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se of Isley.





  [ESPERA 세계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액제 이용 중: 1일 2시간 38분 남음)]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를 보며 잠시 어울리지 않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본가에 안 간 지 얼마나 됐더라?”


  이번 연휴는 상당히 긴 편이었다. 닷새 정도만 되었어도 고민하지 않았겠지만, 무려 열흘이었다. 열흘. 이만큼이나 쉬는데도 집에 가 보지 않는다면 부모님의 감당하기 힘든 잔소리가 뒤따를 것이다. 그간 좀처럼 본가에 잘 가지 않았던 터라 이번에 가면 연휴 내내 붙잡혀 있어야 할 것이 뻔했다. 지금 사용 중인 정액 이용권은 내일이면 사용 시간이 모두 소진되겠지만, 자동 결제를 걸어두었으니 곧바로 새 이용권이 결제될 테고, 그러면 본가에 머무는 9일간은 접속 한 번 못 해보고 월 이용권의 3분의 1 가량을 그냥 버리는 꼴이었다. 그 동네에 버츄얼 모드가 지원되는 PC방이 생겼을 리 없으니.

  역시 오늘 종료하고 나면 바로 자동 결제부터 해지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아슬람 자유시장 길로 들어선다. 목적지는 ‘붉은 용’이 사는 곳. 만나고 싶은 사람은 언제나 그 곳에 있으니까. 항상 상인들로 붐비던 거리가 오늘은 매우 한산했다. 그나마 접속한 사람들도 손님이 없으니 대부분 가판에 아바타를 앉혀놓은 채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하기야, 이런 긴 연휴가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니 매일같이 하는 게임보다는 여행이라도 가는 것이 보통이겠지.


  “허?”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여기라면 누구라도 있을 줄 알았는데. 항상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붉은 용의 집에 오늘은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그래도 조금만 기다리면 누군가 오지 않을까. 소파에 앉아 한동안 굳게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하지만 30분 넘도록 그 누구도 문을 열지 않았다. 혹시나 싶어 몇 번이나 거듭 길드 창을 열어보았지만 접속자 수는 1에 머문 채 늘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라이퀴아라도 있다면 모를까, 혼자서 할 것 같으면 사룡도 지겨운데. 스피어 나이츠나 힐더 녀석들은 접속했으려나. 산책 삼아 람다 성까지 가 볼까. 아니, 귀찮다. 귓말 한 번 해 보면 될 일인데. 아니, 아니다. 그 녀석들은 라이퀴아의 친구들이지, 내 친구들은 아니니까. 라이퀴아도 나를 그 틈에 끼워줄 생각은 전혀 없는 것 같은데, 허락 없이 라이퀴아의 친구들에게 친한 척을 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하지만 혼자서는 영 심심하단 말이지.

  한참 넋을 놓고 앉아 있다 보니 어느새 한 시간이 지나 있었다. 앞으로 9일이나 이곳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데 이렇게 마냥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난번에 재미삼아 만들었던 부캐라도 키워봐야겠다. 저렙 사냥터에 가본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이니, 신선하게 느껴질 지도 모른다. 그래, 그거라면 그 녀석 없이 혼자 하더라도 아주 조금은 재미있을지도.







- Case of Raiquia





  [ESPERA 세계에 접속하신 것을 환영합니다.]
  [(정액제 이용 중: 27일 5시간 2분 남음)]


  “에피타이저! 나 왔ㅇ……, 아.”


  힘차게 소리치며 문을 열어 젖혔지만 답이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아차리고 입을 다물었다. 에피타이저의 집은 텅 빈 채였다. 시장에도 사람이 없던데, 역시 다들 명절은 가족과 함께 보내려나.

