 약간 더 길어졌다. 린신은 설마 하며 다시 두 번째보다 좀 더 강한 힘으로 돌을 건드렸다. 돌은 훨씬 더 긴 시간동안 빛을 발했다. 신기한 놀잇감이 생긴 어린 여우는 이리저리 힘 조절을 하면서 몇 번이고 돌을 두드렸고, 그 때마다 돌은 길게, 혹은 짧게 빛을 내뿜었다.


  ‘혹시 아주아주 세게 내리치면 영원히 빛나는 돌이 되지 않을까?’


  린신은 자신의 이러한 호기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그마한 여우의 앞발이 있는 힘껏 돌에 부딪쳐온 순간, 바로 그 부분을 시작으로 돌 위에 기다란 금이 생겨난 것이었다. 그제야 린신의 머릿속에 어른들이 잿더미에서 생겨난 봉황 알에 대해 이야기했던 것이 떠올랐다.


  ‘설마 이게 바로…….’


  린신은 얼른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조금 전 린신이 벌인 일을 목격한 이는 없는 듯했다. 하지만 알에 생긴 금으로 조금씩 생의 기운이 빠져나오고 있으니 이대로 두면 들키는 것은 둘째 치고, 봉황족이 오랜만에 얻은 새 생명이 세상에 나오기도 전에 사라질 위기였다. 어떻게든 금이 간 알을 봉해야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 작은 여우는 용케도 자신이 지금 있는 곳이 십리도림이라는 것을 상기했다. 십리도림의 천도복숭아는 신선이 먹으면 생명력을 더해주는 과일이었다.


  ‘어쩌면 도움이 될 지도 몰라.’


  린신은 재빨리 나무에 올라 복숭아 하나를 따 와서는 그것을 반으로 갈라 새어나오는 과즙을 금이 간 알 위에 뿌렸다. 과즙이 미세하게 벌어진 금 사이로 스며들더니 그 모양대로 가느다란 빛을 내었다. 여기에 더하여, 린신은 자신이 알고 있는 치유술을 있는 대로 동원하여 상처 입은 알을 향해 쏟아 부었다. 기력을 모두 소진할 때까지 술법을 부리고 나서 다시 보니, 알에는 상처의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바짝 대고 꼼꼼히 살폈으나, 알의 표면은 언제 금이 갔었냐는 듯 매끈하기만 했다.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쉰 어린 여우는 그대로 알 위에 제 자그마한 머리를 올린 채로 잠이 들었다. 이후, 정말로 아무런 문제도 생기지 않았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부화할 때가 되지 않은 알에 금이 생긴 일, 그리고 그것을 천도복숭아와 구미호의 신력으로 봉해놓은 일은 생각보다 어마어마한 결과를 불러왔다.




***




  그 사고를 친 뒤, 린신은 꽤 오랫동안 십리도림에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가끔씩 여우굴에 찾아오는 절안도, 청구의 어른들도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으니, 알에 특별한 문제는 없다고 보아도 좋을 터였으나, 혹시나 하는 두려움을 떨쳐낼 수 없는 까닭이었다. 만약 새끼 봉황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면, 그저 절안이나 청구의 어른들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이라면, 혹은 이미 새끼 봉황에게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지만 그것이 제 탓임을 아무도 모른다거나, 또는 알고도 탓하지 않기로 하였기에 모른 척 하고 있을 뿐인 것이라면……. 이 가정들 중에 정답이 있을까봐, 그리하여 자신의 잘못을 마주하게 될까봐, 린신은 그 답을 지니고 있을 십리도림을 멀리하기로 한 것이다.

  린신의 염려가 무색하게 새끼 봉황은 무사히 알을 깨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십리도림에서 이를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고, 다른 여우들은 모두 그 연회에 참석했지만, 그 날, 린신은 홀로 자신의 침소에 남아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엉엉 울었다. 그 눈물에는 안도감이 반, 태어나기도 전에 죽을 위기에 처하게 했던 어린 생명을 향한 미안함이 반 섞여있었다.