  그래도 모두 상당한 헤비유저들이니, 기다리면 누군가 한 명쯤은 오지 않을까 싶어, 일단은 소파에 드러누웠다. 풀썩, 쿠션 사이로 바람 빠지는 소리 같은 것이 났다. 당장 내다 버릴 줄 알았는데, 계속 쓰고 있단 말이지. 이 요상한 디자인의 소파를 사온 날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실 소파뿐만이 아니었다. 멋대로 에피타이저의 집에 눌러앉은 것도 모자라 꽤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이고 있으니까.

  최근에는 거의 포기한 것 같기는 했지만, 에피타이저는 아직도 가끔씩 이러한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시했다. 그러면서도 끝내 더부살이들을 쫓아내지는 않았다. 에피타이저의 그런 점이 좋았다. 마음을 편하게 해준달까. 결국 다 내어주기는 하더라도 마냥 퍼 주지만은 않는다는 점이. 월세를 내겠다고 하면 거절하지 않고 받을 것 같다는 점이. 오래 전의 누군가처럼, 신뢰할 수 없을 정도로 무조건적으로 친절하지만은 않다는 점이…….


  “그러고 보니 그 녀석도 나 못지않은 겜폐인인데.”


  길드 창을 띄워 접속자를 확인한다. 하지만 길드원 중 접속자는 한 명 뿐이었다. 나 한 명.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녀석’만은 접속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길드 창을 닫고, 근래 들어 자주 어울렸던 스피어 나이츠나 힐더, 냥꾼들에게 귓말을 해 보려다가 귓말 거부 상태라는 것을 떠올리고 관두었다. 조금 불편해도 귓말 거부를 풀 생각은 없었다. 사연이야 어찌되었든 유명인사가 되어버린 건 사실인지라 복귀 소식이 알려지자, 닉네임을 바꿨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모르는 사람들에게 귓말이 왔다. 대부분은 접속 상태인지 찔러보는 내용이었고, 때로는 괜히 시비를 걸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온라인에서의 인연에 대한 냉소적인 인식은 이전보다 훨씬 덜해졌지만, 그래도 단지 유명세만 쫓아온 이들과 억지로 연을 맺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라고 하면 타이난이 상처받으려나. 그런 생각이 들어 웃음이 나왔다.


  “좋아, 그럼…….”


  자리에서 일어나 다시 거리로 향한다. 귓말 거부는 풀 수 없으니, 직접 아슬람 성과 람다 성에 가볼 생각이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부 다 헛걸음이었다. 아슬람 성에 방문했을 때에는 메리메리와 엑스트라 자매는 물론이고 레옹을 포함한 스피어 나이츠의 다른 길드원들 역시 알만한 얼굴들은 모두 부재중이었다. 그나마 나오는 길에 와루캥과 마주치긴 했으나, 그 역시 곧 나가봐야 한다고 했다. 람다 쪽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접속 중인 소수의 힐더 길드원들이 알아보고 인사를 해왔으나, 다들 그다지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냥꾼들은 그래도 접속한 인원이 꽤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상대적으로 티어가 낮은 사람들끼리 연휴 동안 렙업이나 하자고 모인 것이어서 함께 어울려 무료함을 달래기에는 다소 모자란 감이 있었다.

  냥꾼들에게 티어 레벨을 올리기 좋은 사냥터와 던전, 퀘스트 같은 것들을 조언해준 뒤, 간만에 혼자 샌드스톰으로 향했다. 냥꾼들이 퍼스트 클리어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에피타이저와 이슬레이, 타이난과 함께 4인 파티로 가서 무리 없이 클리어 했지만, 오늘은 어차피 아무도 없는 바, 오래 전에 도전했던 것처럼 솔플로 클리어 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막상 입구에 도착하니 의욕이 싹 사라졌다. 한참을 망설이다가 결국 아슬람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예전에는 솔플이 더 편했는데, 요즈음은 혼자 노는 것이 영 내키지 않는다. 남아도는 것이 시간이니 천천히 사막 길을 걸어서 아슬람까지 가 볼까.