  린신은 그 뒤에도 한동안 십리도림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아예 청구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새끼 봉황에게 탈이 난 것은 아닌 듯했지만, 린신은 두 번 다시는 그렇게 불안에 떨며 마음을 졸이는 경험을 하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배우고 익혀, 멋모르고 저지른 실수로 청구의 체면을 깎아내리지 않을 자신이 생기면, 그 때 다시 청구 바깥으로 나가보자고, 어린 여우는 스스로와 약속을 한 것이었다.

  린신이 다시 십리도림에 발을 들인 것은 그 일로부터 삼백여 년이 흐른 뒤였다. 그 날 역시 도화의 아름다움이 절정에 이르는 한봄의 어느 날로, 달콤한 꽃향기에 취해 걸음을 옮기다보니 십리도림에 들어서게 된 것이었다. 그 즈음의 린신은 조금씩 청구 밖으로 제 활동 영역을 늘려가는 중이었는데, 그렇다고 해도 아직은 십리도림에 다시 발걸음 할 때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제가 흐드러진 도화 사이에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적잖이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사랑하는 어린 여우로서는 한봄의 십리도림에서 단번에 걸음을 돌리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린신은 약간의 두려움을 안은 채로 도화 나무 사이를 거닐었다. 이전에는 늘 여우의 모습을 하고 네 발로 걸었던 곳을, 이제는 인간과 같은 형상을 하고 두 다리로 걷고 있자니 조금 색다른 느낌이 들었다.


  ‘앗……!’


  느린 걸음으로 일각 정도 걸었을 때, 린신의 눈에 익숙한 나무 하나가 비쳤다. 삼백여 년 전, 문제의 알을 품고 있던 바로 그 나무였다. 내내 품고 있던 두려움이 순식간에 몸집을 불렸다.


  ‘아무래도 돌아가야겠어.’


  그렇게 생각하며 반 보 정도 뒤로 물러섰을 때였다.


  “안녕?”
  “으악!!”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드는 바람에, 린신은 그만 크게 소리를 지르며 뒤로 자빠져 엉덩방아를 찧었다.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러거나 말거나 목소리의 주인공에게서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도, 괜찮냐는 물음도 없었다.


  “난 매장소라고 해. 너는?”


  린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목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몸을 돌렸다. 기껏해야 제 또래 정도 되는 어린 아이의 목소리였으므로, 뭐 하는 놈인지 참 예의도 없다고 한 마디 쏘아붙여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매장소와 얼굴을 마주한 순간, 그 생각은 봄바람을 타고 내리는 꽃비와 함께 허공에 흩어져버렸다.


  “봉황은 아닌 것 같은데…….”


  린신의 예상처럼 저를 매장소라고 소개한 이는 린신보다도 체구가 작은 어린 아이였다. 옅은 도화 빛이 옮은 뽀얀 피부와 맑고 커다란 눈망울을 지닌 가녀린 아이는, 옷차림이 아니었다면 여자 아이로 보일 정도로 어여뻤다. 그런 아이가 커다란 눈을 빛내며 쳐다보고 있었으니, 예의 없다고 타박하려던 마음이 사라져버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던 것이다.


  “나만큼이나 어린 신선은 처음 봤어! 넌 누구야?”
  “난…….”


  얼굴이 화끈거리고 목이 타는 느낌이 들어, 린신은 침을 한 번 꿀꺽 삼켰다.


  “나는 린신이야. 구미호족이고.”


  어느새 불쑥 끼어든 낯선 목소리를 향한 불쾌감은 린신의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어린 여우의 머릿속에는 그저 제 또래의 이 어여쁜 아이와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는 생각만 남았을 뿐이었다.


  “구미호족? 그럼 청구에서 온 거야? 잘 됐다!”