  홀로 사막을 걸으며 함께 샌드스톰을 클리어 했던 날을 떠올려 본다. 출발하기 전, 샌드스톰은 탱킹하기 힘들다며 다신 안 간다고 소리를 질러대는 에피타이저를 살살 구슬리는데, 이슬레이와 타이난이 몇 번이나 훼방을 놓았었다. 사실 자신 없는 거 아니냐, 지난번에 보니 생각보다 약하더라 하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 소리에 발끈한 에피타이저는 앞장서서 샌드스톰에 입장했고, 정작 실수는 전부 타이난이 저질렀다. 그 날, 만약을 대비해 탱커인 에피타이저를 위해 아껴둔 리저렉션은 몽땅 타이난에게 써야 했다. 우습게도 막보스는 그런 타이난이 쓸 활을 드랍했고, 에피타이저는 민폐나 끼친 놈이 템까지 가져간다며 분노했다. 그리고 이슬레이는―


  ‘좋아해, 라이퀴아. 드디어 나도 정상적으로 샌드스톰을……. 네가 아니었으면 이번에도 힘들었을 거야.’


  상당히 기뻐했다. 도저히 ‘그’ 이슬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해맑게.


  ‘옛날에 네가 얼마나 트롤이었는진 몰라도 지금은 아니니까. 잘했어, 이슬레이.’


  이슬레이는 그 말에 거의 울 듯한 표정이 되어서는―나중에 타이난이 말하길, 그 순간, 이슬레이가 해킹을 당한 게 아닐까 생각했다고―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리고…….


  “아아악!!”


  슬며시 고개를 드는 기억에, 머리를 마구 쥐어뜯었다.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 날, 이슬레이는 자기보다 훨씬 키가 작은 나를 번쩍 들더니,


  “미친 새끼, 진짜……!!”


  키스를 했다.


  “그 녀석,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그리고 나는 왜……!”


  키스를 당했을 당시, 나는 제자리에서 돌처럼 굳어버렸다. 당황과 혼란에 감싸인 나를 보고 에피타이저와 타이난은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한 박자 늦게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이슬레이의 등짝을 후려쳤다. 아마도 내 반응 때문에 수습불가가 되어버린 분위기를 전환하기 위해서였겠지. 그래서 나도 곧 두 사람과 합세하여 이슬레이에게 발길질을 했다. 그렇게 이슬레이의 돌발 행동은 그저 장난으로 치부되고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 키스를 가볍게 넘길 수 없었다. 아니, 키스 그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진짜 환장할 노릇인 점이 무엇인가 하니, 그 이후부터 이슬레이와 마주친다거나, 마주치지 않더라도 그 녀석의 얼굴이나 그 날의 일을 떠올릴 때마다 어김없이 설렘을 느끼는 스스로였다. 그 날 일에 대해, 이슬레이가 없는 곳에서는 조금 전에 그랬던 것처럼 곧잘 미친 새끼라든가, 또라이라든가 욕지거리를 해대다가도 막상 직접 마주하게 되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고 마는 것은 그 때문이었다.

  미친 건 나일지도 몰라. 제대로 얼굴을 마주보지도 못하면서, 자꾸만 핑계를 대면서 한 공간에 있는 걸 피하고 있는 주제에, 이슬레이가 접속해 있는 것을 보면 반가운 마음부터 들었고, 알 수 없는 기대감 같은 것도 생겼다. ……잠깐, 기대감이라고? 나는 뭘 기대하고 있는 거지?

  사막 한 가운데서 걸음을 멈추었다. 어렴풋이 아슬람 성의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정말로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특별한 관계나 각별한 감정 같은 걸 기대하는 걸까. 그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나 가슴이 죄어오는데도 이 감정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바보는 아니다. 그렇다면 역시 나는 이슬레이와 그런 사이가 되기를 원하는 걸까. 그 날의 일이 그저 짓궂은 장난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는 걸까. 하지만 이건 그저―


  ‘게임일 뿐인데.’
  “게임일 뿐인데.”