  매장소는 린신의 소맷자락을 잡아끌었다. 따뜻한 봄날임에도 매장소의 손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끌어당기는 손길에서도 그다지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뭐야, 이 녀석……. 닿을 수 있는 것을 보니 살아있는 자이긴 한 것 같은데, 차갑고 힘이 없는 것은 마치 망자의 혼령 같잖아.’


  린신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매장소에게 순순히 끌려가 주었다. 두 사람은 곧 다구가 준비되어 있는 나무 탁자 앞에 마주 앉게 되었다. 기실 그 곳은 절안이 가까운 이들과 언제든 도화를 보며 담소를 나눌 수 있도록 마련해둔 것이었지만, 그 때의 린신은 그런 사실까지는 알지 못했다. 매장소는 두 손으로 탕관을 들어 다관을 채우고, 다시 그것으로 찻잔을 채웠다. 그 일련의 동작으로 볼 때, 객을 맞이하는 기본예절이 확실히 몸에 익은 듯했다.


  ‘다짜고짜 예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말투로 말을 걸어오기에 웬 근본 없는 놈인가 싶었는데 이제 보니 그렇지만도 않은 모양이네. 헌데, 나보다도 어려 보이는 녀석이 어찌 이리도 십리도림을 제 집처럼……’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린신의 머릿속에 이 어여쁜 아이의 정체에 대해 무언가 떠올랐다.


  “청구는 어떤 곳이야? 그 곳도 엄청 아름답다고 들었어. 구미호족은 어떻게 살아가는 지도 궁금해! 뭐든 청구 얘기를 들려줘. 절안 형님께서 자주 걸음하시는 곳이기는 하지만, 그 분을 자꾸만 귀찮게 할 수는 없으니까……. 궁금한 게 많은데 전부 다 여쭤보지는 못했거든.”


  어린 아이인 매장소가 상고신인 절안을 ‘형님’이라고 호칭하는 것을 듣고, 린신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이 정답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이도 얼추 맞는 듯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을 가지기에는 무언가 마음에 걸렸다.


  “그 때 그 돌……, 아니, 그 알이 너야?”


  린신은 반신반의 하며 물었다.


  “응?”


  린신의 뜬금없는 질문에, 매장소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네가 나한테 처음 말 걸었던 그 곳에 있던 커다란 나무. 삼백 년 전쯤에 그 나무 아래에 놓여있던 봉황 알 말이야.”


  설명을 덧붙이자 매장소는 그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맞을 거야. 내 또래의 봉황은 나뿐이니까. 알 속에 있을 때의 기억은 없지만, 절안 형님께서 나를 그 나무 아래에 두었다고 하셨어. 그 나무가 이 십리도림에서 가장 크고 나이가 많대. 십리도림의 천도복숭아는 생(生)의 기운을 지니고 있잖아. 그 나무는 가장 오랜 시간 생의 기운을 축적해왔으니까, 그 정기를 받을 수 있도록 해 주신 거지.”


  그 알이 무사히 부화되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하였으나, 그 사실을 제 눈으로 직접 목격하자, 린신의 안에서 삼 백여 년 전,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의 안도감이 되살아났다. 이에 눈가가 뜨거워지고 시야가 흐려지려던 찰나, 또 다시 누군가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예서 무얼 하고 있는 게냐.”


  이번에는 굵직한 어른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다정다감하고 정이 많은 늙은 봉황의 목소리였다. 청구에 자주 걸음 하여 호제 부부와 시간을 보냈기에 린신이 잘 아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린신은 절안을 볼 때마다 삼 백여 년 전 일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이 떠올라, 그가 청구에 올 때마다 여우굴을 벗어나 숲을 뛰어다니곤 했었다. 이번에도 절안의 목소리는 린신에게서 그러한 감정들을 불러일으켰고, 그 탓에 비어져 나오던 눈물은 쏙 들어가고 말았다.


  “절안 형님!”