  그 옛날의 기억이, 자기 자신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메아리친다.


  ‘부질없잖아.’
  “부질없잖아.”


  서로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된다고 해도 결국,


  ‘게임 접으면 끊길 인연인데.’
  “게임 접으면 끊길 인연인데.”


  그 사람, 이슬레이를 알아?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알고말고. 모를 수가 없지. 그렇게 당당하게 답한 뒤,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어떻게 생겼지? 일단은 키가 크고……, 아, 그건 커스터마이징이지. 그럼 이름은? 본명이 이슬레이일 리는 없을 테고. 나이는…… 나보다 많다는 건 알지만 딱 거기까지. 겨우 이 정도로 나는―


  “너를 알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에피타이저도 마찬가지다. 타이난도, 카타나도, 메리메리도, 레옹도, 에이스도……. 전부 모른다. 처음부터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는 걸 새삼스럽게 깨닫는 순간이다.

  2년이라는 시간만큼 자랐고, 조금은 달라졌다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여전히 두려웠다. 얼굴도, 이름도, 나이도, 사는 곳도, 아무 것도 모르는 이들이지만, 그들과의 인연을 진심으로 아끼니까. 하지만 그것은 예전에도, 지금도 잡고 싶다고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인연은 결국 전부 허상이기에. 접속을 종료하면 사라지는 허상. 영원히 접속을 하지 않는다면 영원히 잃게 되는 허상. 2년 전, 온라인에서 인연 쌓는 걸 싫어한다고 말했을 때의 감정이 그런 것이었음을 기억해낸다. 잃어버리고 상처받을 바에는 처음부터 소중한 것을 만들지 않겠노라는 다짐을 했었다. 잊었던 다짐을 다시 떠올리고 마는 것은 아직 덜 자랐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내가 그런 사람이기 때문일까.


  ‘끊길 인연일 지 아닐 지 어떻게 알아? 그걸 네가 어떻게 장담해?’


  2년 전에 이슬레이에게 들었던 말. 그리고 그에게 다시 돌려주었던 말. 그 두 질문의 정답은 ‘알 수 없다’, 그리고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문득 모래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막이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평소와 달리 한산했던 아슬람 자유시장 거리와 외로운 사막의 풍경이 한데 뒤섞인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전부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까. 소중하게 여겼던 인연들이 모두 이렇게 사라져버리는 걸까. 이슬레이도 언젠가는 영영 내 곁에서 사라져버릴까……. 아아, 오늘은 날이 아닌가보다. 게임을 할 기분이 아니야. 아슬람에 도착하면 나가봐야겠다. 잠이나 자야지.







- Case of them




  “아.”


  아슬람에 들어서자마자 라이퀴아는 보고 싶었던, 그러나 아직은 피하고 싶은 얼굴을 마주했다.


  “람다 쪽에서 오네? 샌드스톰 솔플? 너 올 줄 알았으면 좀 더 기다려볼걸. 아무도 없길래 부캐 좀 하고 있었거든.”


  이슬레이는 언제나처럼 능글맞게 웃으며 라이퀴아에게 다가갔다. 그러나 한 걸음 간격 정도로 가까워지자, 그 미소는 일순간에 사라져버렸다. 대신 무언가 난처한 듯한 표정이 떠올랐다.


  “무슨 일 있었어?”
  “어……? 아니. 왜?”


  라이퀴아는 반걸음 정도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돌려 이슬레이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나 이슬레이는 허리까지 숙이며 라이퀴아와 시선을 맞추려 했다.


  “ㅁ, 무, 뭐야……!!”