  매장소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나 반갑게 절안을 불렀다. 반면, 린신은 자리에 앉은 채로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자그마한 두 주먹은 불안감에 잘게 떨리고 있었다.


  ‘어떡하지? 그 날의 일을 사실대로 고해야 할까? 상대는 절안 상신이야. 그 날의 진상을 여태 모르고 있을 리가 없어. 분명 알고도 자비를 베푸신 거야. 저 아이가 무사히 태어났으니까 책임을 묻지 않은 것뿐이라는 거, 충분히 알 수 있다고. 상신께서 모른 척 해 주신다고 나까지 모른 척 해서는…….’


  린신이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사이, 절안은 어느새 두 아이 곁으로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호오.”


  심지어 린신은 절안이 저를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고 있는 것도 알지 못했다.


  “장소야, 네가 봉황은 봉황인가보다. 벌써부터 구미호를 벗 삼은 것을 보니 말이다. 어째서 하필 이 녀석인지는 모르겠다만…….”


  절안은 만면에 장난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린신을 쳐다보는 한편, 한쪽 손으로는 매장소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다른 쪽 손으로 불시에 린신의 볼을 꼬집었다.


  “아……!”


  그제야 절안이 제 곁에 있음을 알아차린 린신은 깜짝 놀라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꼴을 보고 절안의 입 꼬리가 조금 더 올라갔다.


  “어찌 그리 놀라는 게야?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건만. 네 녀석, 분명 백지의 처조카였지?”


  린신은 마른침을 삼키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절안은 무릎을 살짝 굽히고 허리를 숙여 린신과 눈높이를 맞췄다.


  “내가 청구에 갈 때마다 나를 피해 달아나곤 했었지. 내가 그렇게나 무서운 신선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현이 녀석은 상신 소리는 하지 않아도 좋으니 최소한 형님이라 하는 것이 어떻겠느냐 그리 일러도 매번 이름을 불러댈 정도이거늘, 또래인 너는 또 왜 이렇게까지 정 반대인 것이야?”


  린신의 예상대로 절안의 눈빛은 분명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자의 것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그저 순진한 꼬맹이 하나 놀려먹는 짓궂은 어른 정도로 보일 수 있었으나, 그 눈동자 깊은 곳에는 진한 원망이 서려있었던 것이다. 그제야 린신은 매장소가 그 때 그 알 속에 있던 새끼 봉황이라는 생각에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이유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봉황은 불을 품고 태어나는 존재였다. 그런데 매장소의 손은 불을 품고 태어난 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차가웠던 것이다. 어린 봉황에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리고 절안의 눈빛으로 보아, 그 원인이 린신에게 있다는 것 역시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러니 더더욱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린신이 쩔쩔매고 있을 때, 작은 손 하나가 절안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다름 아닌 매장소였다.


  “아야!”


  절안은 부러 엄살을 부리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매장소는 눈 하나 깜짝 하지 않았다.


  “장소의 벗입니다! 그만 놀리시지요.”


  얼마나 함께 있었다고, 또 몇 마디나 나누었다고 벗이라 칭하는 것인지, 린신은 매장소의 태도가 황당하면서도 원망이 담긴 절안의 눈빛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준 것에 감사했다. 동시에 절안이 이 어린 봉황을 얼마나 귀애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절안의 성품이 어떻든 간에 그는 상고신이고, 매장소는 고작 삼백 살 정도 먹은 어린 아이였다. 그런 두 사람의 사이가 이 만큼이나 허물이 없다는 것이 그 귀애의 증거였다.


  “처음으로 사귄 벗입니다. 그리 겁을 주셨다가 장소가 하나뿐인 벗을 잃어도 좋단 말씀이십니까?”


  매장소가 한 단어, 한 단어에 힘을 주어 또박또박 따지고 들자, 절안은 진심으로 당황스러운 기색을 보이며 손을 내저었다.