  다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난 라이퀴아의 얼굴은 터질 듯 붉게 물든 상태였다. 이슬레이의 손이 그 새빨간 볼에 닿았다. 무슨 마법이라도 쓴 건지, 딱 기분 좋은 정도의 시원함이 느껴졌다. 그제야 라이퀴아는 고개를 들어 이슬레이를 쳐다보았다. 난처한 빛이 비치던 이슬레이의 얼굴은 이제 걱정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 녀석,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알았던가?’


  ‘그’ 이슬레이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표정이라니, 영 낯설다고 생각하던 라이퀴아는 문득 자신이 이슬레이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 대해 낯설다니, 어불성설이었다.


  “모르는 거야?”


  이슬레이는 걱정 가득한 표정을 한 채, 라이퀴아를 향해 물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뭘?”


  라이퀴아가 반문하자, 그의 볼에 닿아 있던 이슬레이의 손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엄지손가락이 눈 아래를 쓸었다.


  “너, 울고 있잖아. 몰랐어?”
  “내가?”


  라이퀴아는 손을 들어 두 눈가와 양 볼 어루만졌다. 정말이었다. 눈가와 볼 뿐만 아니라 얼굴 전체가 눈물범벅이었다. 통각을 포함한 모든 감각 수치를 최대치로 설정해 놓은 라이퀴아였으나, 우울한 생각에 깊게 잠겨 있었던 탓에 이 정도로 울고 있었는데도 눈물이 흐르며 뺨을 간질이는 감각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었다.


  “괜찮아?”


  아아, 정말이지 이 자식은 왜 오늘따라 답지 않게 다정한 목소리인 거야. 순식간에 한가득 차오른 눈물이 라이퀴아의 시야를 흐렸다. 라이퀴아는 두 손을 바삐 움직이며 눈물을 훔쳐냈지만, 닦아내는 속도보다 넘쳐흐르는 속도가 더 빨랐다.


  “흐으……, 이…, 이건 그냥, 소셜 모션일 뿐이니까……아무 것도, 흡……. 아니야! 우는 거, 아니라고……! 그냥, 이건 그냥…….”


  되도 않는 변명을 늘어놓는 목소리는 꼴사납게 떨리기까지 했다. 이슬레이는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러니까,”


  기분 좋은 서늘함을 머금은 이슬레이의 손이 라이퀴아의 머리 위에 닿았다. 그리고는 이내 그 기다란 손가락들은 머리카락 사이사이에 감겨들어 빗질을 하듯 천천히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렇게나 울고 싶은 기분이라는 거잖아. 소셜 모션이니까.”


  그 손길은 또 어찌나 다정한지, 오늘 이슬레이는 평소와는 달랐다. 그 낯선 다정함은 눈물을 멈추게 하기는커녕 더 하염없이 쏟아져 내리게 만들었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건데? 내가 너를 모르듯 너도 나를 모르는데. 이렇게 또 너를 믿게 만들고, 기대하게 만들어 놓고 떠나려고?’


  차마 그런 말들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서럽게 울어대기만 하는 라이퀴아를, 이슬레이는 제 품에 감싸 안았다. 이슬레이의 멋스러운 트렌치코트가 눈물로 얼룩져갔다. 그 상태로 얼마나 있었을까. 라이퀴아는 별안간 양 팔로 이슬레이의 등을 감싸고 그의 옷자락을 힘껏 그러쥐었다.


  “……이슬레이.”
  “다 울었어?”


  라이퀴아의 상태가 조금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지 이슬레이는 어느새 다시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옷자락을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배신해도 좋으니까…….”
  “아아, 그러고 보니 오늘 치 사과를 아직 안했네. 미안해, 라이퀴아.”


  이제는 일상이 된 미안하다는 말에, 라이퀴아는 고개를 저었다.


  “한 번 더 악당이 되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 줄게. 이번에는 네가 악당 역할을 하고 싶다면 네가 바라는 대로 영웅이 되어볼게. 그러니까,”


  간신히 멈췄던 눈물이 다시 왈칵 터져 나왔다.


  “그러니까……, 사라지지만 말아줘.”


  뜬금없이 그런 이야기를 하며 서럽게 울어대는 라이퀴아의 등을 도닥이며, 이슬레이는 2년 전, 니벨룽겐을 데려왔던 날, 길드를 만들자는 이야기를 했던 바로 그 날, 라이퀴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차라리 처음부터 친해지지 않는 게 낫다고 했던 건……, 다 잃고 원치 않게 외톨이가 되는 것보다는 애초부터 혼자인 편이 낫다는 뜻이었을까.’


  저와 만나기 전, 라이퀴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으나, 그것이 현실에서의 일이든, 가상 세계에서의 일이든 분명 인간관계에 관한 문제가 있었으리라고, 이슬레이는 생각했다. 그런 사람에게 오늘처럼 모두가 떠나버린 듯한 풍경은 우울한 기분을 들게 하기에 충분할 것이었다. 이슬레이는 지난 일에 대한 죄책감이 조금 더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좋아해, 라이퀴아.”


  지금도 그렇지만 그 때에도 이슬레이는 라이퀴아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리고 라이퀴아도 그만큼 자신을 좋아하는 줄 알았다. 그래서 완벽한 시나리오로 만들어낸 ‘영웅과 악당 놀이’에 라이퀴아 역시 즐겁고 기꺼운 마음으로 임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제 성격이 결코 좋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슬레이였지만, 재미로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악취미는 없다는 것만은 확실하게 이야기 할 수 있었다.


  “좀 더 일찍 진지하게 진심을 전했더라면 오해가 생길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면 네가 상처 입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라이퀴아는 이슬레이의 품에서 빠져나와 한 발 물러섰다. 그는 퉁퉁 부은 눈으로, 그리고 가늘게 떨리는 눈동자로 이슬레이를 노려보았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네가 날 좋아하건 말건, 그건 나중 문제라고. 내가 원하는 건…….”


  이슬레이는 다시 한 발 다가가 라이퀴아의 양 어깨를 잡고 허리를 숙여 그와 시선을 맞췄다.


  “예전에 내가 했던 말 기억 나? 전부 널 배신해도, 네 옆에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으면 그게 다인 거라고.”


  그 날 나누었던 이야기는 아직까지도 채 아물지 않은 상처의 시작이었기에, 라이퀴아는 경계심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찬가지야. 전부 네 곁을 떠나더라도, 단 한 사람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걸로 충분한 거야.”


  이슬레이는 할 수 있는 한 가장 선하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라이퀴아는 그런 이슬레이를 바라보며 무언가 말 하려다 마는 것을 두어 번 반복한 뒤, 마침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가 해 주겠다고? 그 사람을?”


  2년 전에는 제대로 된 답을 듣지 못했던 질문이었다. 이번엔 이슬레이도 그 질문을 대충 웃어넘길 생각이 없었다.


  “물론이지. 어떻게 해서든 네 곁에 있을 거야. 좋아하니까.”


  그는 최선을 다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진심을 가득 담은 목소리를 내었다. 먼저 지어보였던 미소는 어땠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번에는 확실히 의도한 것들이 제대로 전달된 듯했다. 라이퀴아의 얼굴에 안도의 빛이 떠오른 것이다. 그와 동시에 아주 천천히, 이슬레이의 입술이 라이퀴아의 입술로 향했다. 라이퀴아는 눈을 감는 것으로 허락의 뜻을 전했다. 이내 두 입술이 맞닿았다. 지난번의 장난스런 키스와는 확연히 다른, 마음과 마음이 한데 얽혀드는 입맞춤이었다.


  ‘이번 연휴에도 본가에는 못 가겠군. 자동 결제도 그냥 놔둬야겠어.’


  긴 연휴, 이 황금 같은 시간, 이슬레이는 라이퀴아와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시작했다.







융님의 창작활동을 응원하고 싶으세요?