  “물론 그런 것은 아니다. 절대로 아니지. 다만 아직 바깥 공기가 서늘하지 않더냐. 이 형님은 네가 또 앓을까봐 그것이 염려되어 그런 거란다. 친우가 어서 돌아가야 너 또한 처소로 돌아갈 것이 아니냐.”


  아무리 똑 부러져도 아이는 아이인지라, 매장소는 절안의 변명에 손쉽게 넘어가, 금세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역시 그렇지요……. 역시 이번에도 장소가 봉황답지 못하게 몸이 약한 탓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은 매장소를 바라보며 절안은 괴로운 낯빛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다시금 린신을 향해 원망스런 눈길을 보냈다. 하지만 곧 그마저도 다 부질없다는 듯 체념한 표정으로 고개를 젓고는 매장소를 안아 올려, 부드럽게 등을 토닥이기 시작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너를 그 나무 아래 둔 내 잘못이지. 그 탓에 네 스스로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신력이 네 안에 깃든 것이다. 이 형님이 있으니 몸이 자랄수록 조금씩 나아질 게야. 일찍부터 하루 종일 십리도림을 돌아다녔다 들었다. 이제 곧 노을이 질 시간이니 오늘은 이만 들어가서 쉬자. 어차피 나는 청구의 여우들과 연이 깊으니, 네 친우 역시 언제든 십리도림에 와도 된단다. 아쉽지만 벗과 어울리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자꾸나.”


  여전히 린신을 보는 절안의 눈빛에는 원망이 서려 있었으나, 목소리만은 매우 다정했다. 매장소는 절안의 품에서 고개를 끄덕이고는 린신 쪽을 돌아보았다.


  “금방 다시 와야 해! 나는 항상 여기 있으니까, 언제든지 십리도림에 오면 날 만날 수 있을 거야. 그 때는 꼭 청구 얘기를 들려줘.”


  린신은 매장소와 절안을 번갈아 쳐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그 때 저 늙은 봉황의 눈빛이 얼마나 무서웠는지 자네는 아마 평생 모를 게야. 내 잘못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고! 하여간 별로 마음에 안 든다니까. 그런데 자네는 매번 절안 편이나 들고 말이지. 물론, 나도 절안이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인 것은 알지만…….”


  절안이 나가고 둘만 남은 뒤, 린신은 아예 매장소의 옆자리에 드러누웠다. 매장소는 조금 미안한 듯 웃으며 린신의 긴 앞머리를 쓸어 넘겨주었다.


  “……내가 이리 투정을 부리면 자네는 마치 어린 아이 달래듯 나를 달래지. 그리고 그것을 즐긴다는 걸 알아. 약간은 미안해한다는 것도.”


  린신이 익숙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매장소는 아예 그런 린신 쪽으로 몸을 돌리더니 이내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린신은 이 역시 익숙한 듯 팔을 벌려 매장소를 감싸 안았다.


  “벌써 일만 년 가까이 매일같이 들었던 이야기로군.”


  린신의 입술이 매장소의 이마에 살며시 닿았다.


  “그렇다면 이제 자네도 내게 매번 돌려주던 그 말을 해 주어야지. 일만 년 가까이 매일같이 해 주던 그 말.”


  그 말에 매장소는 쿡쿡 웃더니 린신의 품으로 조금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사해팔황 최고의 의원은 절안 형님인지 몰라도 내게 있어 최고의 의원은 자네일세. 내 병약한 몸을 다스리는 약 중 가장 효능이 좋은 것이 바로 자네의 따스한 품이니까.”


  창틈으로 도화를 닮은 분홍빛의 달콤함이 새어드는 듯했다. 아직 그 곁을 지나고 있던 절안은 어린 봉황의 말을 듣고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아우 된 녀석이 제 걱정에 하루하루 늙어가는 형님을 두고 배은망덕하기는!’


하지만 이내 그의 입가에도 기분 좋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는 문득 호제의 넷째 아들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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